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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1:1-12
제목: 이스라엘의 남은 자
오늘 본문은 9장과 10장에서 이미 한 번 나온 주제라 할 수 있죠?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이 현상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서 이방인의 빛으로 삼으시고 세계 만민을 하나님께로 향도하도록 제사장 백성으로 삼으신 그 계획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세계 만민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오는 이 제사장 사역을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에게는 맡기지 않고 소수의 남은 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 정도의 남은 자들에게만 이방인의 빛이 되는 이 사명을 허락하시는가? 이것이 참 놀랍죠! 사실은. 이것이 놀라운 겁니다. 파레토의 법칙이란 말도 있고요, 20대 80도 있고, 그러니까 20명, 20%의 일개미만 일하고 80%의 일개미가 일을 하지 않더라. 이런 일종의 그런 법칙이 있죠. 경영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한 조직에 실제로 조직을 돌아가게 만드는 일은 20%밖에 하지 않고 80%는 거의 조직의 자리를 채우는 정도만 일한다, 이것이 보통 경영학자들이 주장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어떤 경영 기법이 도입되어도 모든 경영학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일에 대한 충성도와 집착도, 성취도가 너무나 뛰어난 사람, 소수의 사람이 회사의 성과를 내고, 회사를 혁신하고, 회사를 끌어가지, 많은 경우는 평범하고 무감동한 그냥 최소한의 성실 이상 밖에는 보이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머지 20% 말고 80%까지 20% 되게 만들려고 애를 쓰면은 회사가 굉장히 힘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20대80의 법칙. 그 어떤 조직이든지 조직은 구성원이 모두 다 엄청나게 똑같은 정도로 깨어서 전사처럼, 영적인 용사처럼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다니면은 그 분위기가 살벌해진다는 거죠. 참 희한해요. 왜 조직의 대다수는 우둔하여지고 왜 소수만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렇게 사태를 수습해 가는지…….참 그 원리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본문에도 나옵니다. 대다수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어서 대세를 추종하는데 7,000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택하심을 따라 은혜를 입은 자, 그러니까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입은 자는 대세에 표류하지 않더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돈을 숭배하고 많은 소비와 쾌락을 충족시키는 삶을 자랑합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자랑하고, 페이스북에 자랑하고, 자기가 돈 쓴 것, 명품 산 것, 여행 갔다 온 것, 자기 가족들 자랑하고, 온갖 자랑을 다 일삼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적은 사람만이 자기가 쓸 수 있는 돈, 권력, 자기 욕망을 부인하고 그 남는 부인된 욕망으로 남을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돕고, 천사처럼 돕고,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은 너무나 수가 적은 겁니다. 그래서 이런 극소수의 신실한 남은 자와 대다수의 대세 추종자로 교회도 갈리고, 모든 직업 영역이 다 갈립니다. 교사들의 세계, 교수들의 세계,
변호사들의 세계, 의사의 세계, 회사원들의 세계 전부 다 갈립니다. 2대8정도. 정말 소수만이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런데 한 번 보십시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은 뭐죠? 7절에? 이방인의 빛이 되는 영광입니다. 이방인의 빛이 되는 이 영광은 이스라엘이 구하는 것이었는데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기 당대에 발견한 희한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자기 당대에만 이런 현상이 있었는가? 아니라는 거죠! 엘리야 시대 때, 이사야 시대 때, 예레미야 시대 때 전부 다 대다수의 배척파와 대다수의 대세 추종파와 소수의 사육신파, 소수의 일편단심파로 나누어진다는 거죠. 여기서 엘리야를 인용할 때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안 받으셨다는 거죠. 어떻게? “이스라엘 모두가 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7000명이 남아 있다!”이렇게 하나님이 대답했어요. 엘리야가 이스라엘 대다수 전부 다가 타락했다고 주장하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 7000명 남아있어”라고 답변하였듯이 우리 이스라엘 모두가 다 메시야를 배척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7000명에 해당되는 남은 자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엘리야 시대 때의 그 시대를 재해석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히려 우리 인류를, 우리 인류를 하나님이 오히려 변호합니다. 혈혈단신 예언자가 인류 전체를 이스라엘 전체를 고발하니까 하나님이 오히려 변호합니다. 여러분 잠깐만요!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엘리야처럼 주님의, 주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하면은 나머지 사람들을 전부 다 타락했다고 보기 쉬운 그런 편견이 있다는 거죠. 남들은 다 그냥 대충대충 사는데 나만 혼자 나와서, 추운데 나와서, 교회에서 기도하고 막 벌벌 떠는데 난로도 없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막 40일 작정 기도하고 이렇게 엘리야 같은 열심을 보이면은 나머지 교인들이 다 좀 세속주의자처럼 보이고 바알 숭배주의자처럼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엘리야에게 하는 말이 “그렇지 않다. 