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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위해 손해를! (마 2:13-18)

by 【고동엽】 2022. 1. 27.

주님 위해 손해를! (마 2:13-18)


오늘은 대강절 2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또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면서 아주 철저하게 수모를 받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아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부터가 수모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수모입니다. 신이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뜨거운 영접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이 먼저 죽이려 합니다. 본문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애굽으로 피하라"고 합니다. 헤롯이 군대를 풀어서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망명 생활입니다. 애굽으로 피신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영접은커녕 수모스럽고 수치스런 일을 당합니다.
그렇게 자란 예수님은 성장한 후에도 계속해서 수모를 당합니다. 같은 동족으로부터 견제를 받았고, 정치권으로부터 요인물로 경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족의 손에 의해서 죄인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피조물로부터 죽음을 당하여 땅에 묻힙니다. 아주 철저하게 수모를 당하셨고, 손해를 보셨고, 고난을 당하시고,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세상을 구원하시고 인간을 구하시려는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얼마나 숭고한 희생입니까? 우리들은 모두 이 같은 예수님의 수난의 대가로 구원을 받았고, 새 생명을 받아서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같은 은혜를 저버리고 살면 그것은 인간도 아닙니다. 저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이 같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과감하게 손해 보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일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수모당하신 것을 갚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손해 볼 것이 많습니다.

 

1.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손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우리는 시간을 손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내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손해 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한 시간 드리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고, 아까워하고, 주저주저하면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께 엎드려 "복을 주세요"하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시간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다.

 

