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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2:14-21
제목: 선으로 악을 이기라
어제 본문 말씀이 교회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있는 영적 위계성과 수평적 평등성을 다루었다면 오늘 본문은 교우들 안에 격한 감정이 오고 갈 수 있는 이런 상태, 교회 안팎의 사람들과 감정의 폭이 굉장히 요동치듯이 어려워지는 상황, 이때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를 줍니다. 어제 본문은 대부분은 은사 평등주의 또는 카리스마 평등주의 이렇게 부르는 본문입니다. 모아 놓은 사람들이 다양한 직능과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지체 사이에는 평등이 존재합니다. 높낮이가 없습니다. 이 지체들 사이에는 수평적인 동역과 연대와 결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 따르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좀 도발하려고 하는 지도력을 많이 행사하려고 하는 그런 일련의 돌출적인 그런 구성원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충성심의 분량대로 생각하라, 하나님이 맡기신 신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임의 정도에 따라 생각하라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 여전히 수평적인,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충성심의 위계질서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 참여한 구성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박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박해하는 자들 이들은 뭡니까? 악으로 박해합니다. 이들은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박해자입니다. 그런데 이 박해자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냐면 악으로 선을, 악으로 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발선, 발악이 아니라 발선, 선을 발하여 그러니까 악을 이기는 것 발선제악입니다. 선을 발하여 악을 제압하는 이런 방식의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박해하고, 지속적으로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내가 선으로 대한다는 말은 악의 허용, 악의 무한한 허용을 의미하는 때가 된다면은 이것은 맞지 않습니다. 여기서 참으라는 말은 악의 허용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가정폭력의 일방이 타방에게 폭력을 계속 가합니다. 이때 참으라는 말은 폭력을 계속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당한 그 앙심을 핏빛 복수로 대응할 것을 참으라는 뜻이지 악행 그 자체를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은 내가 빠져나갈 수 없는 구조 안에서 지속적으로 악행을 당할 때 그때는 복수도 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피해야 합니다. ‘피할 수도 없다면요?’ 그러면 이때는 아주 중요합니다. 피할 수 없고 자기를 보호할 길이 없을 때는 악행을 멈추는 대응 폭력을 해야 됩니다. 이 대응 폭력은 방어 폭력인데 이 방어 폭력은 강도가 우리를 찌를 때 도둑이 우리를 찌를 때 적군이 우리를 공격할 때 이때는 대응하고 방어하는 폭력 이것을 일종의 회복하는 폭력입니다. 그러니까 이 폭력은 폭력이지만 적의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폭력입니다. 이것은 어떤 권리에 따라 삼습니까? 어떤 권리에 따라 정당화 됩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내 생명을 보양하고 내 생명을 지켜야 될 의무가 나한테 있습니다. 그래서 강도가 나를 찌를 때는 악행을 즉시 중단하여야 하고 그 악행을 무효화시키는 대응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내가 용서하기만 하면 문제가 풀리는 그 상황에서 하는 말이지 악행의 무한한 허용과 악행의 무한한 인내를 의미하는 것 아닙니다. 즉 악행은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완료된 악행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option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대응 폭력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폭력입니다.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보복적인 행동을 하는 방법이 하나 있고, 아니면 정반대로 내가 그의 양심을 근원적으로 진동시켜서 그의 양심을 회복하고 내가 그에게 당했던 모든 악행도 스스로 망각할 수 있는 치유적 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하라.
