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예배의 선구자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예배의식
주 승 중(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시간에 1531년 쯔빙글리의 사망 후에 개혁파 전통의 창조적인 예봉은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크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공부하였다. 과격했던 쯔빙글리의 사후에, 이제 개혁교회는 두 번째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국면을 지배한 사람은 존 칼빈과 그의 예배 부분의 두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윌리암 파렐과 마틴 부쳐이다. 1533년 제네바 종교개혁은 파렐(Guillaume Farel,1489-1565)의 지도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1536년 파렐이 불란서 출신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에게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데서부터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연관을 맺게 되었다. 칼빈은 그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초대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되살리는 예배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전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은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 예배 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칼빈의 예배의식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2. 몸 말
1)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부쳐와의 만남
칼빈은 목회자가 매 주일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무는 설교와 교육에 매주일의 성찬 성례전을 집례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칼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그것은 칼빈이 성례전적인 예배(sacramental worship--성만찬 중심의 예배)를 말씀 중심의 예배(preaching service)로 완전히 바꾸려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의 의도와 노력에 대한 오해요, 그가 가르치고 행한 모든 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은 두 가지의 목표를 가졌는데, 첫째는 매주 예배에서 성만찬이 초대 기독교의 단순성과 조화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예배에서 성경말씀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즉 칼빈은 예배 가운데서 주님의 만찬이 완전히 정착 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쯔빙글리 예배의 영향권에 빠져 있던 제네바 의회는 이에 전혀 동조를 하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그가 제네바에 오기 전에 집필했던 「기독교 강요」에 있는 다음의 명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용감하게 초대교회의 예배정신을 계승하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람들이 1년에 한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한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져야 한다.
이 때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 있지 않던 환경이었기에 제네바의 행정관료들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제네바의 행정관료들은 칼빈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갈등만을 계속하다가 1538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한편 스트라스버그에서의 예배 개혁은 칼빈이 이곳에 망명해와 불어권 회중들을 목회 하면서 완전한 정착을 가져왔다. 부쳐의 환영을 받으면서 이곳에서 1541년 제네바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약 3년 동안 지내면서 칼빈은 부쳐의 예배 개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부쳐가 작성한 예배 모범(Service book)은 매우 중요했다. 칼빈의 첫 예배 의식은 그가 1538-41년 사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망명한 프랑스 회중들을 목회하던 때에 만들어졌다. 특별히 그의 성례전에 대한 입장 때문에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여 스크라스부르크에 와서 그는 망명자들을 위해 신학을 가르치고 목회를 하였는데, 당시 그곳에는 종교개혁에 동조하므로 박해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은신처가 되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하기 전까지 당시 그곳의 독일인 관료들은 그곳에 망명한 프랑스인들이 별도로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도착한 후 그들은 매월 한번씩 부쳐를 따르는 그 지역 교회들에서 당시의 관례에 따라 성만찬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정착할 당시 예배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이를 하나 하나 적용시켜 나갔다.
그는 예배 인도자로서 이곳에서 활동하는 동안 부쳐의 예배 모범을 사용하였고, 나중에도 약간의 수정을 가한 예배 모범을 발전시킬 뿐이었다. 그 동안 쯔빙글리에 의하여 예전의 감각이 없이 설교만으로 예배를 진행했던 개혁교회 예배에 대한 새로운 갱신을 칼빈은 이곳에서 시도하였다. 즉 칼빈이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보다도 성찬 성례전을 주일 예배에서 생략하는 경우에도 예배로서의 깊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예배의 구성을 시도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후일에 개혁 교회 예배의 중요한 틀로서 영향을 끼치게된 것이다.
2) 제네바에서의 예배 개혁
스트라스부르크에서 3년여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1542년 그의 예배 모범(service book)을 펴낸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예배 전통에 따른 성만찬의 집례 요령과 그 기도문」(The Form of Prayer and Manner of Ministering the Sacraments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Ancient Church)이라는 기다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예전은 스트라스버그의 부쳐의 예전과 파렐(William Farel)의 예전에서 받은 깊은 영향과 자신의 예배 현장에서 얻은 경험들을 종합하여 이 예전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일요 예배에 있어서 나는 스트라스부르크 예배 의식을 취하였고, 많은 부분들을 그것에서 빌려 왔다” 말한다.
