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기 |
본문: 로마서 13:11-14
제목: 영적 대각성, 대회심
오늘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종말의 때가 임박했음을 확신하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본문이 여기에 배치됐는가는 참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12장에서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친밀한 사랑의 결속으로 똘똘 뭉치고 서로 상호 부조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3장은 교회 바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정부주의자, 반정부주의자가 돼야 되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국가와 공존할 수 있다, 왜냐 하면은 법치주의를 구현하는 국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심판 대행자고 권선징악자로서 교회랑 아무런 충돌이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웃 사랑을 위해서 마음까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면 되고 국가는 마음을 통치하거나 양심을 통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인간 생활이 문명 생활의 경계 바깥으로 뛰쳐나가서 야만 사회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국가는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인간 사회의 도덕적인 무정부상태를 막아준다, 그래서 국가에 세금 바치는 것도 불가피한 면이 있기 때문에 국가의 통치 행위에 복종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국가의 통치 행위, 이런 국가의 통치 행위가 잠정적인 질서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100% 구현되면은 이런 국가의 공권력 의존적인 통치는 끝난다, 국가의 공권력 의존적 통치는 한시적이고 제한 돼 있다, 뭐 그런 말을 지금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유명한 이유는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밀라노에서 친구 집에 머물다가 이 본문을 순식간에 일깨우는 어린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로마서 13장 11절을 자기가 회심할 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그런 본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일종의 조기 유학파이었거든요. 지금 알제리라고 하는 나라, 지금 알제리 출신이에요. 알제리. 타가스테(Thagaste)라고 하는 지금은 알제리에 속한 그 땅에 괜찮은 공무원 집안에 태어났는데 이 알제리 출신이었던 이 어거스틴이 십대에 카르다고라고 하는 큰 도시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카르타고에서 조기 유학을 하고,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밀라노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카르다고에서 밀라노로 가면서 조기 유학을 하면서 사상적으로 많은 방황을 하고, 윤리적으로 방탕한 삶을 삽니다. 그런데 굉장히 윤리적으로 방탕한 삶을, 아주 악해서 방탕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조기 유학을 간 그 당시 청소년들이 흔히 살듯이 보통 청소년처럼 살았습니다. 더 악한 청소년, 더 방탕한 청소년으로 산 것이 아니라 당시 조기 유학 간 청소년들이 살았던 그 모습을 어거스틴도 따라 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미혼모 다시 말해서 신원불상의 여자랑 동거하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여러분, 이렇게 천재이었던 이 어거스틴이 부모님의 품을 떠나서 조기 유학을 하다가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연상의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문제는 이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를 낳고 나서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자기의 방탕한 삶에 대해 죄책감을 덜어주는 교리가 마니교입니다.
마니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네 영혼은 아주 순결한데 네 몸은 방탕할 수 있다. 그런데 방탕한 네 몸이 하는 행동은 네 영혼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네가 죽으면은 이 방탕한 몸을 벗고 네 순결한 영혼이 신에게 올라가는 것이다’ 뭐 요런 비슷한, 그러니까 육체가 한 행동을 내 영혼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이런 죄책감을 완화시키는 그런 교리가 마니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볼 때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지만 그 당시로 로마에 조기 유학하는 청소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그런 나락에 빠져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풋풋한 청년기의 그런 윤리적 일탈을 즐겼지요. 그런데 플라톤의 철학을 공부하다가 마니교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친구를 통하여 기독교를 전도를 받습니다. 단짝 친구를 통해서. 자, 여기서부터 어거스틴이 서서히, 서서히 바뀌어 가는데 문제는 이 어거스틴을 위해서 어머니 모니카가 29년 동안이나 기도를 했습니다. 29년.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방탕 기질을 좀 알았던 것 같습니다. 기질적으로. 얘가 조기 유학 가서 청소년기에 기숙사 생활하다가 나쁜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29년간 기도했는데 29세 때 기독교에 입문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입문하고 아들, 자기가 사생아로 낳은 아들도 데리고 책임을 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은 자기의 과거를 송두리째 증언하는 부인할 수 없는 그런 과거입니다. 아들은. 그런데 이 어거스틴이 아들을 정성껏 돌보면서 아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고 이제 자기 생애를 서서히 하나님 쪽으로 틀고 있습니다. 