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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빚진 자! (롬 13:8)

by 【고동엽】 2022. 1. 27.

사랑에 빚진 자! (롬 13:8)

 


오늘 본문을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빚은 전도받은 일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일과 선교하는 일은 사랑의 빚을 갚는 일입니다. 먼저 된 사람은 나중 된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서 전하지 못하면 기도로, 관심으로, 물질로 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사랑의 빚을 갚는 일입니다.
선교는 이미 빚진 것을 갚는 일입니다. 우리는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이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전도를 받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선교사들을 세계로 내보내는 일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부터 110여 년 전에 이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선교 역사를 보면 열심 있는 선교사 몇 분이 이 땅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음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때 들어왔던 선교사들은 선교는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가재 도구를 모두 팔고 푼돈을 모아서 그 돈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와 선교를 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이미 중국에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중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간 것은 기원전 635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근세에 다시 글어간 것은 1799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 중국에 복음이 전파된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우리와 비교하면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도 아주 오래전에 들어갔습니다. 천주교의 대부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해는 이미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40년 전인 1846년입니다. 그는 중국에 건너가서 복음을 접하고 영세를 받고 신부가 된 사람입니다. 중국의 기독교 역사는 이렇게 깊습니다. 그러데 결과적으로 보면 중국 성교도 실패했습니다. 오늘 중국을 보십시오. 아마 중국이 그 당시에 복음을 받아들여서 전국적으로 이 복음이 전파되었더라면 오늘 중국의 모습은 지금과 같이 낙후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도 복음은 일찍이 들어갔습니다. 일본에는 1874년에 들어갔으니까 우리나라보다도 10년이나 먼저 들어간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즈음인 1885년경에 이미 일본은 내촌감삼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교도 실패했습니다. 지금 일본을 방문해 보십시오. 가는 곳마다 신사나 절간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십자가를 찾아보기는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올 당시 우리나라는 한창 기울어져 가는 구한말기로서 일본의 위협이 대단할 때였습니다.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독살 위협을 받고 한일합방 조짐이 강하게 일어날 때였습니다.
대원군은 일찍이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를 굉장히 괴롭혔습니다. 박해도 많이 했고 학살도 많이 했고 그래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고종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민비가 살해된 후로 고종은 독살 위협이 두려워서 누가 주는 음식도 마음 놓고 먹지를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가 언제 독살할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고종은 선교사들이 주는 음식만큼은 마음 놓고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했고, 그 아들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당시 우리나라는 참 어두운 실정이었습니다. 쇄국정책으로 우리나라는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서 밖의 소식이나 외국의 문물이나 문화는 전혀 접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일본은 일찍이 명치유신이라 해서 문호를 개방하고 신문화를 고감하게 받아들여서 현대화를 이루고 근대화를 위해서 진력할 때 우리나라는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되어갔겠습니까? 오늘의 북한 사회와 똑같은 형편이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그런 엄청난 개혁을 이루고 있는 사이에 우리 민족은 전근대적이고 미처 개화되지 못하여 술과 노름으로 한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갔고 분에 넘치는 제사 제도 때문에 패가한 가정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거기다 일본의 수탈과 압박은 더해 갔고 왕을 독살시켜 마침내 나라를 합방시키려는 음모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였습니다. 민중들은 문맹으로 우매했고 거기다 무속 신앙으로 속박되어 백성들은 모두 운명적인 신앙으로 자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되어갔겠습니까? 먹을 것이 있습니까, 입을 것이 있습니까, 땔 것이 있습니까, 거기 어디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까?

