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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의 교훈! (마 5:1-12)

by 【고동엽】 2022. 1. 27.

산상수훈의 교훈! (마 5:1-12)


오늘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가리켜서 산상보훈이라고도 하고 산상수훈이라고도 합니다. 또 이 말씀을 팔복이라고도 부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뎌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셔서 이 여덟 가지 복을 가르치셨다고 해서 이를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들 가운데서도 이 산상보훈은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석으로 말하자면 다이아몬드와 같다고들 말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말씀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늘 탐독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깊은 뜻을 지닌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기존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그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1. 행복의 개념을 새롭게 놓으셨습니다.

 

사람은 모두 행복해지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최상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동서고금 할 것 없이 공통된 욕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참 묘합니다.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시대에 따라서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ㅅ브니다. 오늘 행복의 기준이 100년 후에도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는 또 달라집니다. 그래서 행복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행복의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세속인들이 말하는 행복이 다르고, 신앙인들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이 또 다릅니다. 세속인들이 말하는 행복은 재미있고, 쾌락적이고, 육감적인 것들이고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의 기준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것, 마음이 온유한 것, 애통한 것, 경건한 생활 등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참 재미없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속적들에게는 행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매력 없는 것들입니다.
얼마 전에 어렸을 때 함께 학교에 다니던 동창생들의 모임이 있어서 갔었습니다. 동창 가운데 목회자는 저 혼자뿐입니다. 친구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무슨 재미로 사니, 낙이 있ㄴ니 재미가 있니 놀 줄을 아니 도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고 묻습니다. 아마 그 친구들이 저를 볼 때 참 한심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심하게 살지 않아, 퍽 재미있게 살고 있어, 오히려 나는 자네들이 한심하게 보여." 그랬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를 못합니다. 내가 퍽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그 의미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 의미를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 다른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의 기준은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 불변하고 어느 시대, 어느 사람, 어느 민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정한 행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영원 불변하는 행복의 기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것이 1절에서 12절까지 나온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여덟 가지의 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을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여덟 개의 복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마음의 복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녹슬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누가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보이는 복을 말하고 만져지는 복을 말하고 화려한 복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잠시 후면 변해 버리기 쉬운 것들입니다.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극히 일시적입니다. 모두들 그것을 찾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많고 실패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교훈 중에 이 산상수훈이 가장 심오한 교훈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 속에서 강조하신 복이 바로 이 마음의 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여기서 가난은 영적인 마음의 가난을 말합니다. 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고 사모하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삶을 영적 가난한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그 마음에 은혜가 있겠습니까? 누가 그 마음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마음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복입니다.

여기 보면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애통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일반적인 애통이 있습니다. 사람이 배신당했을 때, 아들이 죽었을 때, 살아가다가 슬픔을 당했을 때 애통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애통입니다. 그때는 가슴이 찢어지고 숨막히는 애통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잃고 그렇게 애통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애통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애통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위한 애통도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보면서 슬퍼하는 애통입니다. 슬픔을 당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메마른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의 앙상한 모습을 보고, 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너무나 한심스러워서 자발적으로 애통하는 애통입니다. 얼마나 의식 있는 애통입니까?

그런가 하면 세상을 향한 애통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9:2) 내가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 고통이 뭐냐하면 내 동족이 예수를 믿지 않고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가족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내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내 부모가 예수를 믿지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어서 멸망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렇게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애통해 보셨습니까? 내 민족이 예수를 외면하고 그 뜻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면 밤잠이 오지 않는 그런 고통은 고사하고 내 가족이, 내 부모가, 내 자식이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면서 애통해 보시지 않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애통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통해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의 위로"입니다. 여기 "위로"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하늘의 "응답"입니다. 이렇게 애통해 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을 주신다고 했ㅅ브니다. 어떤 복이냐면 애통하는 마음에 응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산산수훈에서 복의 개념을 이렇께 정립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이 있는 복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마음의 뜻을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다음은 보상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보상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상 하면 모두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 하면 또 물질적이고 보이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기복신앙"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복을 너무 많이 기대합니다. 부흥회를 한번 했다 하면 복받으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그러면 또 신자들은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받으라는 말이 너무나 많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은 그렇게 받으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복을 받을 만한 생활이 뒷받칩되어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복을 받을 만한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별짓을 다 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리켜서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을 말할 때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복을 더 생각하면 그 신앙은 기복신앙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 신앙은 무속신앙의 차원을 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신앙은 유아적 신앙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복 자체를 더 중히 여기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 버는 일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주을을 소중히 지키는 일이 먼저인 것입니다.
또 복을 모두 물질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그 점을 바로잡아 주고 있습니다. 팔복을 보면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차세적인 복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생적인 것은 다루지도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보상의 법칙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보상입니까?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마음을 비우고 쾌락을 물리치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보상이 주어졌는가 하면 천국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얼마나 멋진 축복입니까? 이것 말고 더 소중한 복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보면 다 그런 식입니다. 의에 주린 자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충족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평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디에 잘 사는 것을 말하고 차세적인 인생을 말하고 화려한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복은 모두 이렇게 성경적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미래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래입니다. 미래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고상한 자본입니다. 미래가 없는 인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미래가 불투명하면 우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지극히 미래적인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미래만 있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미래에는 내세도 있어야 합니다. 이 내세는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생각 없이 살아가니까 그렇지 좀 조용히 앉아서 인생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고 종말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찔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세 문제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먹는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이 내세 문제입니다. 내세 문제만 해결되면 병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어도 그렇게 절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세의 문제가 시원스럽게 풀렸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중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봉착해 있는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제가 심방을 가면 그분들의 얼굴을 먼저 살피고 나서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물어 봅니다. "내세 문제는 준비되어 있습니까?" 얼나마 조심스런 질문입니까?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질문은 가장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건 다 준비되어 있어도 내세 문제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선 힘이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두렵고 떨립니다. 그래서 일부러 물어 보는 것입니다. "내세 문제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문제는 이미 다 끝내 놓았습니다." 얼마나 시원스러운 대답입니까? 그런 사람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문제만 준비되어 있으면 다음 차례는 아주 쉽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기서 복을 새롭게 정립해 놓으셨ㅅ브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자신 만만합니까?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천국이 훤히 보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지금 한창 뛰어가고 있는 마라톤 선수에게 골인 지점이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왜 중도에서 포기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말해서 천국이 있으니까 목회를 하고 예수를 믿고 살지 천국이 없다고 하면 예수 믿는 일이 별로 소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 없는 기독교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천국 없는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천국 없는 예수를 왜 믿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했습니다. 또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고 했습니다. 또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모든 복의 결론은 천국입니다.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천국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 없는 기독교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기독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천국이 없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없으니까 죽는 이야기만 나오면 불안하고 중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천국도 없고, 보상 기대도 없고, 사모함도 없이 싸늘하고 냉랭하고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마음에서 무슨 힘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모든 천국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에는 모두 이 천국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더 이상 무슨 아쉬운 것이 있습니까? 이것 말고 더 무슨 복이 필요합니까? 무슨 복이 더 주어져야만 만족하겠습니까? 이런 복을 놓아 두고 더 이상 무슨 복을 바라겠습니까?

주님은 이 산상수훈에서 우리들에게 이 같은 복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런 복을 받으라고 권유하고 계십니다. 이 진정한 복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복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가득 메우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복을 사모하는 사람이라야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사순절의 아침에 우리에게 주시는 이 축복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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