그런데 틀고 있으면서 이제는 기독교인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옛날에 방탕하게 살던 죄가 너무나 많이 괴롭힙니다. 분명히 기독교인이 되었는데도 방탕한 삶이 또 다시 어거스틴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엎치락뒤치락을 계속 합니다. 그러다가 밀라노 정원에서 어린아이들이 옛날에 자기가 놀았던 노래처럼 ‘집어서 읽어라. 톨레 레게, 톨레 레게’ 이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는 그런 말이 노랫가락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그 ‘톨레 레게’를 자기가 성경책을 집어서 읽으라고 하는 그런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집어서 읽었는데 그때 펼쳐진 본문이 로마서 13장 11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펴놨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폈는지, 그런데 어쨌든 간에 이것을 읽었더니 갑자기 자기 전존재를 하나님이 완전히 보고 있는 것 같은, 하나님의 신적인 눈이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덮쳤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임재가, 현존이 자기 인생을 감금하고 이제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포획한 것을 알았습니다. 신적 포획을 경험했습니다. 신적 포획을. 그래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됐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됐다’는 이 평범한 말이 어거스틴 인생 전체를 향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최후통첩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됐다’는 말을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 이제 응답하여야 되고, 불가역적 응답, 불가역적으로 돌이켜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예수 믿고도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 믿고도 과거의 죄를 완전히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 죄책감이 어거스틴의 고백록 1장부터 7장까지 나옵니다. 야~ 그래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이 말이 굉장히 그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다음에 내가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짓고 구원을 받았는데 또 죄 가운데 빠져 사는 내 처지, 이 처량한 내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서 한탄하는 그때,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이 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구원은 받은 구원이면서 받아야 할 구원입니다. 기독교인의 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이었고 받을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 받았다는 말도 맞지만 구원 받지 못하고 구원 받을 것이다’라는 말도 맞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의 실체가 이제는 손에 잡힌다, ‘이제 손에 잡힌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참 논리적으로 좋습니다. 밤은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내 인생의 타락의 밤은 깊고, 내 인생 방탕의 밤은 깊고, 내 인생이 이렇게 윤리적으로 망가진 채 허우적거리던 시간의 시절은 지났고 이제 나에게도 아무 공로 없이 밤이 지나고 낮이 오듯이 내 생체리듬에도 이제 아무 공로 없는 이 타락한 너덜너덜한 욕망에 사로잡힌 내 몸도 이제 낮의 시간 속에 지배를 받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페라의 유령에 보면은 그 The Music of the Night라는 그런 노래가 있죠? 그 남자 배우하고 그 여자 배우가 나중에 듀엣으로 부르는 노래인데 The Music of the Night라는 그 노래 가사를 한 번 보세요. 밤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욕망을 스멀스멀 기어 나오게 하는지, 이 밤이라는 게 참 특이합니다. 밤은 첫째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밤은 낮의 모든 고단함을 덮어쓰기 위해서 새 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밤이 좋은 것은 갱신입니다. 갱신. 그런데 이 밤이 낮의 질서에서 행하지 못했던 억압된 욕망을 프로이드식으로 말해서 방출하는 밤이기도 합니다. 이게 참 슬픕니다. 그 오페라의 유령이 밤에 항상 크리스티나를 납치해가지고 이렇게 음악을 가르치잖아요. 오페라의 유령에 그 스토리를 보면은요. 그런데 그 The Music of the Night라는 그 노래 가사가 ‘와~ 인간에게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이렇게 문학적으로 정확하게 통찰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한 번 들어보세요. 굉장히, 광장히 좋습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저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악마성이 발동되는 인간 안에 악마성이 억제되었다가 낮의 질서, 빛의 질서에는 억제되었다가 상대적으로 어두우면은 진짜 내 정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진짜 내 욕망의 정체, 낮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것이 문명의 질서 안에서는 억제되었던 그 욕망이 밤에는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정신적 밤에 죄를 짓습니다. 왜? 자기 검열이, 타인의 검열이 망가져 있을 때 그때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검열이 낮에도 강하고, 밤에도 강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다. 