거기다 유교의 고답적인 권위주의로 여자들은 수난을 당하고 살았습니다. 남자들이 몇 명씩 첩을 얻어도 누구 하나 말을 못하고 살아갈 때였습니다. 그러니 그 사회가 얼마나 무력하고 우매하고 어두웠겠습니까? 그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엄청난 축복입니다. 축복도 이만저만한 축복이 아닙니다. 그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가 개혁되기 시작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문맹 퇴치입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몸부림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야학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먼저 한글을 가르쳐서 글을 깨우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비로소 인간으로서 눈을 뜨고 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습니다.
또 선교사들은 이 땅에 들어와서 학교를 세웠고 병원을 세웠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했습니다. 이때부터 미션스쿨이라는 것이 생겨습니다. 오늘의 연세대학, 이화대학, 숭실대학, 경신학교, 배제학교가 그때 생겼습니다. 그리고 고아원들이 설립되어서 구호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변화된 사회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백성들의 의식이 점점 깨어나기 시작하여 이것이 마침내 민족 의식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항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1운동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전국적인 연락망이라든가 조직망을 가진 단체는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3.1운동이 일어난 지역에 점을 찍고 교회가 있는 지역에 점을 찍어서 서로 겹쳐 보면 두 점이 아주 일치할 정도로 기독교의 항일 정신이 왕성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신문화, 즉 서양문화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오온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갓을 쓰고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니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양복으로 바꿔 입고 다녔습니다. 또 상투머리가 단발머리와 상고머리로 바뀌었고 짚신과 나막신이 구두로 바뀌었고 상놈과 백정들이 양반과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루고 현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겨우 100여 년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세계의 역사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모두 이렇게 개화되고 근대화를 이루고 선진국가로 변모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을 보면 거의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면 국민의식을 개조해 놓습니다.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고를 일신시켜 놓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구태의연한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 선진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기독교가 금지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나 봉건국가들을 보면 모두 21세기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와서도 우리나라의 3.40년대와 같이 구태의연한 때를 벗지 못하고 정신개혁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가 그렇고 멀리는 그만두고 저 북한 땅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디 변화가 있으며 변화의 조짐인들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도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그렇게 살았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는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진 나라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랑에 빚 외에는 빚을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너무나 많이 진 나라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21세기는 한국이 이 빚을 본격적으로 갚을 시기입니다. 지금도 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국에 나가서 그 빚을 갚고 있는데 앞으로는 더 많은 선교사들을 세계 여러 나라에 내보내서 이 복음의 빚을 갚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현재는 몇 나라를 제외하고 5,000여 명의 선교사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가면 북한을 포함하여 세계 전지역에 약 20,000명의 선교사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선교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앞으로 할 일이고 빚을 갚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남은 선교 지역은 선교하기가 아주 어려운 지역만 남았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서양의 선교사들이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서양인들은 세계의 나라들 가운데 선교하기가 그래도 좋은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의 씨를 열심히 뿌려 놓았습니다. 이제 남은 지역은 가서 선교하기가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오지들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선교사들이 가서 선교할 곳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렇게 남은 오지들이 모두 한꾸인들의 체질에는 아주 잘 맞는다는 점입니다. 한국인은 전천후 체질을 타고났습니다. 앞으로 21세기의 세계 선교는 한국이 맡아서 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한국인은 피부색이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피부색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그 중간색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기 때문에 중도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좋은 시대입니다. 피부색이 검든가 희면 양쪽으로부터 거부 반응이 나오기 쉽습니다. 흑인들에게는 백인이 거부 대상입니다. 그 동안 흑인들은 백인들로부터 너무나 천시를 받고 살았습니다. 무시를 받고 살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세월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은 굉장히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백인 선교사는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인들에게는 흑인이 거부 대상입니다. 사람 대우를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거부합니다. 학교에서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흑백 문제가 심각합니다. 서로 융합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흑인들도 백인들을 경멸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성모 마리아상도 흰색이 아니고 검은 색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만큼 이 두 인종은 서로 경멸의 대상입니다. 그런 관계이니 선교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민족은 피부색이 참 묘합니다. 그 두 사회에서 잘 적용할 수 있도록 피부색이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중간색입니다. 한국인은 그래서 이 시대의 융합을 이룰 수 있는 피부색을 타고났습니다. 앞으로 이 지구상에서 한국인의 역할이 굉장히 클 것입니다.
거기다 한국인은 체력이 아주 좋습니다. 한국인은 어려서부터 짜고 맵고 뜨겁고 찬 음식을 먹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은 일년 열두 달 동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춥고 더운 환경에도 잘 적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체질은 어느 나라에 가서도 잘 적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짠 음식을 먹는 나라에도, 매운 음식을 먹는 나라에도, 추운 나라에도 더운 나라에도 모두 적응될 수 있는 체질을 가진 민족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 민족이 전천후 체질을 타고났다고들 말합니다.
거기다 우리 민족은 고난을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가난도 경험해 보았습니다. 전란도 경험해 보았습니다. 압박도 경험해 보았고 혁명과 사회변혁도 모두 경험한 민족입니다. 또 거기다 무속신앙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의 무속신앙에도 익숙하게 잘 이해하고 견뎌낼 체질을 타고났습니다.

거기다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입니다. 한국인의 신앙은 유별날 만큼 열심히 있습니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나가서 전할 사람이 없으면 선교는 이루어지지 못할텐데 우리나라는 열심 있는 선교사 지망생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선교하러 가겠다고 준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건이 아무리 좋으면 무얼 합니까? 선교하러 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오지라도 가서 선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남자도 많지만 여자도 많고 특히 젊은 처녀들이 이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일입니까? 이것이 그냥 생각하고 넘겨 버릴 일입니까?

저는 이 점에 그냥 예사롭게 넘겨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서 이 같은 축복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고 이 민족에게서 이루어졌고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들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돈입니다. 선교비가 문제입니다. 선교 헌금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교사들을 내보낼 수가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직접 나거서 전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헌금으로 이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교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교회에서 매년 두세 사람씩 선교사를 파송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교회뿐이 아니고 개인들도 후원자가 되어서 한 분씩 선교 사역을 도와 세계로 세계로 내보내는 일에 앞장 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권사회에서 한 분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구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고, 기관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업인 선교회에서도 이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단체에서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8년 후 우리교회가 50주년이 되는 해에는 우리교회에서 후원하는 선교사가 50명 정도 파송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우리나라의 100년 전의 모습으로 우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 백성들은 100년 전 우리 민족들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들이 빚을 갚을 대상들입니다. 우리나라가 100년 전에 그렇게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복음을 뿌려서 오늘을 이룩한 것처럼, 그들에게 우리는 복음을 뿌려 주어야 하는 빚을 갚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런 교회가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복을 받는 신앙인들입니다. 이 일에 여러분들이 동참해 주셨으면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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