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오판! (마 27:19-26)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또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의 절기 가운데서 이 고난주간은 절기 중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고난주간은 그 의미가 깊습니다. 이 한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고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역사상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재판은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세기적인 재판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빌라도의 재판처럼 유명한 재판은 없습니다. 이 빌라도의 재판이 그렇게 유명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재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재판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심판한 재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 그 세상으로부터 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아마도 이 같은 재판은 이 세상에서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판입니다. 그래서 이 재판이 유명한 재판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재판 중에서 가장 큰 오판을 한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실수를 해도 보통 실수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실수에 의해서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2천년 동안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릴 때마다 오판한 빌라도를 고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 얼마나 큰 불명예입니까? 아마 두고 두고 자손 만대까지 예수님은 빌라도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고발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그만큼 책임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일신의 안일보다는 후대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그 시대에 무명인이나 필부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책임을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가 들었을 법한 세 가지 소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 재판에서 오판을 한 것은 그가 무지해서가 아니고 또 생각이 짧아서 오류를 범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 없음을 잘 알면서도 우유부단해서 오판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소리를 의식했던 것입니다.
1. 군중의 소리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세워 놓고 재판하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군중들은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빌라도가 재판을 하면서 이 성난 군중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유월절 명절에 죄수 한 명씩 특사로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인자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 군중의 소리에 빌라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맹점이고 허점입니다. 이 세상에 민주주의처럼 좋은 정치 체제는 없습니다. 최고의 이상을 지닌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나서 공산권에서도 민주화 열풍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군중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목소리가 큰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치체제입니다. 마땅히 다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공정하고 옳고 정당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다수 의견이라 해도 옳지 못한 주장일 때는 존중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밖에 모인 군중들은 살인자를 석방하고 그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어떻게 들어줍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 군중의 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성난 군중의 소리를 무시한다면 우선 자기의 자리가 위태로워집니다. 빌라도는 이 성난 군중을 안정시키고 관할하는 지역을 평정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빌라도에게는 이 군중들의 협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이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입니다. 정치인은 군중의 소리에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군중의 소리를 들어주면 죄 없는 예수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고민을 합니다. "자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의 무고한 생명을 지켜 줄 것인가."
여기서 빌라도는 심사숙고를 합니다. 그리고 이득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쪽으로 마음을 정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유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다가 빌라도는 결국 예수를 사형장으로 보내고 살인자 바라바를 석방시키는 데 동의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두고 두고 앞으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매주일 예수님은 빌라도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고 고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불명예입니까? 한 시대가 아니고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고발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식을 정치가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예로부터 정치를 하려면 두 얼굴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하는 말에는 신의가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모두 자신의 입지가 유리한 대로만 움직이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2. 양심의 소리입니다.
빌라도는 군중의 소리를 듣고 나서 마음을 정하면서 양심의 소리도 듣게 됩니다. 빌라도라고 양심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살되 정직하게 살라고 다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은 되지 못합니다. 양심은 때로 환경에 따라서 자신의 입지에 따라서 자꾸만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요16:2)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앞으로 양심의 타락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양심이 타락하는 시대가 무서운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암흑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왔습니다.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환영도 그냥 환영이 아니고 예수님을 왕으로 임금으로 맞이하며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노래를 부르면서 옷을 벗어서 땅에 깔고 그 위로 지나가시도록 하면서 환영을 했습니다. 이 같은 환영은 일찍이 없었던 특별한 의미를 갖는 환영이었습니다.
여기 군중들이 호산나 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환영했다는 것은 큰 뜻이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아람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한다는 말이고,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말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영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 유대인들의 소망과 신뢰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불과 2, 3일 후에 가서는 그 입으로 이번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여기서 두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는 성난 군중의 소리입니다. 군중의 소리는 터무니 없는 소리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군중의 도움이 없이는 정권 유지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성난 군중의 소리가 마음에 자꾸만 걸립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도 들었습니다. 군중의 요구는 있을 수 없는 요구입니다. 살인자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양심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요구입니다. 빌라도는 그런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요구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요구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고민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군중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양심을 지키자니 자리가 불안하고 자리를 지키자니 양심이 괴롭습니다. 빌라도의 고민은 이해가 갑니다. 얼마나 심각한 고민입니까? 장래 문제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상를 따를 것인지 현실을 따를 것인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양심을 버리고 군중의 소리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도록 내주고는 24절을 보니까 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으며 하는 말이 "나는 책임이 없다. 너희가 책임지라"하고 재판을 끝냅니다. 그렇게 해서 빌라도는 몇 년 더 권세에 자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양심을 버리고 오늘 현실만을 위해서 살아간 사람의 대표적 표본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상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현실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이 현실 위주로 살면 잠시 이득은 얻습니다. 그런데 그 대신 천국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내일을 잃어버립니다. 빌라도는 양심과 현실과의 싸움에서 현실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라도를 가리켜서 오판자, 현실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놓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빌라도가 결정적으로 실수한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군중의 소리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고도 무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도 무시한 것은 큰 실수입니다. 하나님은 빌라도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소리를 듣고도 무시해 버렸습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서 예수를 재판하고 있을 때 빌라도의 부인이 사람을 들여 보냅니다. 그리고 간밤에 꿈꾼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 내용이 "(마27:19)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부인이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께 손 대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빌라도는 아주 우둔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눈앞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환상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에게는 이런 환상이 없습니다. 미래의 비전이 없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빌라도의 부인에게 꿈을 통해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꿈 속에서 예수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 때문에 애를 많이 쓰는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이 남편을 향해 예수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꿈을 통해서 전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때 빌라도가 지각이 있는 사람 같았으면 그 말을 그렇게 무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양심의 소리도 무시하고, 군중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가도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들었으면 더 이상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그 음성을 들었더라면 빌라도는 큰 정치가로 남았을 것입니다. 두고 두고 후대에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지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소리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군중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현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민감하게 대처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 결과 빌라도는 씻을 수 없는 오판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습니다. 지금 빌라도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뼈아픈 통한의 후회를 하고 눈물짓고 있을지고 모릅니다.
문헌을 보면 빌라도는 군중들과 야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고는 그후 5년 더 재직하면서 그 자리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기원 35년에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요를 진정시키지 못해서 해임되어 로마의 소환을 받고 가서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도 별로 명예스럽지 못하게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부질없이 자리에 연연하다가 그만 이름만 더럽히고 명예만 더럽히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만 할 때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들도 세상에서 들려오는 별의별 소리를 다 듣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현재 들을 소리, 못 들을 소리, 들어서 솔깃한 소리, 들어서는 안 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들어야 할 소리에는 둔감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실수를 하고 나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려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은 들을 만한 관심과 뜻이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관심의 생활입니다. 저 높은 세계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그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곧 은혜가 충만한 생활입니다.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한번 마음으로 깊이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고난과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한 주간은 그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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