칼빈은 독일어를 읽거나 말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처음에 독일 예배 의식을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번역에 착수하여 독일 예배 의식을 프랑스어로 바꾸어 나갔다. 그의 이 목표는 1539(또는 1540년 초)년에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 때 첫 예식서를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회중 찬송을 위한 프랑스어 운율과 멜로디로 된 몇 개의 시편송도 담고 있었다. 제네바로 돌아온 후 칼빈이 사용한 예배 의식은 1542년에 발간된 것이었으며, 그 후에 판을 거듭한 내용들이 오늘까지 많이 남아 있다.
칼빈과 스트라스부르크의 예전이 얼마나 서로 관련이 있는가를 위하여 우리는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어 예배의식과,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어) 예배 의식, 1542년 제네바 예배 의식을 비교해 보고자 이들을 여기 소개해 본다.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어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Word)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딤전 1장)
용서의 선언
시편송, 찬송가 혹은 키리에와 영광송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운율 시편송
성경봉독(복음서)
설교
성만찬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 Room)
헌금
성문준비(이 때 사도신경을 노래함)
중보기도와 성찬기도
주기도문
권면
성찬 제정사
성체 분할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송이나 찬송을 부름)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폐회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시 124:8)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
용서의 선언
키리에와 함께 운율에 맞춘 십계명 찬송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봉독
설교
성만찬 예전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문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성찬기도
주기도문
성찬제정사
권면
성체분할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송을 부름)
성찬 후 기도
시므온의 찬미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1542년 제네바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시 124:8)
죄의 고백
속죄를 위한 기도
시편송(운율에 맞춤)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봉독
설교
성찬성례전
구제를 위한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물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제정의 말씀
권면
성찬기도(성령임재를 위한)
성체분할(분병례)
분병, 분잔
성찬참여(시편 혹은 성경말씀 봉독)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민6:24-26)
위의 예배 순서들을 비교해 보면 이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앖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의 고백이나 중보기도, 성찬 기도 등은 부쳐의 예배 의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단지 해설이 더해진 주기도문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십계명의 사용은 칼빈의 예식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기는 하나, 이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그리고 칼빈이 시므온의 찬미를 성찬 후 넣고 있으나, 이것 역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제네바 예배의식을 잘 살펴보면 그 구조가 더욱 빈약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가능하면 예배 의식을 간단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제네바 행정관료들의 극단적인 입장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의 입장이 가장 잘 반영된 예배 의식은 제네바 보다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만들어진 예배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545년에 작성한 예식서의 서문을 살펴보면 그의 입장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율법서나 복음서의 성구로 용서의 선언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 는 스스로 의로우시며 생명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의로와지며, 새생명 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편송, 찬양의 찬송, 복음서 봉독, 신앙고백(사도신경 등), 헌금을 한다. ...그리고 복음서의 봉독과 설교, 신앙고백은 매우 생동감 있고 활기있게 진행된 다....이어서 우리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히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서 더욱 불타 오르도록 기도드린다. 그리스도의 삶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어서 우리는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되므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께 경배드린다....”
3) 칼빈의 예배 의식의 특징들
(1) 초대 교회의 예배 예전을 회복하려함
위에서 인용한 1545년 그가 작성한 예배 의식의 서문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의 단순하고 간결한 성만찬 예전을 회복하려 했던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되므로...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께 경배드린다. 우리는 경외와 찬양과 감사로 신비한
성만찬을 받는다. 이러한 절차와 방법으로 우리는 예배를 진행하는데, 이것은
사도와 교부들 시대의 고대 교회와 일치되는 것이다”
칼빈이 “은혜의 방편”으로서 강조한 두 가지는 말씀(the Word)과 성례전(the Sacrament)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ministry)는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사역이었다. 목회자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업과 직무는 설교와 교육을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주일 성만찬을 집례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봉독과 해설을 고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의 중심에 놓았고, 성만찬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전 생애 동안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이것을 분명히 하도록 하였다.
