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저 낮은 곳으로! (마 3:13-17)

by 【고동엽】 2022. 1. 27.

저 낮은 곳으로! (마 3:13-17)


어떤 사람은 가까이에서 보아야 더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인데도 가까이에서 보면 참 부드럽고 재미있고 인간답고 아름답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가까이에서 사귈수록 더 친근해집니다. 그런 사람은 되도록 사람을 가까이에서 만나 사귀어야 유익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가까이에서 보면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인데 멀리서 보면 굉장히 아름답게 보이고 더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되도록 멀리서 사람들에게 잠깐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래야 그 좋은 인상과 멋이 오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되도록 가까이에서 봐야 더 좋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깊이 사귀어 연구하고 대면하면 더욱 친근하고 자상하고 인간적인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우선 친근감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말 한마디에 거리감을 느끼고 괴리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예수님은 참 인간적이고 고상하고 자상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참 모습인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셨던 모습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도 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인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요단강으로 내려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부터가 예수님은 참 인간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까?
지금 많은 분들이 세례를 하나의 형식이고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으려고들 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세례받는 것이 마치 체면에 손상이나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도 친히 요단강으로 내려가셔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세례가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이 요단강에 까지 가서 받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받은 세례의 힘이 성장한 후에도 늘 힘이 되어 주었다." 이 말은 어렸을 때는 세례가 그렇게 힘이 있는 것인 줄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보니까 어려서 받았던 그 세례가 두고 두고 힘이 되어 주었고 신앙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체험입니까? 이 한번의 체험이 평생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힘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요단강으로 내려가셨다는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를 보면 참 인간적이고 우리들에게 공감을 주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으로 내려오시는 예수께 요한이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 말은 "예수께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신이시고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빛의 그림자로서 그 빛을 증거할 사람이고 피조자이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찾아가야 한다면 요한이 예수께 찾아가야지 예수께서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주시오"하는 것은 순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요단강으로 내려가셔서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내려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리'는 "신앙생활은 내려가는 생활인데, 그것이 곧 올라가는 생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신앙생활은 역설의 생활입니다.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어야만 부활하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모두 역설적인 말씀들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고민이 많고 자주 갈등하고 다투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내기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이 내려가는 생활이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내려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쉽고 간단하게 풀릴텐데 내려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고민이 많아지고 내 속에서 자꾸만 불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는 한 교회뜰에 "소왈슨"이라는 사람이 만든 "예수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 밑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어느 여행객이 그 예수상이 하도 유명하다고 말해서 일부러 와 보았다고 합니다. 와서 그 동상을 직접 보았더니 유명하기는커녕 허무하리 만치 아무것도 아니더랍니다.
그래서 이 분이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뭐가 그리 유명하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안내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뻣뻣하게 서서 보면 이 조각상이 주는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동상은 가까이 가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아야 인자하신 주니미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은 그 인자하신 주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해'라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두마디가 연합해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under라는 말은 '아래'라는 뜻이고 stand라는 말은 '서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고 어떤 사물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렇게 상대방의 밑에서 올려다 보아야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바르게 하려고 하면 면밀하게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어떤 면에서 보면 내려가는 생활입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생활입니다. 신앙의 뜻은 말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생활이고, 신앙의 생활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때 비로소 신앙이 주는 신비스러운 힘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내려가셔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나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까?

 

둘째 의미는 죄인의 자리로 내려갔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라는 말은 헬라어로 '뱁티스마'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물로 씻는다"는 말입니다. 왜 씻는가 하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더러워졌기 때문에 몸을 씻고 마음을 씻고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누가 받는가 하면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죄인이 세례를 받고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세례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요단강으로 몰려 나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 받았는가 하면 자신을 볼 때 모두 죄인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인이다"하는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같은 예루살렘 사람들이라 해도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볼 때 "나는 죄인이다"하고 느끼는 사람들만 요단강으로 나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나는 죄인이다"라는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세례의 필요성을 모릅니다. 그래서 세례는 한갖 의식에 불과하다고 자꾸만 우깁니다. 아직도 죄인 됨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죄인이다"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어떻게 세례를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병상에서 세례받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건강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어느 날 병상에서 눕고 보니까 비로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좀 늦기는 했지만 소중한 깨달음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임종 직전에 가서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서, 임종의 자리에 누워서 생각해 보니까 비로소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깨달음입니까? 그래서더 이상 머뭇거리고 주저할 수가 없어서 병상에서, 임종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 고난이나 위기의 순간은 생각의 문이 열리는 시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깨달을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죄인인 내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죄인인 나는 그 말씀에 응답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영적 각성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변화의 생활이고 중생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으로 친히 내려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고 스스로 죄인의 틈에 끼어서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죄는 없으시지만 죄인의 틈에 끼어서 죄인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용단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친근감 있는 인간적인 모습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참 모습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권위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군림하고 자만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같은 것 받지 않아도 괜찮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흠도 없고 티도 없고 씻어낼 것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람들과 똑같이 요단강으로 내려가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데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지니는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하고 진부한 것입니까?

 

셋째 의미는 죽음의 자리로 내려감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원래 온몸을 강물에 침수시키는 예식입니다. 온몸을 송두리째 물속에 집어 넣었다 꺼냄으로 세례를 집행합니다. 그것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내 전신이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제 나는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물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이제 나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옴으로써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죄인의 자리로도 내려가셨습니다. 인간의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음의 자리로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내려가시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늘 물이 열렸다(16절)고 했습니다. 왜 문이 열렸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시려고 열은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서 왜 문을 엽니까? 그것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려고 여는 것입니다. 밖에 누가 왔을 때 사람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으면 문을 엽니다. 밖에 장사꾼이 왔습니다. 물건을 사 줄 마음이 있으면 문을 열게 됩니다. 밖에 걸인이 왔습니다. 그를 도와줄 마음이 있으면 문을 엽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시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16절)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절대로 맹수나 사자 같은 짐승에게는 내려 앉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양의 머리 위에서는 내려 앉는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에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린양을 의미하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7절)고 했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한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고 성부는 예수가 아들임을 입증해 주시고 성자 예수는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증명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증명은 하나님이 하시고 증거는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예루살렘 시민들도 많이 나아 있었을 것이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고 똑똑한 말씀으로 "예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명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분명한 증명은 없을 것입니다.
증명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증명이나 인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실력이 있다고 선전하고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실력은 남이 인정해 주어야 그 인정이 권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평가는 남들이 해주어야 그것이 진정한 평가입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의 아침에 내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피조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도 요단강으로 내려가고,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고,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증거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