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은 주의 제자들이 행한 놀라운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그다음 21개의 서신서입니다. 그 중에 바울이 쓴 것을 바울 서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쓴 편지는 대다수 특정한 교회와 개인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그런데 공동 서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동 서신의 대표적인 것이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이것이 공동 서신인데 공동 서신은 누가 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누가 읽어도 상관 없는 수신자가 보편적일 때 이것을 우리는 공동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요한이 보낸 편지를 요한 서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총 21권의 서신서가 있는데 서신서는 서신서답게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서신서답게 읽는다는 것은 뭐죠? 여러분 집에 편지가 왔다고 할 때 편지를 읽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어떤거죠?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는 겁니다. 아무리 길다고 해도 편지는 끊어 읽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집의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서 보는데 편지의 분량이 A4 5장이다고 해서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 있습니까? “아, 편지가 너무 길다, 하루에 한 장씩 5일 동안 읽어야지.” 이런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야 발신자가 이 편지를 보낸 의도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 공동 서신, 요한 서신을 읽으실 때 서신을 읽는 방식으로 그 서신서를 읽으셔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그래서 예를 들어 로마서가 16장까지 있잖아요. 로마서를 하루에 한 장씩 16일 동안 끊어 읽으시면 안 됩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을 확보하시고 1장부터 16장까지를 쭉 읽으셔야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바울이 의도했던 바,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포착할 수 있습니다. 서신은 서신처럼 읽어야 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배치된 것이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입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구약에서 봤던 예언서와 3가지 정도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언서는 청중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심판을 경고하는 그 순간에도 심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묵시라고 하는 것은 청중의 반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것들이 다 결정된 겁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청중의 반응이 중요하다면 묵시라고 하는 것은 결정된 겁니다. 그다음에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했을 때 이 땅에 잘못된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를 변화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정치가 있는데 지금의 정치가들이 그런 아름다운 정치를 시행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십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잘못된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예언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묵시는 뭐냐면 잘못된 것 하나, 둘 고쳐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의 하늘과 지금의 땅 지금의 세계 전체가 교체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비유할 수 있냐면, 집에 있는 청소기에 어떤 부품이 고장났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때 부품을 교체해서 청소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이것이 예언입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부품 몇 개 고쳐서 될 문제가 아닌 겁니다. 아예 청소기 자체를 완전히 교체하는 것이 묵시입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부분적인 교정에 목적이 있다면 묵시라고 하는 것은 전면적인 교체에 목적이 있습니다. 세 번째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예언자를 통해 주로 선포됩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천사와 같은 천상적인 존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이처럼 예언과 묵시에는 크게 3가지 정도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이 아니라 묵시에 해당된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복음서를 살펴볼텐데 복음서도 그렇고 사도행전도 그렇고 서신서도 그렇고 요한계시록도 그렇고 21세기 기록된 문서가 아닙니다. AD 1세기 또는 2세기에 기록된 문서입니다. 우리와는 약 2천년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된 시점을 고대 사회라고 한다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금을 현대 사회라 할 수 있는데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는 의미를 중시하는 사회였습니다. 현대 사회는 사실을 중시합니다. 의미를 중시하던 고대 사회와 사실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차이를 기억하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복음서를 읽으실 때 예수님이 거라사라는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만났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은 한 사람일까요? 두 사람일까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나귀를 타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이 타시며 끌고 가셨던 나귀는 한 마리일까요? 두 마리일까요?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동굴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그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은 그 무덤에 안 계셨습니다. 여인들은 그 무덤에서 예수님은 만나지 못하고 다른 존재를 만납니다. 그때 만났던 존재가 천사인가요? 청년인가요? 한 명인가요? 두 명인가요? 복음서를 자세히 보시게 되면 어떤 복음서는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서 만났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한 명이라고 말하고 어떤 복음서는 두 명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두 명이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한 명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이 끌고 가셨던 나귀를 두 마리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한 마리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다 다른 것은 빈 무덤에서 여인들이 만났던 존재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다 다릅니다. 사실을 중시하는 현대인이 볼 때는 이 다른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팩트를 중시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세계관입니다. 그전에 사람들은 팩트, 사실보다도 뭘 중시했냐면 의미를 중시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한 마리가 되었건 두 마리가 되었건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전쟁을 상징하는 것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말을 타지 않았습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탔습니다. 이것이 강조점입니다. 그다음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예수를 거기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이처럼 고대 사회는 의미를 중시했고 현대 사회는 사실을 중시했습니다.