칼빈의 예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초대 교회와 같이 성체를 받기 위해 나아 온 사람들에게 권고와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으며, 성경 봉독과 설교 전에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운율을 사용한 시편이 찬송되었다는 점과 구제를 위한 헌금이 드려짐으로서 사람들에 의한 봉헌이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 신학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칼빈은 중세 미사를 흉내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그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초대교회가 드렸던 예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 성만찬에 대한 그의 견해
특별히 칼빈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쯔빙글리의 기념적 행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means of grace)이었다. 칼빈은 루터의 공재론처럼 성만찬에서의 주님의 사실적 임재론을 피하고 있다. 그는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하다”고 피력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성만찬에 실제적으로(really), 그리고 전적으로(fully) 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찬을 행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여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러한 신학이 「영적 임재설」로서 오늘에 이른다.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만찬의 임재론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칼빈은 성찬을 1년에 한번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라고 하였고,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한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제네바의 행정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추수절에만 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연 4회의 성찬식 전에 준비 기간을 갖도록 하였다. 이 준비 기간은 “각 사람이 성찬식을 가치 있게, 그리고 성찬식을 합당한 경건함으로 받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전 주일에 선포했다. 어린이들과 외부인들은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상당한 자기 검사와 성찬 후에 성찬식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성찰적 경건은 개혁파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매주일의 성찬예전을 시도하지 못하고, “화평을 위해서” 네 번 집례함에 동의 하였지만, 1555년 베른(Berne)의 행정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편지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성만찬을 일년에 네 번 집례하거나 여러분이 세 번 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 다. 여러분이나 우리는 성만찬이 보다 자주 집례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을 보면 최초의 교회에서는 성만찬이 보다 자주 거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 교회에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미사에 사탄에 대한 증오가 사탄에 의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면에 한두 번 성만찬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 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비록 칼빈은 시의 간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원치 않은 성만찬 관례를 따랐지만, 이것은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성만찬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면, 성찬을 받는 순서는 교회의 서열에 따라 집례자가 제일 먼저 받고, 그 다음이 부교역자, 그리고 회중 순이었다. 성찬을 받을 때는 성찬대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거나 또는 선 자세로 받았으며, 먼저 한 목사로부터 빵을 받고, 다른 목사에게서 잔을 받았다. 그리고 성만찬이 없는 주일 예배는 1530년 이후 스크라스부르크에 있는 지교회(parish church)들에서 행해지는 방식을 따랐다. 성찬 예배의 순서나 구조, 내용은 광범위하게 수용하였으나, 성찬 기도와 영성체 부분에 관련된 순서들을 생략되었다. 이러한 예배 형식은 종교개혁 후에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이어져 갔다.
(3) 설교에 대한 그의 견해
칼빈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로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만찬과 함께 예배에 있어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요소였다. 즉 설교는 그의 예배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성경의 계속적인 강독을 선호함으로 말미암아 설교가 성경의 각 책을 차례로 다루어 감에 따라 성구집은 폐기 되었다. 성경의 본문이 상세하게 해설된 다음 현재의 삶에, 특별히 교리와 도덕의 관점으로 적용되었다. 칼빈의 설교신학은 주로 주석적 신학이고, 그는 말년의 많은 부분을 성경의 대부분의 책들의 주석을 만드는데 보냈다. 칼빈은 강단에서 예배의 대부분을 인도하는 것을 좋아했고, 따라서 훌륭한 강단들이 개혁파 교회들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4) 기타 예배의 요소들
먼저 칼빈은 말씀과 성례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그의 성찬 신학은 그리스도의 식사에 초대하여 기운을 북돋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래서 성찬을 받기 전에 성령 강림을 비는 기도(epiclesis)와 또는 성경 봉독전에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Collect for Illumination)는 아주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도들은 개혁파 예배에서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 다음에 칼빈은 시편송을 아주 강조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장려하였던 루터교 전통이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쮜리히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칼빈은 시편을 프랑스 운문으로 번역하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제네바를 방문한 사람들은 시편 찬송이 예배에 주는 엄숙함과 기쁨에 대해 말하였고,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감명을 받았다. 찬송가는 파이프 오르간과 같이 배제 되었다. 따라서 모든 음악은 사실상 회중의 찬양이 전부였다. 회중은 십계명을 찬송하기도 했다. 모든 찬송은 성경적이었고 구약성경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는 이렇게 시편의 기쁨과 슬픔들이 음악으로 회중의 입으로 옮겨질 수 있었던 반면에 예배 장소의 시각적인 면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쮜리히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상들은 제거되었다.