난로 없는 예배당에 나와서 벌벌 떨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 중에도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있다. 새벽기도 안 나와도 그 나름대로 정절을 지키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 있고, 정말 남들이 볼 때 주에 대한 열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은밀하게 7000명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은밀한 거룩한 영적 분투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눈에 보이는 걸로 “이렇게 특심한 나에 비해서 나머지는 전부 더 세속주의자예요”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아니! 7000명이 남아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지만 안 하는 사람 중에도 7000명이 있을 수 있고, 또 우리가 앞으로 새로운 목사님이 오셔가지고 본당 예배당에서 모여서 예배드릴 때 본당 예배당에까지 나아가지 못하지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참……이것은 참 안목입니다. 내가 주에 대한 열심이 특심할 때 다른 사람들을 약간 세속주의자, 대세-추종주의자라고 깔볼 수 있는 그런 영적 엘리트의식이 생길 수 있는데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 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네 눈에 안 보이지만 내가 7000명을 절대 주권적 섭리로 남겨놓았다!” 저는 이것을 믿거든요. 저는 지금 이것을 믿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다 우스울 정도로 세속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주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를 어딘가에 남겨두셨고 그들이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위한 불쏘시개가 된다는 것, 그것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입니다. 7절입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영적 우둔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성경이 인용됩니다.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오늘까지 혼미한 심령, 이것은 이사야 29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29장 10절입니다.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답니다. 아무리, 아무리 해도 이사야의 설교를 듣지 못하고 이사야를 끝내 배척했던 이사야 당대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끝내 배척하여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완매함, 영적 우매함, 영적 완고함과 우매함, 완매함으로 굴려 떨어질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마침내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고, 거치는 것이 되고, 그들의 밥상이란 함은 그들이 종교적으로 차렸던, 그들이 화려하게 차렸던 하나님과 함께 마시고 먹고 하는 이런 축복의 자리가 그들을 실족시키는 자리가 되었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은 영적으로 시력을 잃었고 그래서 그들은 영적 척추가 휘어져서 직립 보행하는데 실패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와 엘리야 시대를 들어서 이렇게 대다수의 이스라엘이 대세를 추종하고 우매 무지한 길로 갔고 소수만 은혜로 택하심으로 남아서 소수가 그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 원리를 설명한 후에 중요한 말을 말합니다. 11절에 그러면 이스라엘이 아예 재기불능으로 넘어졌나? 11절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실족함이, 그들이 넘어짐이, 그들의, 그들의 실족, 영적 우둔함이 재기불능으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아예 불가역적 실족, 한 번 실족하고 나면 다시는 그 실족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재기불능으로 실족했느냐,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의 실족은 일시적 실족이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넘어진 그 자리에 이방인이 막 쇄도해서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던 그 선민의 자리가 이방인에게 복권 당첨되듯이 막 나가서 이방인이 이스라엘이 넘어진 그 자리를, 그 빈틈을 막 노리고 온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직분을 맡지 않죠. 그러면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이 안 한다고 하면은 그 빈자리를 누가 매우냐 하면은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이 다 채웁니다.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 3년 사이에 너무 좋은, 우리 교회가 지난 3년 동안에 기도의 용사들이 스스로 드러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 2013년부터 이렇게 기도를 지속적으로 많이 하는 무리가 나타난 적은 없습니다. 구교준 목사님 오고 나서부터 기도의 용사가 나타났고 지금 앞으로 새로 오는 목사님은 더 좋은 혜택을 누립니다. 이렇게 기도의 용사가 이미 똘똘 뭉쳐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목사님이 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이렇게 기도의 용사가 옛날 처음 모였을 때에는 누가 기도의 용사인지를 몰랐습니다. 사실. 그런데 기도의 용사가 서로를 알아보고 떼 지어 나타났고 그리고 그들은 진짜 가향교회 안에 가향교회입니다. 내밀한 영적 소통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Church in church입니다. 교회 안에 교회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남은 자가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향교회를 떠나면 가향교회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가향교회는 주님의 보혈로 사신 백성들 무리이기 때문에 더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다 채웁니다. 