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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3:8-10
제목: 율법의 완성=이웃사랑
여러분, 모세오경에는 모두 613가지의 계명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나누었지요. 그런데 이 613가지의 계명을 자세하게 가르치는 것을 ‘할라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신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쳤던, 랍비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613가지의 계명을 다시 세분화해서 수천 가지의 시행 세칙으로 나누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613가지의 계명을 이렇게 세분화하여 가르쳐서 모든 행동을 계명에 저촉되는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 저촉적 행동, 계명 위반적 행동이 도처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큼 계명의 범위를 아주, 아주 축자적으로 자세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이것을 얼마나 세밀하게 나누었냐 하면은 안식일에서 일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안식일에 일한다는 말은 1kg이 넘는 물건을 들고 1.2km 걸어가는 것 이상하면 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500m 걸어가는 것은 괜찮다 라고 했습니다. 그다음에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뜻을 안식일에는 음식을 화기하여 불 때는 것, 불을 때는 것 이것 하지마라, 왜? 불을 때려면 나무를 해 와야 됩니다. 화목,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됩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러 노동을 하면은 종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집안 전체는 음식 먹는다고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불을 피우지 말라는 말이 또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계명이 다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 이 율법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대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갈릴리 일대에는 랍비들이 만들어 놓은 613가지를 축자적으로 세분화시켜 놓은 시행 세칙들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동을 이야기하는 그 장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첫째 계명이고,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했고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이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맥락이 처음으로 나온 본문이 레위기 19장 18절입니다. 그러니까 레위기 전체를 보면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이 처음으로 자세히 나오는 그 맥락을 보면은 이 이웃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구약에 나타날 때 모든 맥락을 보면은 평균 이하의 가난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 평균보다 훨씬 더 이스라엘 백성의 평균보다 훨씬 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뭐냐 하냐면 평균보다 훨씬 빈곤하게 살아가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 그들을 네 이웃이라고 이렇게 보통 정의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계명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한 사람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네 이웃입니다. 이때 ‘네’ 이것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언약 공동체가 n/1씩, 십시일반으로 십일조를 하면은 이웃 사랑이 되기 때문에 십일조 계명은 바로 이웃 사랑 계명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이웃이 뭡니까? 객과 고아와 과부, 객이란 말은 난민입니다. 난민, 난민입니다. 외국에서 흘러들어온 난민들입니다. 경제 난민, 전쟁 난민, 기후 재앙 난민입니다. 이 난민들이 먼저 이웃이고 그다음에 고아, 과부, 고아와 과부는 전쟁미망인 또는 전쟁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 놓은 아이들입니다. 그러니까 국가 보훈 대상자들입니다. 요즘 말하면은 고아와 과부는 국가 보훈처의 보훈 대상자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고아와 과부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했던 것은 국가 보훈처의 돌봄 대상들을 잘 챙기라는 말입니다. 이 난민, 객을 도우라는 말, 그다음 남종과 여종,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 세상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부요하게 사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n/1씩만 내면은 충분히 객과 고아와 과부가 몸과 관련하여, 의식주와 관련해서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본 거죠. 그렇습니다. 실제로.
십일조라는 이 헌금은 마법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내기 때문에 이 십일조는 지체 없이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쓰여져야 됩니다. 쌓아 놓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쌓아놓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교역자, 제사장의 생계비를 위하여 쌓아놔야 됩니다. 그다음에 건물 충전 보전금 또는 감가상각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건물이 없기 때문에 건물 감가상각비를 쌓아놔야 되는데 그것은 예배당이 돌아가려면요. 우리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얼마큼만은 앞으로 교회 건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립한다고 해놓는 그만큼은 또 쌓아놔야 합니다. 그리고 남는 모든 물질은 교회 안팎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룩한 낭비가 되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십일조는 진짜 큰 액수입니다. 가처분 소득의 십일조를 내니까 너무나 큰돈이 매달 우리가 교회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 교우들이 헌금을 해서 우리 교회 헌금이 매달 1500만원에서 2000만원 사이가 들어옵니다. 이 작은 교회에서도 매달 1500만원에서 2000만원의 수익이 생깁니다. 이것을 교역자의 생활비를 빼고, 충전 부담금을 빼고, 운영비를 빼고, 남는 것은 전부 다 무조건 도와야 됩니다. 교회 돈 아닙니다. 이것, 가향교회 돈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 명성교회 돈이 아니에요. 그래서 네 이웃을 도우라 할 때 이때는 한 사람이 이웃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가 언약 공동체가 언약 공동체에 속한 평균 이하의 빈곤을 경험하는 사람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가능한 겁니다. 이웃 사랑은.