그 다음에 칼빈은 세례용 석대(오늘의 세례반)를 회중 앞에 두어 유아 세례가 완전하게 회중의 행사가 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하여 세례반이 강단과 가까운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세례식을 재형성하여 매우 단순한 의식 형태로 만들었다. 견진은 폐지되었으나, 젊은이들이 회중 앞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설명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 규정은 결국 믿음의 공동체에서 성인에 이른 사람들을 위한 표준적 개혁파의 통과 의식으로써 공적인 신앙고백 의식이 되었다.
또한 예배를 위한 주간의 중요한 행사로 주일에만 초점을 맞춤으로 성일들 및 다른 축제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앞서도 밝혔듯이 년 4회의 성찬식 거행은 직전의 준비일들과 함께 교회력에 있어 중요한 날들이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생활주기를 특징짓는 예배들도 단순화 되었다. 예를 들어 결혼식은 성례가 아니지만 선한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바르는 “도유식” 또는 종부 성사(extreme unction)는 폐지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개혁파 교회들에서 장례식은 비난을 받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직 수임식은 거의 성례로 생각했다.
3. 나가는 말
칼빈은 진정으로 교부적인(patristic) 예배를 성취하기를 원했다. 그의 모델은 초대 교회였는데, 그 초대 교회란 단지 신약성경의 교회만이 아니라, 교부들과 순교자들의 교회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제네바 행정의 구조적인 장벽 때문에 펼쳐지지 못하였지만 오른 개혁 교회들이 다시금 온전히 회복해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예배의식
주 승 중(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시간에 1531년 쯔빙글리의 사망 후에 개혁파 전통의 창조적인 예봉은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크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공부하였다. 과격했던 쯔빙글리의 사후에, 이제 개혁교회는 두 번째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국면을 지배한 사람은 존 칼빈과 그의 예배 부분의 두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윌리암 파렐과 마틴 부쳐이다. 1533년 제네바 종교개혁은 파렐(Guillaume Farel,1489-1565)의 지도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1536년 파렐이 불란서 출신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에게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데서부터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연관을 맺게 되었다. 칼빈은 그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초대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되살리는 예배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전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은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 예배 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칼빈의 예배의식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2. 몸 말
1)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부쳐와의 만남
칼빈은 목회자가 매 주일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무는 설교와 교육에 매주일의 성찬 성례전을 집례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칼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그것은 칼빈이 성례전적인 예배(sacramental worship--성만찬 중심의 예배)를 말씀 중심의 예배(preaching service)로 완전히 바꾸려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의 의도와 노력에 대한 오해요, 그가 가르치고 행한 모든 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은 두 가지의 목표를 가졌는데, 첫째는 매주 예배에서 성만찬이 초대 기독교의 단순성과 조화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예배에서 성경말씀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즉 칼빈은 예배 가운데서 주님의 만찬이 완전히 정착 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쯔빙글리 예배의 영향권에 빠져 있던 제네바 의회는 이에 전혀 동조를 하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그가 제네바에 오기 전에 집필했던 「기독교 강요」에 있는 다음의 명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용감하게 초대교회의 예배정신을 계승하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람들이 1년에 한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한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져야 한다.