그러니까 넘어지고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어떤 직분을 빼앗기는 그 자리에 새로운 직분을 맡은 사람이 가득 찾아와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서 열과 성을 쏟을 힘이 남아 있을 때 많이 하나님과 동행해 놓기를 바랍니다. 그것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저와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잘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목사님들은 그게 핵심 기도 제목입니다. 자신과 동역하는 사람들이 잘 되기를. 왜 그러냐 하면 그래서 목사님 옆에 있는 사람은 어쨌든 기도를 엄청 많이 받습니다. 중보기도를 왜? 그 목회자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은 자기 옆에 있는 동역자가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한 목사님이 목회를 하려면은 자기 주변부터 중보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들이 복된 사람이 되도록,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놔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유지가 됩니다. 그래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기도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방인의 빛이 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가향교회가 이방인의 빛이 되는 등대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제가 볼 때 굉장히 여러분들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영적으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 같습니다. 왜냐 하면은 우리 교회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은 모일 동기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에요. 일하는 영역도 다르고, 사는 동네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이 비전 때문에 우리 가향교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제가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 마음에 그렇게 느낍니다. 저는 여러분을 서른 명으로 보지 않고 엄청난 저의 동역자로 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 저는 여러분에게서 엄청난 일편단심적 신실성을 봅니다. 이것이 너무나 귀합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귀하지요? 서로? 귀한 여러분들이 똘똘 뭉쳐서 간절하게 기도해서 불이 붙는 부흥의 불쏘시개가 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가향교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000명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이스라엘의 남은 자
오늘 본문은 9장과 10장에서 이미 한 번 나온 주제라 할 수 있죠?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이 현상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서 이방인의 빛으로 삼으시고 세계 만민을 하나님께로 향도하도록 제사장 백성으로 삼으신 그 계획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세계 만민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오는 이 제사장 사역을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에게는 맡기지 않고 소수의 남은 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 정도의 남은 자들에게만 이방인의 빛이 되는 이 사명을 허락하시는가? 이것이 참 놀랍죠! 사실은. 이것이 놀라운 겁니다. 파레토의 법칙이란 말도 있고요, 20대 80도 있고, 그러니까 20명, 20%의 일개미만 일하고 80%의 일개미가 일을 하지 않더라. 이런 일종의 그런 법칙이 있죠. 경영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한 조직에 실제로 조직을 돌아가게 만드는 일은 20%밖에 하지 않고 80%는 거의 조직의 자리를 채우는 정도만 일한다, 이것이 보통 경영학자들이 주장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어떤 경영 기법이 도입되어도 모든 경영학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일에 대한 충성도와 집착도, 성취도가 너무나 뛰어난 사람, 소수의 사람이 회사의 성과를 내고, 회사를 혁신하고, 회사를 끌어가지, 많은 경우는 평범하고 무감동한 그냥 최소한의 성실 이상 밖에는 보이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머지 20% 말고 80%까지 20% 되게 만들려고 애를 쓰면은 회사가 굉장히 힘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20대80의 법칙. 그 어떤 조직이든지 조직은 구성원이 모두 다 엄청나게 똑같은 정도로 깨어서 전사처럼, 영적인 용사처럼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다니면은 그 분위기가 살벌해진다는 거죠. 참 희한해요. 왜 조직의 대다수는 우둔하여지고 왜 소수만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렇게 사태를 수습해 가는지…….참 그 원리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본문에도 나옵니다. 대다수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어서 대세를 추종하는데 7,000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택하심을 따라 은혜를 입은 자, 그러니까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입은 자는 대세에 표류하지 않더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돈을 숭배하고 많은 소비와 쾌락을 충족시키는 삶을 자랑합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자랑하고, 페이스북에 자랑하고, 자기가 돈 쓴 것, 명품 산 것, 여행 갔다 온 것, 자기 가족들 자랑하고, 온갖 자랑을 다 일삼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적은 사람만이 자기가 쓸 수 있는 돈, 권력, 자기 욕망을 부인하고 그 남는 부인된 욕망으로 남을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돕고, 천사처럼 돕고,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은 너무나 수가 적은 겁니다. 그래서 이런 극소수의 신실한 남은 자와 대다수의 대세 추종자로 교회도 갈리고, 모든 직업 영역이 다 갈립니다. 교사들의 세계, 교수들의 세계,
