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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2:1-2

by 【고동엽】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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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2:1-2

제목: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이 짧은 구절 안에 너무나 깊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마음이라는 말 때문에요. 마음. 이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글을 쓰실 때 하나님의 알파벳이 새겨지는 칠판과 같습니다. 칠판. 그러니까 마음에, 마음에 빛이 떠오르고, 마음에 말씀이 떠오르고, 마음에 결심이 떠오르고, 마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이 마음으로 떠오릅니다. 마음으로. 그래서 마음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말 중에서 몸과 영적 예배의 차이입니다. 몸을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면 예배가 몸을 드리는 거잖아요. 지금 우리는 몸이 오지 않거든요. 지금 여러분들 대부분이 얼굴도 지금 안 비치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면을 쓰고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몸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러 가는 거거든요. 몸. 몸이란 말은 뭐죠? 우리 전체의 아무 가식도 없고 가리지 않고 우리 자아 전체를, 우리 자아 전체를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전체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거거든요. 이것이 영적 예배,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라는 거예요.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예배는 몸을 가지고 오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인터넷으로 드리는 이 예배가 불충분 예배가 되고, 진정한 예배가 아닌 이유는 우리가 우리 존재의 아주 작은 부분만 지금 가지고 오는 거거든요. 그렇죠? 목소리를 가져오기도 하고, 얼굴을 가져오기도 하고 그러나 대부분은 지금 우리 자아의 대부분을 숨기고 있죠? 지금 현재는 그렇죠? 이 영상 밖이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은 강의 듣는 것이지 예배는 아닙니다. 새벽 기도 시간이지만 예배는 아닙니다. 예배는 몸을 가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내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가져가서 봉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는 봉헌에 있지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봉헌입니다. 봉헌. 바침에 있어요. 그러니까 예배는 오늘 은혜 받으러, 설교 듣고 기분 좋으라고 가는 게 아닙니다. 예배는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감사를 표현하러, 헌금하러 몸으로 헌금하는 거예요. 몸 자체가 헌금이거든요. 내 헌금보다 하나님은 내 몸을 더 좋아하세요.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내가 바치는 내 돈보다 훨씬 좋아하세요.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것은 내 몸입니다. 내가 바치는 헌금도 아니고 나의 재능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몸을 드리라고 그랬어요. 몸. 어떻게? 몸을 산 제사로, 이 산 제사라는 말은 뭐죠? 죽은 제사가 아니라 그동안 구약의 모든 제사는 죽은 제물이었잖아요. 죽은 제물. 번제물도 죽였고요, 화제물도 죽였죠. 속죄물 그런데 이번에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한테 가르쳐준 예배는 내 몸을 살아있는 채로, 욕망을 가진 채로, 의지를 가진 채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가진 채로 내 전체가 몸으로 하나님께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일조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몸 봉헌입니다. 몸 봉헌! 사실 그래서 교회에 몸이 온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겁니다. 이게.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몸으로 참석하나, 온라인으로 참석하나, 전화로 참석하나, 차이를 별로 알지 못할 만큼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 되었거나 껍데기만 남아서 그런 거거든요. 원래.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껍데기로 남았기 때문에 몸으로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을 별로 모르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원래 예배는 설교 듣고 기분 좋으라고 가는 것도 아니고, 성도의 교제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내가 일주일 동안 살아온 내 삶을 그대로 봉헌하러 가는 겁니다. 이 몸 봉헌 예배가 ‘로기코스 라트레이 – 논리적인 예배다’, ‘로기코스’, 이 영적 예배라고 번역된 것, 난해주를 잘 보면은 뭐라고 돼 있습니까? ‘합당한’ 이렇게 난해주가 되어 있죠? 그렇죠? 이거 헬라어로 ‘로기코스’입니다. ‘로기코스’. ‘로기코스’가 뭐냐 하면은 logical, 논리적인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치에 맞는 예배를, 몸을 봉헌하는 예배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주일 날 한 번 예배당에 오는 예배가 몸 예배가 아닌 걸 알 수 있죠? 목사님들은 주일 날 자꾸 오는 것을 강조하지만 물론 그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몸으로 하는 모든 활동이 하나님이 기쁘심 직한 예배가 되라니까 그것이 무제한적인 요구입니다. 무제한적 요구. 우리 몸이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acceptable 하고 받아드려짐직한 예물이라는 거죠. 이것이 참…….그래서 신약성경은 무슨 율법을 분절해서 “이것 지켜라! 저것 지켜라!” 그렇지 않고 한 마디로 무제한적인 몸 봉헌을 명령하기 때문에 이 몸 봉헌 안에는 구약의 모든 율법 계명이 다 들어가 버리는 거죠.

 