이 때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 있지 않던 환경이었기에 제네바의 행정관료들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제네바의 행정관료들은 칼빈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갈등만을 계속하다가 1538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한편 스트라스버그에서의 예배 개혁은 칼빈이 이곳에 망명해와 불어권 회중들을 목회 하면서 완전한 정착을 가져왔다. 부쳐의 환영을 받으면서 이곳에서 1541년 제네바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약 3년 동안 지내면서 칼빈은 부쳐의 예배 개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부쳐가 작성한 예배 모범(Service book)은 매우 중요했다. 칼빈의 첫 예배 의식은 그가 1538-41년 사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망명한 프랑스 회중들을 목회하던 때에 만들어졌다. 특별히 그의 성례전에 대한 입장 때문에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여 스크라스부르크에 와서 그는 망명자들을 위해 신학을 가르치고 목회를 하였는데, 당시 그곳에는 종교개혁에 동조하므로 박해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은신처가 되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하기 전까지 당시 그곳의 독일인 관료들은 그곳에 망명한 프랑스인들이 별도로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도착한 후 그들은 매월 한번씩 부쳐를 따르는 그 지역 교회들에서 당시의 관례에 따라 성만찬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정착할 당시 예배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이를 하나 하나 적용시켜 나갔다.
그는 예배 인도자로서 이곳에서 활동하는 동안 부쳐의 예배 모범을 사용하였고, 나중에도 약간의 수정을 가한 예배 모범을 발전시킬 뿐이었다. 그 동안 쯔빙글리에 의하여 예전의 감각이 없이 설교만으로 예배를 진행했던 개혁교회 예배에 대한 새로운 갱신을 칼빈은 이곳에서 시도하였다. 즉 칼빈이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보다도 성찬 성례전을 주일 예배에서 생략하는 경우에도 예배로서의 깊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예배의 구성을 시도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후일에 개혁 교회 예배의 중요한 틀로서 영향을 끼치게된 것이다.
2) 제네바에서의 예배 개혁
스트라스부르크에서 3년여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1542년 그의 예배 모범(service book)을 펴낸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예배 전통에 따른 성만찬의 집례 요령과 그 기도문」(The Form of Prayer and Manner of Ministering the Sacraments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Ancient Church)이라는 기다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예전은 스트라스버그의 부쳐의 예전과 파렐(William Farel)의 예전에서 받은 깊은 영향과 자신의 예배 현장에서 얻은 경험들을 종합하여 이 예전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일요 예배에 있어서 나는 스트라스부르크 예배 의식을 취하였고, 많은 부분들을 그것에서 빌려 왔다” 말한다.
칼빈은 독일어를 읽거나 말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처음에 독일 예배 의식을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번역에 착수하여 독일 예배 의식을 프랑스어로 바꾸어 나갔다. 그의 이 목표는 1539(또는 1540년 초)년에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 때 첫 예식서를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회중 찬송을 위한 프랑스어 운율과 멜로디로 된 몇 개의 시편송도 담고 있었다. 제네바로 돌아온 후 칼빈이 사용한 예배 의식은 1542년에 발간된 것이었으며, 그 후에 판을 거듭한 내용들이 오늘까지 많이 남아 있다.
칼빈과 스트라스부르크의 예전이 얼마나 서로 관련이 있는가를 위하여 우리는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어 예배의식과,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어) 예배 의식, 1542년 제네바 예배 의식을 비교해 보고자 이들을 여기 소개해 본다.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어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Word)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딤전 1장)
용서의 선언
시편송, 찬송가 혹은 키리에와 영광송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운율 시편송
성경봉독(복음서)
설교
성만찬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 Room)
헌금
성문준비(이 때 사도신경을 노래함)
중보기도와 성찬기도
주기도문
권면
성찬 제정사
성체 분할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송이나 찬송을 부름)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폐회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시 124:8)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
용서의 선언
키리에와 함께 운율에 맞춘 십계명 찬송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봉독
설교
성만찬 예전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문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성찬기도
주기도문
성찬제정사
권면
성체분할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송을 부름)
성찬 후 기도
시므온의 찬미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1542년 제네바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시 124:8)
죄의 고백
속죄를 위한 기도
시편송(운율에 맞춤)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봉독
설교
성찬성례전
구제를 위한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물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제정의 말씀
권면
성찬기도(성령임재를 위한)
성체분할(분병례)
분병, 분잔
성찬참여(시편 혹은 성경말씀 봉독)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민6:24-26)
위의 예배 순서들을 비교해 보면 이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앖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의 고백이나 중보기도, 성찬 기도 등은 부쳐의 예배 의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단지 해설이 더해진 주기도문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십계명의 사용은 칼빈의 예식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기는 하나, 이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그리고 칼빈이 시므온의 찬미를 성찬 후 넣고 있으나, 이것 역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제네바 예배의식을 잘 살펴보면 그 구조가 더욱 빈약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가능하면 예배 의식을 간단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제네바 행정관료들의 극단적인 입장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의 입장이 가장 잘 반영된 예배 의식은 제네바 보다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만들어진 예배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545년에 작성한 예식서의 서문을 살펴보면 그의 입장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율법서나 복음서의 성구로 용서의 선언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 는 스스로 의로우시며 생명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의로와지며, 새생명 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편송, 찬양의 찬송, 복음서 봉독, 신앙고백(사도신경 등), 헌금을 한다. ...그리고 복음서의 봉독과 설교, 신앙고백은 매우 생동감 있고 활기있게 진행된 다....이어서 우리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히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서 더욱 불타 오르도록 기도드린다. 그리스도의 삶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어서 우리는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되므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께 경배드린다....”
