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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1:13-24
제목: 이스라엘의 실족자리=이방인의 영접자리
이 말씀이 굉장히 은혜롭죠? 왜 은혜롭냐 하면 이스라엘이 넘어진 그 자리가 이스라엘이 가지가 꺾여서 빈자리가 된 그 자리가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자리가 되었다는 거죠. 이방인들을 영접하는 자리가 되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무너진 그 자리가 이방인이 영접되어 하나님께 접붙이는 기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쓰러진 그 자리가 내 친구가 회복되는 자리가 되었다’ 뭐 이런 논리인데 굉장히, 내일 논리가 더 이제 절정으로 아주 감동적입니다. 내일 논리가요. 오늘 논리는 이방인들이 만일에 돌감람나무인 자기들이 원래 속했던 종교 공동체, 민족 공동체, 문화 공동체, 언어 공동체 그 공동체로부터 잘려 나와서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에 접목이 된 거죠. 그러니까 초대 교인들도 원래 그들이 속했던 1차 집단에게서는 잘려나간 것들이죠. 그래서 그리스-로마제국은 종교가 삶을 지배하는 촘촘한 종교 지배의 사회이었는데 그들이 주 예수를 영접하면서 그들을 촘촘하게 둘러쌓고 지탱했던 종교 생활 공동체의 지지를 다 포기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종교 생활 공동체의 지지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도 원 돌감람나무로 부터는 잘려나간 거죠. 이스라엘은 원래 참감람나무에서 잘려나가서 이제 하나님의 언약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전 세계 만민 가운데 표류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이스라엘의 넘어진 그 자리는 이방인이 쇄도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 같은 신분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 돌감람나무 즉 내가 속했던 우상 숭배 집단, 1차 집단, 그 집단으로부터 접목되어서 내가 참감람나무에 접목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이 넘어져서 하나님 언약 공동체로부터 이탈되는 그 역사를 보면서 크게 두려움을 가지고 경계를 받으라는 거죠. 우리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1884년 이후로 1907년 평양대부흥을 통하여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서 대부흥을 통하여 이렇게 많은 신자를 나게 했지만 한국이 아시아의 유럽 기독교 문명과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지금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독특하냐 하면은 유럽 사람들이 볼 때 아시아 선교가 대성공을 거뒀다고 말하면 한국을 보는 거거든요. 왜 한국을 보냐 하면은 한국은 유럽선교사 호주, 영국, 스코트랜드, 미국, 캐나다 이 5개 정도의 나라가 우리나라를 전도했다 말이죠. 그런데 이 전도한 나라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려가지고 자생적인 기독교 국가가 되어서 오히려 대단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하는 나라가 됐다는 말이죠. 지금 현재. 그러니까 그것이 너무 놀라운 것은 1910년에 우리 한국이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에 참여합니다. 그때 윤치오가 참여합니다. 윤치오, 1910년에. 그러니까 1884년에 선교사에게 기독교 복음을 제대로 전수 받고 1910년에 30년이 안 되어가지고 세계 선교대회에 아시아 개종자 대표로 한국 사람이 갑니다. 그런데 이제 한 130년 정도 된 기독교 국가 이 아시아 국가였던 전통적인 우상숭배 집단이었던 한국이 이렇게 전 세계 기독교 문명권 국가가 볼 때 대단한 나라가 된 거죠. 그래서 해외에 가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서구 기독교 유산을 이해할 수 있는 비서구인 나라는 지적으로는 한국밖에 없다. 지적으로는! 왜냐 하면은 서구 기독교 지적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인을 가진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말은, 그 말은 우리가 지금 어쨌거나, 저쨌거나 서구 기독교 유산을 이어 받아 상속 받아 전 세계에 다시 전파해야 될 선교적 사명이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참감람나무에 접목되었던 이스라엘도 이렇게 쉽게 꺾여서 자기가 누렸던 하나님 언약 백성의 지위를 잃는 것이 쉽다면은 원 돌감람나무에서 접목 당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이방인 너희들은 얼마나 쉽게 잘려나가겠는가! 이스라엘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두려워하라고. 이것이 아주 참 놀라운 경고입니다. 돌감람나무에서 접붙인 우리가 하나님. 아브라함의 언약 공동체에서 접목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이 접목은 언제든지 이 언약적 결속감을 잃을 수 있다는 가능이 있다는 것! 이것 너무 무서운 거죠. 그러니까. 참감람나무에 접목된 하나님의 본 백성 이스라엘도 언약 백성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세계 만민 가운데 표류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데 원래 돌감람나무에 속했던 우리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결속감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적 백성의 신분을 잃게 되는 것이 얼마나 쉽게 되겠냐고 경고를 하는 거죠. 우리한테 지금! 그래서 우리는 이 유대인들을, 유대인들 신자들을 비난하거나 멸시하거나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또한 언제든지 하나님의 참감람나무 백성의 신분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 오늘 한 가지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이겁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이 자리가 세상과 하나님, 이방인과 하나님이 화목하는 기회가 되었다. 야~ 이것은 기가 막히죠! 이스라엘이 독점했던 그 자리에, 이스라엘의 그 독점적 위치를 잃고, 그 빈자리가 되니까 그 빈자리에 이방인들이 와서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빠져있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고 성령으로 입양되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백성이 되어서 화목이 일어났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 중요합니다. 최은혜 교우님, 한 번만 읽어 주십시오. 11장 12절요.