그럼 어떻게 이런 예배를 드리나? 이런 신약적 예배를 드릴 수 있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예, 맞습니다. 사실상 몸을 봉헌하는 이 예배는 제가 볼 때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신약 성경을 이 썼던 이 시대는 몸을 봉헌하는 예배를 가능케 했던 소수의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사람은 50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런 로마서를 통해서 자기 심정을 호소하는 이럴 때는 대중을 상대로 하지 못했고, 50명, 진짜 몸을 봉헌하러 온 해방 노예들, 난민들, 예배당에서 몸을 통째로 가지고 와서 몇 시간씩 있어도 지루하지 않게 느끼는 소수의 무리들에게 이것을 쓴 거예요. 그러서 사실상 몸 봉헌이 너무 급진적이에요. 우리한테 지금. 우리는 이 급진적 요구를 듣고 아스라이 탄식을 합니다. 왜냐 하면은 오늘 날 누가 이 몸 봉헌의 제사를 드릴 수 있나! 그런데 오늘 내가 직장에 가서 이것이 가능합니다. 왜 가능하냐 하면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와 음행과 짐승의 목매어 죽인 것 이런 결정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정결함을 오염시키지 않는 모든 활동을 성경은 용납하고 있습니다. 10장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활동, 사회적 친교를 나누는 활동, 이것을 죄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몸 봉헌이 불가능한 것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몸 봉헌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몸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감격에 처하기 때문에 자기 생활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 보다는 훨씬 제한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회적 오지랖도 제한되고 내가 원하는 것도 충분히 하지 못합니다. 저는 옛날에 하나님을 믿기 전에 바둑을 오랫동안 두었습니다. 몇 시간씩 바둑을 두어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제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전도자의 길을 살면서 제가 바둑을 오랫동안 두는 제 모습에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너무 재미있긴 하지만 내가 이런 오락, 어떤 사람들은 뭐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오락입니다. 기보를 보고 바둑을 두는 것이 즐거워서 한 것입니다. 친구들이랑. 친구는 사귈 수 있죠. 기원에 가면 또 바둑 좋아하는 친구들과 아주 절친이 될 수 있죠. 그러나 제 몸을 봉헌해야 한다는 이것 때문에 저는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지금 남들에게 지탄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제 몸을 원하기 때문에 제 몸을 하나님은 acceptable한, 열납할 만한 예물 되기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가 못 하는 게 있습니다. 제가 몰래 부동산 투기를 못하고, 제가 몰래 재테크를 못합니다. 제가 몰래몰래 우리 성도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주식을 사서 투자해서 “아~2년 동안 주식을 해서 저는 3억을 벌었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저는 못합니다. 왜냐면 목사인 제가 만일 그렇게 했다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실족하겠습니까? 저는 3억을 벌 수 있지만 대다수가 실족하겠죠? 그러니까 못 하는 게 있습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하지 못하는, 하나님이 겁주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하심으로 저를 감동시키기 때문에 내가 자원하여 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내 몸은 성별됩니다. 이렇게 성별된 몸으로 살아라 라는 거예요. 로마서 6장으로 말하면 의의 병기로 드림, 순종의 종으로 내 몸을 드림, 이것이 바로 산 제물로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산 제물로 몸을 드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절 일이 일어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 나오냐 하냐면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몸을 봉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계시가 됩니다. 이것이 아주 인과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알려주면 기쁘게 순종할 사람에게 기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계시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 소통에 들어가려면 하나님께 심화되고 지속적인 순종을 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영적 소통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몸을 봉헌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몸을 봉헌하여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일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분별되고, 알려지고, 계시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들으면 ‘와~ 로마서 12장 1절부터 2절처럼 살면 숨이 막히겠다. 완전히 종교적으로 내가 완전히 감금된 생활 아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감금되는 것보다 세속의 뜻에 감금되는 것을 훨씬 여러분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지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으면은 대신 누가 우리를 지배하냐 하면은 온갖 나쁜 것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내가 추구할 primary goal 가장 으뜸 사명이 되고, 으뜸 과업이 되면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아닌 것들은 내 삶에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세상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진정한 세속적인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세속적 삶의 특징, 세상에 나가서 아무리 살아도 오염되지 않고, 세상을 은근히 감화, 감동 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속에서 고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시고 기쁜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삼투압 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나쁜 영향력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는 이 세계에 입문하게 되면은 참으로 세속적인 사람이 참으로 거룩한 사람, 이것을 secular-saint란 말을 씁니다. 이것을 프란시스 쉐퍼란 사람이 한 말입니다. secular-saint! 진짜 세속적이면서도 동시에 saint(성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프란시스 쉐퍼라는 복음주의 변증가가 한 말이죠. 저는 여러분들이 이 세계에 입문하기를 바랍니다. 진짜 세속적이면서 세속의 영향력을 일방적으로 흡수하고 영향 받는 역삼투압을 당하지 마시고 세상을 거룩하게 삼투압 시켜서 변화시키는 참으로 몸 봉헌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재미있나요?’ 엄청 재미있습니다. ‘어떤 재미가 있습니까?’ 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과 고도의 네트워킹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요구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사람들이 계속 연락이 오고 제가 만나는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성도들과의 교제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호받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이 교회에 열심히 참여해도 몸 봉헌의 공동체에 참여해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분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만 충성하고 세속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을지로와 충무로와 여의도와 테헤란로에서도 우리 몸을 몸 봉헌하는 산 제사로 드립니다. 그래서 6일 동안 몸을 드리고 6일 동안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봉헌하는 것을 같다가 이치에 합당한 예배, 논리적인 예배 ‘로기코스 라트레이’라는 헬라어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 오늘도 ‘아~바울처럼 살면은 너무 숨이 막히지 않을까?’ 절대로 숨이 안 막힙니다! 여러분. 진짜 즐겁습니다. ‘하하하 아이~ 목사님 살살 꼬이려고 우리를’ 그렇지 않습니다. 꼬이려는 것이 아니라 활기차고, 능력이 있고, 진정 세속적이면서 진짜 거룩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몸으로 봉헌하는 제사입니다. 이런 몸 봉헌을 했던 성도들이 주일 날 또 집단적으로 몸 봉헌하는 것이 주일 예배입니다. 주일 예배는 6일 내내 몸을 봉헌했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영적 에너지가 엄청나게, 영적 용량이 큰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발동, 거룩한 발전기가 됩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를 때 눈물을 안고, 사연을 안고 부르기 때문에 그런 성도들 무리에서 찬송을 하면은 갑자기 찬송이 잘 되고, 그런 성도의 공기도를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 내가 더 이 거룩한 동아리에 속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여러분 모두 오늘도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 세속적이면서 진정 합당한, 이치에 합당한 예배드리는 6일 성도, 몸 봉헌 성도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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