변호사들의 세계, 의사의 세계, 회사원들의 세계 전부 다 갈립니다. 2대8정도. 정말 소수만이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런데 한 번 보십시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은 뭐죠? 7절에? 이방인의 빛이 되는 영광입니다. 이방인의 빛이 되는 이 영광은 이스라엘이 구하는 것이었는데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기 당대에 발견한 희한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자기 당대에만 이런 현상이 있었는가? 아니라는 거죠! 엘리야 시대 때, 이사야 시대 때, 예레미야 시대 때 전부 다 대다수의 배척파와 대다수의 대세 추종파와 소수의 사육신파, 소수의 일편단심파로 나누어진다는 거죠. 여기서 엘리야를 인용할 때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안 받으셨다는 거죠. 어떻게? “이스라엘 모두가 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7000명이 남아 있다!”이렇게 하나님이 대답했어요. 엘리야가 이스라엘 대다수 전부 다가 타락했다고 주장하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 7000명 남아있어”라고 답변하였듯이 우리 이스라엘 모두가 다 메시야를 배척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7000명에 해당되는 남은 자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엘리야 시대 때의 그 시대를 재해석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히려 우리 인류를, 우리 인류를 하나님이 오히려 변호합니다. 혈혈단신 예언자가 인류 전체를 이스라엘 전체를 고발하니까 하나님이 오히려 변호합니다. 여러분 잠깐만요!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엘리야처럼 주님의, 주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하면은 나머지 사람들을 전부 다 타락했다고 보기 쉬운 그런 편견이 있다는 거죠. 남들은 다 그냥 대충대충 사는데 나만 혼자 나와서, 추운데 나와서, 교회에서 기도하고 막 벌벌 떠는데 난로도 없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막 40일 작정 기도하고 이렇게 엘리야 같은 열심을 보이면은 나머지 교인들이 다 좀 세속주의자처럼 보이고 바알 숭배주의자처럼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엘리야에게 하는 말이 “그렇지 않다. 난로 없는 예배당에 나와서 벌벌 떨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 중에도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있다. 새벽기도 안 나와도 그 나름대로 정절을 지키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 있고, 정말 남들이 볼 때 주에 대한 열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은밀하게 7000명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은밀한 거룩한 영적 분투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눈에 보이는 걸로 “이렇게 특심한 나에 비해서 나머지는 전부 더 세속주의자예요”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아니! 7000명이 남아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지만 안 하는 사람 중에도 7000명이 있을 수 있고, 또 우리가 앞으로 새로운 목사님이 오셔가지고 본당 예배당에서 모여서 예배드릴 때 본당 예배당에까지 나아가지 못하지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참……이것은 참 안목입니다. 내가 주에 대한 열심이 특심할 때 다른 사람들을 약간 세속주의자, 대세-추종주의자라고 깔볼 수 있는 그런 영적 엘리트의식이 생길 수 있는데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 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네 눈에 안 보이지만 내가 7000명을 절대 주권적 섭리로 남겨놓았다!” 저는 이것을 믿거든요. 저는 지금 이것을 믿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다 우스울 정도로 세속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주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를 어딘가에 남겨두셨고 그들이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위한 불쏘시개가 된다는 것, 그것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입니다. 7절입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영적 우둔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성경이 인용됩니다.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오늘까지 혼미한 심령, 이것은 이사야 29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29장 10절입니다.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답니다. 