그래서 이웃 사랑은 얼마나 가능하냐 하면은 가난한 사람이 신명기 15장 11절을 보세요. 네 손을 활짝 펴 네 이웃과 형제를 도우면은 네 땅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진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도 땅의 소출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웃은 정의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 악행과 선행의 직접적 수혜자이거나 피해자가 이웃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봅니다. 이웃은 나의 선행과 나의 악행의 직접적 수혜자이거나 피해자입니다. 이때 이웃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두 번째로 이웃은 나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쓰러진 자, 그가 이웃입니다. 그다음에 이웃은 공동체의 대의명분 때문에 가장을 잃은 고아와 과부, 기후 재난민, 전쟁 재난민, 기근 재난민 같이 갑자기 내 삶의 터전에 밀려들어 온 난민들이 이웃입니다. 그래서 결국 즉각적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 즉 몸을 돌볼 만큼,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웃은, 구약성경의 이웃은 평균 이하의 가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그 가난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불렀고, 이웃을 사랑하고 도우라고 했던 모든 율법의 맥락은 객과 고아와 과부와 난민과 레위인과 그 레위인도 실렸습니다. 레위인은 뭐냐 하면은 임지를 구하지 못하여 굶고 있는 전도사들, 임지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레위인 입니다. 그러니까 레위인 훈련을 받았는데 공동체가 보양을 하지 못해서 표류합니다. 그것도 객과 고아와 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사님들에게 월급을 좀 줘야 됩니다. 보통 큰 교회가 신대원 갈 때 전도사님들에게 월급을 80만원, 90만원, 70만원 이렇게 줍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100만원을 줬습니다. 무조건 신학대학원 들어가면. 우리 교회 예산보다 훨씬 많이 준 거죠. 그런데 문제는 전도사님들을 이렇게 표류하게 만들면은 레위인들이 표류하면 우리 후손 자녀들이 크게 손해를 봅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공부를 하지 못하고 대리 운전을 하거나, 학원 강사를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은 우리 교역자들이 이렇게 빈궁하게 처해져서 신학교 공부를 하지 못하면은 나중에 그분들이 목사가 됐을 때 전하는 설교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 후손들에게 엄청난 해를 끼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가난한 신학생들도 도와야 됩니다.
자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십계명을 이미 앞부분을 다 지켰던 유대인들한테는 우상숭배에서 돌아와서 더 이상 하나님 한 분만,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데 완전히 마음이 굳혀진 그 1계명부터 4계명, 5계명 까지가 해결된 사람들에게는 이제 6계명, 7계명, 8계명이 이것이 남았는데 “이 6계명, 7계명, 8계명을 하나하나 세분화 시키지 말고 종합적으로, 직접적으로 한꺼번에 지키는 방법이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언약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먼저. 두 번째로 이것은 내가 보통 내 아파트 옆집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훨씬 평균 이하의 가난을 안고 사는 특수한 빈민들, 그런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나는 십일조를 통해서 이웃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우리 교우들이 이웃 사랑을 하려고 바치는 십일조를 교회는 당회와 장로님과 목사님들은 정말 잘 써야 됩니다.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당회와 목사님, 이런 운영위원, 제직회는 십일조가 잘 쓰여서 빈민들,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안 생기도록 주야로 살펴야 됩니다. 그래서 송파 3모녀 같은 사람이 우리 교구에서 안 일어나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 다녀도 우리 교우들이 알고 있는 빈민들을 교회에 건의해서 그들을 도와야 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돕고 기독교인 아니라고 안 도우면 안 됩니다. 이렇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은 이것은 실현 가능한 계명이고 우리 언약 공동체인 가향교회와 또 언약 공동체의 일부인 제가 즉각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은 이웃이 너무 많아서 내가 내 소득을 가지고 다 도울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한 부담을 주셔서 내가 내 소득을 다 쏟고 우리 가족을 돌볼 처지가 안 될 만큼 이웃에게 돈을 다 낭비하고, 아내에게 생활비도 안 주고, 자녀에게 장학금도 안 주고 이렇게 사는 것, 그렇게 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웃을 보여주십니다. 이웃이 누군가를 몰라서 이웃 사랑을 못하는 것 아닙니다. 일단 여러분, 우리 교우들이 가장 먼저 살펴야 할 이웃은 우리 부모님, 우리 가족, 우리 친척, 내 친한 친구, 나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잘 살펴야 됩니다. 그다음에 우리 교구, 교구민을 잘 살펴야 됩니다. 그다음에 우리 교구민이 알고 있는 가난한 사람도, 우리가 알고 있는 가난한 사람도 그러니까 어떤 우리 교우가 이 가난한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애타하면은 그 교구에 속한 구역장도 마음이 애타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존심 상하지 않게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모르게, 은밀하게 도와야 됩니다. 이렇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다 보면은 율법의 완성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율법이 완성된 곳에는 국가가 필요 없습니다. 사랑만이 헌법이 됩니다. 이웃 사랑이 단 한 가지 헌법으로 작동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자발적인 이웃 사랑으로 단련된 사람들이 들어가서 아무런 공권력의 지시와 협박 없이도 십일조를 하듯이 막 사랑을 베푸는 공동체가 천국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천국이 느껴집니다. 좋은 교회를 다니면은. 좋은 교회를 다니면은 여기가 천국이라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여기가 천국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물질의 십일조만 할까요? 아닙니다. 기도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시간을 바치는 십일조 하면은 교회는 엄청 풍요로워집니다. 십일조를 내는 교우들이 100명만 있으면은 교회는 너무 대단해집니다. 이렇게 대단하게 모인 부를 가지고 우리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은근히 겸손하게, 지혜롭게 부축하다 보면은 가향교회는 여기가 천국이라고 느끼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웃 사랑의 화신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일층 성숙해 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구약 성경이 가르친 이웃 사랑을 오늘도 할 수 있도록 내 인생의 도상에서 내가 재능을 소비하고 내 돈을 소비할 이웃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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