자기 검열이 매우 강한 사람은 낮의 검열이 밤까지 효력을 미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유혹을 안 받는데 유혹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 검열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밤의 시간은 느슨해지고 감금되었던 나의 자아가, 나의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그냥 숨어있는 내 자아가 막 발동을 합니다. 그래서 이 밤이, 밤이 깊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욕망이 마음대로 나를 장악하던 그 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내 몸 안에는, 내 정신 안에는 자전의 원리처럼 낮의 질서에 속하고자 하는 내 욕망이 이제 다시 살아난다 이런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은 죄의 질서에만 속하지 않고 죄 아닌 질서로 속하고자 하는 또 자전, 자기 반전적인 그런 각성이 온단 말이죠. 돌아온 탕자가 그랬듯이요. 저는 인간에게 그게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정신과 육체 안에 어떤 욕망을 실컷 충족시키면 그 욕망이 충족된 욕망의 마지막에는 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 반전적, 저는 그런 전향의 어떤 그런 지향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낮이 가까웠다는 말은 이제 밤의 시대, 욕망이 방출되는 시대가 끝나고 욕망이 억제되는 시대가 왔으니 그러므로 이때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제 우리의 너덜너덜한 욕망, 더러운 욕망에게 지배당했던 내 몸과 정신, 만신창이가 된 내 몸과 정신을 그리스도가 벌거벗은 내 몸을 입혀줍니다. 이때 벌거벗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내 욕망대로 살았기 때문에 이때 아담의 원죄를 생각납니다. 죄를 짓고 무화과나무로 자기 몸을 가렸지만 벌거벗게 드러났던 그 몸을 그리스도가 옷으로,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3장 21절을 생각합니다. 짐승의 가죽 옷으로 그 어두운 무화과나무 그늘 뒤에 숨었던 몸을 가리워줬습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게 다가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심판하려고 하지 않고 감춰주려고 하십니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여 하나님도 민망하고 우리도 민망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민망해서 숨는 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피하여 숨는 이 마음을 아시고 짐승의 옷으로 우리의 치부를 가려주셨듯이 우리의 너덜너덜해지고 만신창이가 된 이 죄악된 모습, 귀한 것도 남아 있지 않고, 고귀한 것도 남아 있지 않고, 내가 봐도 내가 싫고, 내 아내가 봐도 내가 싫고, 내 자녀가 봐도 내가 싫고 다 자기 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런 일그러진 내 모습을 그리스도가 와락 덮쳐서 우리 죄를 가려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다 감싸주시는 것, 이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누가? 아우구스티누스가요. 너무 감동적이에요. 그 8장 9장, 10장, 특히 8장 9장이 너무 감동적이에요. 너무 감동적이에요. 왜냐 하면은 지금 제가 말한 이것은 어거스틴이 말한 것을 십 분의 일도 옮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시간 있을 때. 모든 회심과 개종의 기록에는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자기 다짐을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이때의 낮은 뭡니까? 자기 검열하는 정죄하는 눈빛 때문에 방탕을 멈추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덮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방탕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디오니소스적인 방탕, 바카스 축제에 들어가서 가면을 쓰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그런 방탕은 이제 그리스도가 나를 멈추어 주게 했습니다. 그래서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가능하기 때문에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정욕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대회심, 영적 대각성이라고 그러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죄 가운데 머무르는 것을 더 좋아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완전히 가려주시고 너덜너덜해지고 마모되고 망가진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가 아무 죄를 묻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손이, 그 옆구리에 뚫린 허리가 우리의 허리를 감싸고, 우리 온몸을 덮어주실 때 그 감격이 남은 일생 동안 여러분을 지배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 그러면은 질문이 있습니다. 너무 거룩하게 살면 인생이 재미가 없지 않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너무 거룩하게 살면은 진짜 인생이 세상 기준으로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너무 거룩하게 살면은 세상 낙은 없어지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들과의 영적 교제라고 하는 너무너무 즐거운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덜너덜해지고 온갖 것으로 망가져서 하나님 형상이 도말되어 버린 저를 죄의 참혹한 저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영접하시고, 환대하시고, 죄를 가려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남은 생애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일주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3:11-16(주일 1부예배설교) (0) | 2022.01.30 |
---|---|
본문: 로마서 14:1-12 (0) | 2022.01.30 |
본문: 로마서 13:8-10 (0) | 2022.01.30 |
본문: 로마서 13:1-7 (0) | 2022.01.30 |
본문: 로마서 12:14-21 (0) | 2022.0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