2. 물질도 손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릅니다. 성경을 보면 "내게 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갈 때는 언제나 우리 손에는 제물이 들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자의 기본 자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주님 때문에 시간뿐 아니라, 때로는 물질도 손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고, 절약하고, 줄이고,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이 없고, 풍성하고, 넉넉하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물질 손해 보는 것을 기쁨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물질을 물 쓰듯하고, 자식을 위해서는 물질을 아낌없이 쓰고, 한 번 외식하는 데는 돈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그렇게 인색하고 아까워해서는 신앙 생활을 깊이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으로부터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제물을 주님께 드리는 데 손해 볼 용기와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권사님이 봉투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생활비에서 매월 조금씩 모아서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셔서 잘살고 있는데 선교비로 써 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또 김장을 해가지고 왔습니다. 멀리서 가지고 오는 바람에 비늘봉지가 터지기까지 그곳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정성껏 마련했다고 합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권사님이 살림이 넉넉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선한 뜻입니까?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기에 하고 싶은 것 다 미루고 먼저 뜻을 세운 일을 위해서 헌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진정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물질에 대해서 손해 볼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선용해야 할 시간이 지나고, 사용할 기회를 놓치면 비자금 사건같이 됩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많은 물질 왜 쓰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면 "쓰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런 대답은 주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세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봉변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비자금으로 밝혀진 돈 이 얼마였습니까? 5천억, 그 돈이 얼마입니까? 그 돈을 모으려면 5년 동안 매일같이 2억 7천 400만원씩 거둬 들여야 된다고 합니다. 5천억의 부피가 얼마나 되느냐 하면 1만원권 지폐를 차곡차곡 쌓으면 그 높이가 자그만치 5㎞나 된다고 합니다. 5㎞면 백두산 높이(2,750 )의 두 배이고, 63빌딩(264 )의 20배의 높이라고 합니다.
나를 위해서는 풍성하고, 아낌이 없고, 넉넉하고, 주님을 위해서는 인색하고, 좀스러우면 엉뚱한 데서 구멍이 뚫립니다. 그러면 한꺼번에 일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예수 때문이라면 물질도 재물도 손해 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런 삶을 책임지시고 때로 이 땅에서 손해 본 것을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출세도 손해 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익지향적인 시대라서 손해 보고 불이익당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심지어는 신앙인들도 신앙 때문에 직장에서, 사업에서 손해 보는 것을 아주 꺼려합니다. 당장의 이익 때문에 먼 미래와 창대한 장래를 간단하게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신앙 생활하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감춥니다. 당당하게 나타내지를 못합니다. 출세에 지장이 될까봐서 주일도 못 지키고 주일날도 꼬박 꼬박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 용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더 신임을 받고 출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출세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모세도 공주의 아들 됨에 만족하려 했다면 굳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민족과 함께하려고 했기에 40년 동안을 온갖 고생을 자초합니다. 이사야는 왕족 출신입니다. 그는 가만히 있어도 출세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하다 보니까 당시 집권 세력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나중에는 죽음을 당하는데 온몸이 반쪽으로 톱으로 켜져서 죽습니다.(사10:15)
세례 요한은 당시 현직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은 가만히 있어도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시 제사장이면 그 사회의 기득권자이고 고소득층입니다. 출세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 버립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그러고는 초라한 야인이 되어서 광야로 나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그 시대를 향해서 회개를 촉구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정말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언제나 이익만 챙기려고 하면 안 됩니다. 평안하려고만 해서도 안 됩니다. 불이익을 당할 각오도 좀 하고, 손해도 좀 볼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적어도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이라면 몰라도 그것이 예수님 때문이라면 출세도 좀 손해 보고, 성공도 좀 손해를 보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손해를 본 만큼 주님이 보상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직장의 상사들도 사실은 그런 신념과 용기와 의지가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믿어 줍니다. 겉으로는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소신 있게 살고 분명한 태도를 가진 사람을 비록 아래 사람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때로 출세도 손해 볼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4. 때로 잠도 손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때문이라면 잠도 손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용기가 없으면 평생 새벽기도 한번 못해 봅니다. 잠은 잘수록 늘어갑니다. 천성적으로 잠이 많은 사람은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부지런한 민족입니다. 이른 아침에 새소리에 잠을 때서 삽을 들고 아침 이슬을 떨구면서 논밭으로 나갔습니다. 옛부터 그렇게 부지런한 민족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새벽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새벽기도 시간을 주신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새벽기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동시에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운데 가장 큰 축복도 새벽기도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맑고 새롭고 신선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그 새벽 시간이 그렇게 좋고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인데도 힘들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주님 때문이라면 때로 새벽 잠도 손해를 볼 용기가 이어야 합니다. 나 때문이라면 몰라도 그것이 주님 때문이라면 단잠 아니라 온밤이라도 샐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신앙인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단잠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잠이라야 그것이 진정 단잠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상아 침대에 누워 자면 뭘 합니까? 거기에 단잠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매일 밤 불면증으로 시달리고, 잠 들었다 하면 온갖 사나운 꿈들로 밤새 시달린다면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잠은 주님이 주시는 잠을 자야 단 1시간을 자고 나도 그것이 잠입니다. 그런 잠을 잘 수 있어야 참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잠을 주무실분은 새벽기도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새벽기도 시간 때문에 손해가 많습니다. 정말 피곤한 날도 빠질 수가 없습니다. 좀 쉬고 싶어도 어떤 때는 타의에 의해서라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밤 일찍자야 되고 새벽 4시면 깨야 합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누우면 금방 잠이 오고, 잠들었다 하면 하찮은 꿈하나 없이 단숨에 4시까지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잡니다. 새벽에 잠을 깨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새벽기도를 나가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 때문이라면 잠도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때문이라면 몰라도 그것이 주님 때문이라면 물질도, 출세도,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손해를 볼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수모를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은혜를 안다면 손해 좀 보는 것 무엇이 그리 두렵고 아깝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주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주님을 위해서 다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포기했습니다. 명예도 출세도 포기했습니다. 취미도 안일도 심지어는 죽고 사는 문제까지도 다 추월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린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분명한 자세입니까? 그러니까 그의 인생이 그렇게 분명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강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두 주후면 우리는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우리도 그런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두를 손해 볼 각오가 있어야 하고,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만나면서 모두 은혜를 힙입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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