아무리, 아무리 해도 이사야의 설교를 듣지 못하고 이사야를 끝내 배척했던 이사야 당대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끝내 배척하여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완매함, 영적 우매함, 영적 완고함과 우매함, 완매함으로 굴려 떨어질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마침내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고, 거치는 것이 되고, 그들의 밥상이란 함은 그들이 종교적으로 차렸던, 그들이 화려하게 차렸던 하나님과 함께 마시고 먹고 하는 이런 축복의 자리가 그들을 실족시키는 자리가 되었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은 영적으로 시력을 잃었고 그래서 그들은 영적 척추가 휘어져서 직립 보행하는데 실패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와 엘리야 시대를 들어서 이렇게 대다수의 이스라엘이 대세를 추종하고 우매 무지한 길로 갔고 소수만 은혜로 택하심으로 남아서 소수가 그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 원리를 설명한 후에 중요한 말을 말합니다. 11절에 그러면 이스라엘이 아예 재기불능으로 넘어졌나? 11절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실족함이, 그들이 넘어짐이, 그들의, 그들의 실족, 영적 우둔함이 재기불능으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아예 불가역적 실족, 한 번 실족하고 나면 다시는 그 실족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재기불능으로 실족했느냐,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의 실족은 일시적 실족이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넘어진 그 자리에 이방인이 막 쇄도해서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던 그 선민의 자리가 이방인에게 복권 당첨되듯이 막 나가서 이방인이 이스라엘이 넘어진 그 자리를, 그 빈틈을 막 노리고 온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직분을 맡지 않죠. 그러면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이 안 한다고 하면은 그 빈자리를 누가 매우냐 하면은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이 다 채웁니다.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 3년 사이에 너무 좋은, 우리 교회가 지난 3년 동안에 기도의 용사들이 스스로 드러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 2013년부터 이렇게 기도를 지속적으로 많이 하는 무리가 나타난 적은 없습니다. 구교준 목사님 오고 나서부터 기도의 용사가 나타났고 지금 앞으로 새로 오는 목사님은 더 좋은 혜택을 누립니다. 이렇게 기도의 용사가 이미 똘똘 뭉쳐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목사님이 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이렇게 기도의 용사가 옛날 처음 모였을 때에는 누가 기도의 용사인지를 몰랐습니다. 사실. 그런데 기도의 용사가 서로를 알아보고 떼 지어 나타났고 그리고 그들은 진짜 가향교회 안에 가향교회입니다. 내밀한 영적 소통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Church in church입니다. 교회 안에 교회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남은 자가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향교회를 떠나면 가향교회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가향교회는 주님의 보혈로 사신 백성들 무리이기 때문에 더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다 채웁니다. 그러니까 넘어지고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어떤 직분을 빼앗기는 그 자리에 새로운 직분을 맡은 사람이 가득 찾아와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서 열과 성을 쏟을 힘이 남아 있을 때 많이 하나님과 동행해 놓기를 바랍니다. 그것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저와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잘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목사님들은 그게 핵심 기도 제목입니다. 자신과 동역하는 사람들이 잘 되기를. 왜 그러냐 하면 그래서 목사님 옆에 있는 사람은 어쨌든 기도를 엄청 많이 받습니다. 중보기도를 왜? 그 목회자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은 자기 옆에 있는 동역자가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한 목사님이 목회를 하려면은 자기 주변부터 중보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들이 복된 사람이 되도록,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놔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유지가 됩니다. 그래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기도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방인의 빛이 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가향교회가 이방인의 빛이 되는 등대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제가 볼 때 굉장히 여러분들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영적으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 같습니다. 왜냐 하면은 우리 교회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은 모일 동기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에요. 일하는 영역도 다르고, 사는 동네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이 비전 때문에 우리 가향교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제가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 마음에 그렇게 느낍니다. 저는 여러분을 서른 명으로 보지 않고 엄청난 저의 동역자로 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 저는 여러분에게서 엄청난 일편단심적 신실성을 봅니다. 이것이 너무나 귀합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귀하지요? 서로? 귀한 여러분들이 똘똘 뭉쳐서 간절하게 기도해서 불이 붙는 부흥의 불쏘시개가 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가향교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000명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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