3) 칼빈의 예배 의식의 특징들
(1) 초대 교회의 예배 예전을 회복하려함
위에서 인용한 1545년 그가 작성한 예배 의식의 서문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의 단순하고 간결한 성만찬 예전을 회복하려 했던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되므로...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께 경배드린다. 우리는 경외와 찬양과 감사로 신비한
성만찬을 받는다. 이러한 절차와 방법으로 우리는 예배를 진행하는데, 이것은
사도와 교부들 시대의 고대 교회와 일치되는 것이다”
칼빈이 “은혜의 방편”으로서 강조한 두 가지는 말씀(the Word)과 성례전(the Sacrament)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ministry)는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사역이었다. 목회자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업과 직무는 설교와 교육을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주일 성만찬을 집례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봉독과 해설을 고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의 중심에 놓았고, 성만찬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전 생애 동안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이것을 분명히 하도록 하였다.
칼빈의 예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초대 교회와 같이 성체를 받기 위해 나아 온 사람들에게 권고와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으며, 성경 봉독과 설교 전에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운율을 사용한 시편이 찬송되었다는 점과 구제를 위한 헌금이 드려짐으로서 사람들에 의한 봉헌이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 신학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칼빈은 중세 미사를 흉내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그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초대교회가 드렸던 예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 성만찬에 대한 그의 견해
특별히 칼빈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쯔빙글리의 기념적 행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means of grace)이었다. 칼빈은 루터의 공재론처럼 성만찬에서의 주님의 사실적 임재론을 피하고 있다. 그는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하다”고 피력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성만찬에 실제적으로(really), 그리고 전적으로(fully) 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찬을 행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여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러한 신학이 「영적 임재설」로서 오늘에 이른다.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만찬의 임재론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칼빈은 성찬을 1년에 한번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라고 하였고,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한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제네바의 행정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추수절에만 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연 4회의 성찬식 전에 준비 기간을 갖도록 하였다. 이 준비 기간은 “각 사람이 성찬식을 가치 있게, 그리고 성찬식을 합당한 경건함으로 받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전 주일에 선포했다. 어린이들과 외부인들은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상당한 자기 검사와 성찬 후에 성찬식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성찰적 경건은 개혁파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매주일의 성찬예전을 시도하지 못하고, “화평을 위해서” 네 번 집례함에 동의 하였지만, 1555년 베른(Berne)의 행정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편지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성만찬을 일년에 네 번 집례하거나 여러분이 세 번 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 다. 여러분이나 우리는 성만찬이 보다 자주 집례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을 보면 최초의 교회에서는 성만찬이 보다 자주 거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 교회에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미사에 사탄에 대한 증오가 사탄에 의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면에 한두 번 성만찬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 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비록 칼빈은 시의 간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원치 않은 성만찬 관례를 따랐지만, 이것은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성만찬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면, 성찬을 받는 순서는 교회의 서열에 따라 집례자가 제일 먼저 받고, 그 다음이 부교역자, 그리고 회중 순이었다. 성찬을 받을 때는 성찬대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거나 또는 선 자세로 받았으며, 먼저 한 목사로부터 빵을 받고, 다른 목사에게서 잔을 받았다. 그리고 성만찬이 없는 주일 예배는 1530년 이후 스크라스부르크에 있는 지교회(parish church)들에서 행해지는 방식을 따랐다. 성찬 예배의 순서나 구조, 내용은 광범위하게 수용하였으나, 성찬 기도와 영성체 부분에 관련된 순서들을 생략되었다. 이러한 예배 형식은 종교개혁 후에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이어져 갔다.