그들이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야~그들의 넘어짐이 이방인과 화목하게 되는 축제가 되었다면 만일에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일이 있으면 얼마나 더 큰 평화가 창조 되겠냐고요! 바울은 그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본 백성이 떼 지어서 예수를 영접하여 예수님께 돌아오는 날을 기다립니다. 여러분 지금 구글 들어가서 메시아닉 주, 메시아닉 주라는 말을 치고 Hymns of Messianic Jewis 메시아닉 주가 부르는 찬양들이라는 검색어를 치면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집회가 여러 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인데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막 나타나는데 그들을 메시아닉 주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소수 유대인들, 예수님을 영접하여 부르는 이 소수 유대인들이 부르는 찬양을 보면은 우리 보통 복음성가보다 훨씬 더 뭐랄까요? 영적으로 감화력이 있다 그럴까요? 그런 느낌이 듭니다. 한 번 보세요. 히브리어로 부르는 찬양이 아주 좋습니다. 자 마무리 하자면은 이방인 신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뿌리가 아니라 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본 백성, 이 신앙 공동체인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합니다.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분들을 지탱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교만하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처음 곡식 가루,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거룩한 처음 곡식 가루인 것을 알고 여러분들은 그 거룩한 곡식 가루로 만든 떡인 것, 거룩한 곡식 가루의 산물인 것을 기억하시고 겸손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랑하지 말아야 되며 이방인들 신자들이 넘어지는 이스라엘을 멸시하지 말아야 되고, 그들을 조롱하지 말아야 되고, 그들을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22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데 머물지 아니하면은 여러분들의 접붙임된 이 연결과 결속도 와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떼 지어 하나님께 돌아오고 예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돌감람나무에 있던 가지도 접목이 되었는데 원래 자기가 붙어있던 그 가지에 다시 접목되는 것, 재접목 되는 것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1945년, 1950년대, 1960년대부터 유대인들이 성서학회, 기독교인들의 성서학회에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합니다. 지금은요. 지금은 특히 구약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굉장히 깊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에드워드 샌더스라는 사람이 영국 학자인데 유대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랍비문헌을 연구하고 쓴 책이 “Jesus & Judaism”이라는 책입니다. 예수님과 유대교, 그 다음 “Paul & Judaism” 바울과 유대교, 이 두 책을 썼는데, 이 두 책이 결정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냐 하면은 바울과 예수님을 유대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인데 엄청난 호응을 일으켰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결정적 가교를 냈습니다. 지금 이 신학, 성서신학 학계에서는 이 두 책이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요즘 여러분 혹시 니콜라스 톰 라이트라는 말 들어봤나요? 요새 니콜라스 톰 라이트 대세이거든요. 이분이 쓴 책이 온통 성서신학계를 지배하는데 이 책이 바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동시에 감동시키는 예수님을 주라고 영접하는 것을 도와주는 책입니다. 좋은 의미로. 그래서 지금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점점 주 예수라는 말로 불리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상했던 바이고, 바울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까지 하면서 부탁했던 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의 기도가 2000년 동안 아직까지 완전히 응답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의식하고 내 생명,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내더라도 내 동족을 반드시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바울의 기도를 우리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고 2000년 만에 이제 서서히 유대인들의 마음을, 원 참돌감람나무에 붙어 있었다가 잠시 2000년 동안 표류했던 하나님의 친 백성, 아브라함의 언약 백성을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되돌리는 이런 선교학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여러분이 아시면 됩니다.
마무리합니다. 때때로 내가 넘어지고, 내가 실족하는 그 자리는 내 친구에게 행운이 되고, 내 친구에게는 복이 된다는 슬픈 진리가 현실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쓰러지고 내가 넘어진 그 자리에 나는 불행할지라도 내가 쓰러진 그 자리에 오랫동안 표류하고, 오랫동안 황량한 영적 황량함을 견디던 다른 사람이 은혜받는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해야 되겠죠! 그러나 우리는 원 돌감람나무에서 접목된 감람나무 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접목된 이 신분을 항상 귀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의 몸에 붙어 있기로 매일 결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매일 붙어 있기로 결단하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적인 그 몸 안에, 예수님의 몸 된 교회 안에 신실하게 붙어있으면은 형통한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몸 된 교회 그 교회가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면 그 몸 된 교회에 붙어서 주님의 일을 행하고, 주님의 친 백성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이 일이 여러분의 삶을 놀랍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것이 뭘까요? 예수님의 영이 지배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거죠! 예수님의 영이 지배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생장시키고 양육하고 마침내 큰 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 예수님 때문에 늘 즐거운 사람, 예수님 때문에 슬픔도 이겨가면서, 고통도 이겨가면서 순례의 길을 행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저희들, 날마다 행복합니다. 날마다 기쁩니다. 그러나 날마다 슬픈 일도 닥치고 닥칩니다. 날마다 괴롭고 쓰라림도 닥칩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이 슬픔과 고통을 견뎌 이겨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슬픔과 고통 몸서리치게 다가올 때마다 가향교회 성도들 이 고통 이길 수 있도록 예수 이름 권세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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