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一念人生! (막 1:1-8)
오늘 읽은 말씀은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알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데는 세례 요한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세례 요한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우선 세례 요한은 외곬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을 (평생이라야 30년밖에 안 되는 생애지만) 오직 한길만을 걸어갔던 사람입니다. 평생을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다른 일에는 곁눈질 한번 해본 일이 없고 한번도 중심이 흔들려 본 일이 없는 일방 통행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삶은 자연히 엄격했고 철두철미한 일념의 인생을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이 같은 요소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너무 융통성이 많은 것도 좋지 않습니다. 융통성이 많다는 말은 얼핏 생각하면 너그럽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지만 좀 곰곰히 생각해 보면 뭔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인생관은 별로 분명하지가 않은 인생관입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좋은 수도 있지만 좀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 인생관에는 중심이 불분명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적어도 그런 불분명한 처신이나 태도는 전혀 용납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그 태도와 생각이 시원스러울 정도로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외곬의 사람이었습니다.
2. 또 세례 요한은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집권자들에게 세례 요한이라는 존재는 마치 목에 박힌 가시같이 거북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극단의 재야 인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왕은 헤롯 안디바였는데 이 헤롯의 동생이 빌립입니다. 빌립의 아내는 참 관능적이었고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빌립은 좀 바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서 살았습니다. 이를테면 불륜이고 부정입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묵묵부답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헤롯을 거침없이 질타했습니다. 맹렬히 힐난했습니다. 아주 거침없이 고발했습니다. 헤롯왕은 그런 요한의 입을 막아 놓기 위해서 감옥에다 집어 넣고는 달래 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는 협박도 해보았지만 도무지 타협이 되질 않고 협상이 되질 않았습니다. 아주 일방 통행입니다. 그런 세례 요한을 헤롯왕은 죽일 용기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행동을 보고 정작 용기 있게 도전해 온 것은 바로 문제의 여인 헤로디아라는 헤롯의 부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왕인 헤롯과 호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세례 요한에게 한을 품었고 독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헤로디아가 헤롯의 생일날 전국에 있는 귀인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모인 잔치 자리에 흥을 돋구어 주었습니다. 흥이 절정에 달할 즈음에 헤롯이 의붓딸 살로메가 나와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 춤은 관능적인 춤이었고 지극히 흐느적거리는 음란한 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 헤로디아가 목적한 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한 대로 그 음란하게 춤추는 모습에 모두들 정신을 빼앗긴 듯 감탄을 했습니다.
그때 헤롯의 마음은 대단히 흐믓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귀인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그는 한껏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 자리에서 자기의 의붓딸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요부였던 헤로디아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잔치를 베풀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마음 먹은 대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마침내 딸을 시켜 세례 요하느이 목을 소반에 담아 달라고 왕에게 요구하게 합니다. 얼마나 독한 여자입니까?
세례 요한은 그렇게 해서 결국 순교를 당합니다. 아마 역사상 여인이 춘 춤의 개런티로 목이 달아난 사람은 세례 요한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고고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일방 통행의 외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집권자들에게 세례 요한은 다루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살다가 외롭게 순교했습니다.
3.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헬라어로 요한네스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탄생부터가 특별났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아비야가의 현직 제사장인 사가랴였고 어머니는 마리아의 친족되는 아론가의 후손인 엘리사벳입니다. 이 부부에게는 노년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가랴가 성소에서 분향을 하고 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말하기를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수태 통고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 그러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그리고 그를 나실인으로 키우라, 그는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하리라(눅 1:5-19)" 이 같은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는 사촌간으로 약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요한을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렇게 특별한 사람입니다.
4.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만 증거하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값입니다. 세례 요한의 일생을 보면 오로지 예수만을 위해서 살다가 죽은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예수맨이었습니다. 요한은 순전히 예수만을 위해 태어나서, 그 예수를 위해 길을 준비하며 살다가, 그 사명이 끝나자마자 어느 날 이슬처럼 사라져 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가리킬 때 대명사처럼 앞에 붙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의 소리"입니다.