그래서 오늘 본문 보십시오. 원수 박해자가 어떤 상태입니까?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원수와 박해자가 지금도 악행을 계속하고 박해를 계속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박해와 악행을 계속하는 사람을 참으라는 말도 아니고 그를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두환 같은 경우는 용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전두환이 왜 용서의 대상이 아니냐면 악행을 계속 했습니다. 광주 사람에 대한 악행을 계속 했고 책을 써서 악행을 범했고 그 5·18 때 악행을 계속 범하면서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을 용서하자는 말은 악행을 참고 넘어가자는 뜻입니다.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 이 본문은 계속되는 악행, 현재 진행형 악행, 현재 진행형 박해에 대해서 무한히 관대하고 참고 견디라 그런 말이 전혀 아니라 완료된 악행, 이미 집행된 박해, 그런데 그 박해자와 그 완료, 나에게 악행을 완료한 그 악인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다고 봐야 됩니까? 요런 상태에 있습니다.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러니까 원수가 지금 나한테 형편없이 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원수가 지금. 그러니까 한때는 나를 박해했지만 그 원수 박해자가 지금은 나한테 수세에 몰려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때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진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급한 용서를 명령하는 본문으로 읽어서도 안 되고, 악행을 무한히 관대하게 참으라고 해서도 안 되고, 악행이 별것 아니니까 용서를 하라는 말도 아니고, 인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정죄하는 논리로 이 본문이 사용돼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 아닌가요? 이때 원수와 박해자는 지금 우리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수세에 몰려있고 지금 상황은 역전됐습니다. 이때 신명기 32장 35절을 인용해서 바울은 말합니다. 원수는 내가 갚을 테니까 너는 원수 갚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해라. 어떻게?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러면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 ‘어? 이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말은 고문, 숯불 고문 아닌가?’ 아닙니다. 히브리인들 세계관에서 죄를 가장 참혹하게 뉘우치는 것은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움, 그러니까 부끄러움이 가장 히브리인들한테는 도덕적 각성을 하기 직전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부끄럽게 느낄 수 있도록 얼굴이 화끈거리게 하라. 어떻게? 숯불을 쌓아서 우리 체온이 36.5도인데 한 38도나 40도 정도 몸에 온 얼굴에 열이 바짝 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려서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여 도덕적 각성을 유도하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 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렇게 자신한테 악행을 가했던 이 원수를 이 몰락한 원수를 이렇게 자기에게 수세에 몰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원수를 먹이고 이렇게 선대하면은 이 원수 박해자는 우리 성도가 발휘하는 이 가장 예상치 못한 이 선함, 예상치 못했던 이 놀라운 용서 앞에 이 원수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수치감을 느끼면서 도덕적 각성, 영적 갱신에 이를 수 있으니까 숯불을 쌓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맨날 자주 일어나는 부부싸움은 어떨까요? 부부싸움은 회개하지 않은 남편이 말로 회개하면서 악행은 그대로 하는데 아내는 이런 남편을 로마서 12장 21절처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이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악행이 현재 진행 중일 때는 악행을 멈추는 대응 행동을 해야 되고, 악행이 폭력으로 나타날 때는 내가 대응 폭력으로 나타나서 내 생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때는 윤리적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윤리적으로 착한 병사가 될 수 있습니까? 내 목숨을 지키려고 총을 쏘는데요. 지금 무장 강도가 우리 집에 와서 내 자녀와 가족을 칼로 찌르려고 하는데 내가 윤리적으로 착한 가장이 돼서 무장 강도의 그 무장력을 내가 온몸으로 받고 내가 칼에 찢기면서 내 자녀 앞에 죽어가는 장면 그것은 엄청 안 됩니다. 무장 강도의 무장 악행은 즉시 중단하기 위해서 내가 대응 행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착해지는 것 그것을 언제부터 기대하냐 하면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권리가 확보된 사람한테만 윤리적으로 착한 것을 기대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 선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이때 악, 이때 모든 사람은 내가 마음을 먹고 평화를 도모하면은 평화가 일어날 수 있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 할 때 이 모든 사람은 나에게 악행을 가했거나, 나에게 도발해 오거나, 나에게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인데 현재 내가 평화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으면은 평화가 창조되는 요런 단계에서 내가 모든 사람과 평화를 도모해야 하지 현재 진행형 악행을 계속 가하고, 비난을 가하고, 박해를 가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내가 그 모든 악행을 참아내고 악행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바보가 되라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늘 전반적으로 박해하는 자들, 악인들,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요 말씀과 약간 결이 다른 겁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요 16절은 바로 3절과 연결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이 말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자기를 지나치게 지혜로운 사람으로 처신하거나 자기가 높은 데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모든 교회 문제를 좌우하듯이 주장하듯이 지도자의 위치에 자신을 함부로 두지 말라, 이런 뜻입니다. 요것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요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 말은 도저히 우리가 이해를 못합니다. 이 현재 진행형 박해하는, 현재 진행형 박해하는 자를 어떻게 축복합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지금 박해를 하는 사람들을 내가 대응하면서 그 박해를 나에게 직접 폭력을 가하는 폭력을 대응하면서 그가 구원 받도록 그가 나에게 박해하고 그가 나에게 원수처럼 대하는 저 행동도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해서 그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직장 상사를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어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게 바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저주에서 내 직장 상사를, 내 남편을, 내 원수를, 나의 이웃을, 나를 괴롭히는 이웃을 풀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축복하라는 뜻입니다. 즉 아담의 저주에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풀어주십시오, 나를 박해하는 저 사람을 구원해 주셔야 내 구원이 온전해 집니다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마 이래저래 가시 돋친 인간관계가 많이 있을 텐데 오늘 본문을 지혜롭게 적용하여 우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쏟아 울고,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냉정을 되찾고, 그가 아담의 저주에서 풀려나도록 기도하고 지금 바로 악행을 나에게 가하면서 내 생명을 위협할 때는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대응 행동을 함으로써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하루를 살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로마서 말씀으로 박해하는 자들을 맞서서 대응할 수 있게 하시고 우는 자들과 슬퍼하는 자들에게 각각 적합하게 공감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을 주시고 한때는 나를 박해했지만 지금은 몰락한 원수를 부끄럽게 할 만큼 발선하여 악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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