(3) 설교에 대한 그의 견해
칼빈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로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만찬과 함께 예배에 있어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요소였다. 즉 설교는 그의 예배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성경의 계속적인 강독을 선호함으로 말미암아 설교가 성경의 각 책을 차례로 다루어 감에 따라 성구집은 폐기 되었다. 성경의 본문이 상세하게 해설된 다음 현재의 삶에, 특별히 교리와 도덕의 관점으로 적용되었다. 칼빈의 설교신학은 주로 주석적 신학이고, 그는 말년의 많은 부분을 성경의 대부분의 책들의 주석을 만드는데 보냈다. 칼빈은 강단에서 예배의 대부분을 인도하는 것을 좋아했고, 따라서 훌륭한 강단들이 개혁파 교회들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4) 기타 예배의 요소들
먼저 칼빈은 말씀과 성례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그의 성찬 신학은 그리스도의 식사에 초대하여 기운을 북돋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래서 성찬을 받기 전에 성령 강림을 비는 기도(epiclesis)와 또는 성경 봉독전에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Collect for Illumination)는 아주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도들은 개혁파 예배에서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 다음에 칼빈은 시편송을 아주 강조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장려하였던 루터교 전통이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쮜리히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칼빈은 시편을 프랑스 운문으로 번역하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제네바를 방문한 사람들은 시편 찬송이 예배에 주는 엄숙함과 기쁨에 대해 말하였고,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감명을 받았다. 찬송가는 파이프 오르간과 같이 배제 되었다. 따라서 모든 음악은 사실상 회중의 찬양이 전부였다. 회중은 십계명을 찬송하기도 했다. 모든 찬송은 성경적이었고 구약성경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는 이렇게 시편의 기쁨과 슬픔들이 음악으로 회중의 입으로 옮겨질 수 있었던 반면에 예배 장소의 시각적인 면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쮜리히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상들은 제거되었다.
그 다음에 칼빈은 세례용 석대(오늘의 세례반)를 회중 앞에 두어 유아 세례가 완전하게 회중의 행사가 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하여 세례반이 강단과 가까운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세례식을 재형성하여 매우 단순한 의식 형태로 만들었다. 견진은 폐지되었으나, 젊은이들이 회중 앞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설명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 규정은 결국 믿음의 공동체에서 성인에 이른 사람들을 위한 표준적 개혁파의 통과 의식으로써 공적인 신앙고백 의식이 되었다.
또한 예배를 위한 주간의 중요한 행사로 주일에만 초점을 맞춤으로 성일들 및 다른 축제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앞서도 밝혔듯이 년 4회의 성찬식 거행은 직전의 준비일들과 함께 교회력에 있어 중요한 날들이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생활주기를 특징짓는 예배들도 단순화 되었다. 예를 들어 결혼식은 성례가 아니지만 선한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바르는 “도유식” 또는 종부 성사(extreme unction)는 폐지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개혁파 교회들에서 장례식은 비난을 받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직 수임식은 거의 성례로 생각했다.
3. 나가는 말
칼빈은 진정으로 교부적인(patristic) 예배를 성취하기를 원했다. 그의 모델은 초대 교회였는데, 그 초대 교회란 단지 신약성경의 교회만이 아니라, 교부들과 순교자들의 교회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제네바 행정의 구조적인 장벽 때문에 펼쳐지지 못하였지만 오른 개혁 교회들이 다시금 온전히 회복해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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