소리는 말을 담아서 외친 후에는 곧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은 예수를 가리키고 "소리"는 요한을 가리킵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오래 남습니다. 그것이 글로 남겨질 때는 몇 천년 후까지도 그 말이 남게 됩니다. 그렇지만 소리는 한번 외치면 곧 없어져 버립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 소리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예수만을 전하다가 어느 날 소리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기의 모습은 남기지 않고 예수의 모습만 남기기 위해 애를 쓰다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후에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마 11:11)"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을 이렇게 오직 한 가지 일만을 위해서 철저하게 살아가다가 일생을 마치는 것도 굉장히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한번밖에 없는 내 인생을 한 가지 일을 위해 깊이 묻혀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뜻이 있는 삶이겠습니까?
칼 힐티라는 철학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인생을 바쳐서 기쁘고 만족스럽게 일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한 직장에서 젊음을 바치고 인생을 바쳐서 평생을 일하다가 퇴직한다면 그런 면에서 위대한 일입니다. 또 사람이 한 분야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기 전공을 살려 일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한 가지 사명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살다가 그 일로 인해 죽을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타고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롯데그룹의 회장인 신격호 씨에게 사람들이 회사 이름을 왜 롯데라고 지었느냐 물으니까 이런 대답들 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학생 시절에는 문학 소년이었답니다. 학창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이 그렇게 좋아서 탐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책에 나오는 롯데라는 주인공에 대해서 그는 심취하고 깊이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 영향이 후에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인생 여정에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상호를 지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롯데라고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사람이 이렇게 어떤 일에 몰입하고 심취하고 평생 마음과 머리와 가슴과 의식에 오래 오래 간직하고 또 자신의 생애에 고상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분이 롯데에게만 그렇게 심취하지 말고 젊은 시절 예수에게도 그 처럼 심취했더라면 아마도 그의 인생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이 긍정적으로 발전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좋은 방면으로 이렇게 심취하고 몰입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평생 신학 연구를 하면서 특별히 예수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중에서 바르트가 연구한 기독론은 아주 권위가 있습니다. 바르트는 평생 2만 페이지의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 글 중에서 예수에 대해서 쓴 글만 만 페이지가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예수에 대해서 깊이 심취했으면 예수에 대해서만 만 페이지의 글을 써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예수에 미치듯 심취해서 일생을 연구하면서 살았다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헨델은 사복음서 가운데서도 유독 마가복음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고난 부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주제가 "수난받는 예수"입니다. 헨델은 예수님의 그 고난과 수난을 묵상하고 명상하는 동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헨델은 마음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을 하다가 애절한 마음을 글로 표현한 것이 아니고, 곡으로 신앙을 고백한 것이 그 감동적이고 웅장한 "메시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메시야라는 곡은 일반 음악가들이 어느 날 작곡해 낸 그런 곡이 아니고 이렇게 깊은 묵상 가운데 신앙고백적인 마음으로 작곡을 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작품이 얼마나 소중한 작품입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신앙인으로서 한번 집착해 보고 깊이 빠져 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이렇게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묵상해 보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애써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 신앙인으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이 이렇게 얄팍하고 미약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때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예수께 깊이 몰입해 있는가, 지금 내 인생에 예수께서 얼마만큼이나 깊이 들어와 계신가, 그리고 예수께서 지금 내 인생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만큼인가, 유사시 내 인생을 걸고 결단해야 할 때가 오면 나는 얼마나 단호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손해 볼 각오와 용기가 있는가!" 여러분은 이 같은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 때문에 오직 일념의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면에서 위대한 인생입니다. 그는 생전에 그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막1:7)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얼마나 일편단심 충성스러운 마음입니까? 여기 어디에 예수 말고 또 다른 것들이 끼어들 여백이나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렇게 오직 예수만을 위해서 살아갔던 일편단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 인생입니까?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 하면 이렇게 누군가에게 분명하게 소속되고 푹 빠지는 때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을 하면 상대방에게 이렇게 깊이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마음 가득하게 꽉 차 있습니다. 그때는 이 세상이 환하게 보입니다. 세상이 모두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은 기쁨이 있습니다. 연애를 못해 분들은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매여 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입니다. 얼마나 행복하면 이런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분이 지금 여러분의 생활 속에 얼마만큼이나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아무리 잘 살고 성공을 해도 그 인생에 예수가 없으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세례 요한 같은 유별난 인생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 사랑을 전하시고, 뜻을 이루시며, 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데는 이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님을 깊이 음미해 보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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