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실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다 보면 우리는 계속 어떤 질문이 생기냐면 복음서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한 기술이 조금씩 다르니까 도대체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한 명이야 두명이야, 여인들이 만났던 존재가 천사야 청년이야, 한 명이야 두 명이야, 나귀가 한 마리야 두 마리야,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해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그 상이한 기술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가, 이것을 인위적으로 편집하고 수정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옛날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 문제가 안 되었냐?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만 하더라도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했던 겁니다. 만약 21세기에 복음서가 기록되어 졌다면 아마 철저하게 사실 중심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남겼을 겁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이유가 뭐냐면 고대 사회는 사실 중시보다는 의미 중시적인 세계관이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옛날에 쓰여진 복음서와 역사서를 우리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도리어 고대 사회 관점에서 고대 사회 기술되어진 복음서나 역사서나 서신서나 묵시록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 27권이 왜 정경으로 확정된 거냐면 AD 2세기 초반에 초대 교회를 굉장히 어지럽혔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면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선박업을 했던, 오늘날로 얘기하자면 나름대로 큰 기업을 일군 회장님 평신도 지도자입니다. 이 평신도 지도자였던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이런 식의 주장을 한 겁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하나님과 예수가 아버지라고 말했던 하나님은 다른 분이다, 이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철저하게 반유대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반유대주의자였던 마르시온은 유대인들이 주인공이었던 구약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약의 하나님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있는 예수가 아버지라 부른 그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당신의 백성 삼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은 쉽게 얘기하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겁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인을 편드는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세계 만민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이런 식으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철저하게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르시온은 뭐라 주장했냐면 2세기 초반에 초대 교회가 존경했던 사도 가운데 가장 친 이방적인 사도가 누구죠? 바울입니다. 그다음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개 복음서 가운데 가장 이방인을 위한 복음이 뭐죠? 누가복음입니다. 반유대주의자였던 마르시온은 누가복음과 10권의 바울 서신만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다수 초대 교회는 구약에 있는 말씀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읽은 겁니다. 그런데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2세기 초반에 선제 공격을 가한 겁니다. 이제 우리가 정말 받아들여야 될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10권의 바울 서신이라고 마르시온이 선제 공격을 한 겁니다. 여기에 대한 반박으로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초대교회는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을 최종적으로 AD 397년에 정경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27권이 오늘의 신약 정경으로 확정이 된 겁니다.
오늘 나누었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신약은 27권의 정경이 있습니다. 4권의 복음서, 1권의 역사서, 21권의 서신서, 신약 성경 4분의 3이 편지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별명이 편지의 글입니다. 그리고 1권의 묵시록입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순서는 쓰여진 시점에 따라 배치된 것이 아니라 70인경의 장르 배치 순서를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래서 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의 장르 배치 순서를 그대로 따라서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묵시록의 순서로 배치했습니다. 복음서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공관 복음이 있고 요한복음이 있습니다.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그다음에 서신은 바울 서신과 공동 서신 또는 바울 서신, 공동 서신, 요한 서신으로 나뉘는데 바울 서신, 요한 서신이라는 말은 누가 썼느냐, 발신자를 중심으로 한 구분이고 공동 서신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썼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받는 대상이 보편적일 때, 하나님의 백성 누구나 읽어도 상관 없는 그런 편지를 공동 서신이라고 합니다.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은 예언서와 3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언은 청중의 반응이 중요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교정과 전환을 촉구합니다. 인간 예언자를 통해 전달됩니다. 묵시는 결정된 겁니다. 부분적인 교체가 아니라 전면적인 교체를 강조하는 것이고 천사와 같은 천상적인 존재에 의해서 중보되어 집니다. 그다음에 신약 성경이 확정된 중요한 계기는 2세기 초반에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의 주장 때문입니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별하였고 우리가 진짜 믿어야 될 하나님은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10권이 말하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면서 반유대주의 입장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반박으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면서 초대 교회가 정경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AD 397년에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27권이 정경으로 체택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약 성경 전체가 의미를 중시했던 고대 사회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의미보다 사실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사실 중시적인 입장으로 의미 중시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맥락에서 왜 이런 기록이 쓰여졌는가 이것을 중심으로 신약 성경을 읽게 될 때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들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나누고 다음 시간부터 저희가 4번에 걸쳐서 복음서, 그중에서도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복음서의 중요한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11장 13-24절 (0) | 2022.01.30 |
---|---|
로마서 11장 1-12절 (0) | 2022.01.30 |
복음서 녹취 7 (0) | 2022.01.30 |
[시가서(시편) 3강] (0) | 2022.01.30 |
복음서 녹취 6 (0) | 2022.0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