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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서 바울로! (행 9:1-9)

by 【고동엽】 2022. 1. 27.

사울에서 바울로! (행 9:1-9)

 


곤충의 세계를 보면 곤충들은 일생 동안 몇 번씩의 변화를 겪습니다. 처음에는 애벌레가 변화해서 곤충이 되고, 이 곤충이 다시 몇 번씩 껍질을 벗다가 나중에는 나방이가 되고, 나비가 되고, 매미가 되어서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곤충으로 변해서 하늘을 날아 다니는 신비스런 삶을 살아갑니다. 곤충들도 이렇게 변화하고 몇 번씩 거듭나는 동안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곤총뿐이 아니고 사람도 일생 동안 몇 번씩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도 그런 변화를 통해서 그 인생의 모습을 바꾸어 가며 한 단계씩 발전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변화, 이것이 바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원숙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 변화됨이 가장 좋은 사례에해당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남으로써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구한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변화되기 점만 해도 굉장한 야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공명심과 명예심도 대단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야심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구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사울"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어느 날 예수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에 굉장한 변화를 겪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뀝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인생은 어느 날 예수를 만남으로 인해서 그 인생이 엄청나게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사울이라는 사람의 인생의 변화를 보면서 본문이 주는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 사울은 적어도 세 단계의 변화를 거치면서 그의 인생이 마침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처음 그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거의가 다 자기 중심적인 인생으로 출발합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사울의 청년 시절을 보면 그는 세상에서 입신하기에 아주 좋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우선 환경이 좋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울의 고향은 "길리기아 다소(행21:39)"라고 했습니다. 당시 다소는 길리기야의 수도로서 동서양의 문물이 합류되는 지짐이었기 때문에 번화하고 화려한 큰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어려서부터 세계적으로 발전된 로마 문명의 영향을 듬뿍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사울은 문명의 영향도 받고 자랐습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은 헬라 문화였습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넓은 안목과 자유함과 사해동포적인 가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멀리는 헬라적으로 시원하게 탁 트였고 놀리적이었으며 세계로 열려진 오픈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사울이 아주 보수적인 신앙과 바리새적인 정통 신앙을 소지한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거기다 그는 자질이 아주 우수했습니다. 학문으로는 당대의 주류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아주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행 22:3) 그 결과 사울은 당시 정치, 문화, 종교 할 것 없이 다방면에 정통했고 거기다 번뜩이는 지성과 천재적인 학문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 같은 자질의 탁월성 때문에 사울은 자연스럽게 기성 세력들로부터 일찌감치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기성 세력들의 지시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것이 곧 자신이 입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또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사울은 만족해 했습니다. 그래서 기성 세력들이 경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조건 핍박했고 박해했고 증오심을 가지고 탄압하면서도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수치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그 곁에서 죽어 가는 광경을 보면서 연민의 웃음을 지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곧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청년 시절의 모습입니다. 이때가 사울의 "자기 중심적 시대"의 모습입니다. 오직 미래의 출세를 위해서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이런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모두 자기의 중심에 빠져서 충고도 조언도 무시하고 살아가는 때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면 거의가 자기 중심적입니다. 누구의 충고도 먹히지 않습니다. 간섭을 싫어합니다. 부모의 잔소리도 싫어합니다.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가리켜서 "자기 중심적인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을 위해서 미친 듯이 뛰어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느라고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 같은 생각이 깨지고 환상과 꿈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그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지점이 바로 사울이 바울 된 지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이 지점에서 깨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지존파라는 사람들이 지금은 사형을 당해서 죽었지만 한때 자기 환상 속에서 아주 무서운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릇된 자아를 가지고 세상을 증오하고, 사람들을 경멸하고, 그래서 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자신들의 그릇된 생각을 일깨워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자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탈출하거나 헤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감옥 속에 갇혀 있는 동안 몇 사람들로부터 집요한 전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서 생각도 하고, 반성도 하는 동안 그들은 그 무서운 그릇된 자아와 환상에서 비로소 깨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 신앙 속에서 꿈에서 깨어난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죽을 때 "나는 천국에 간다"하고 죽으면서 자신들의 몸을 바치고 죽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기 자아가 깨어지지 않으면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가치관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도 보면 신앙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핍박하고 증오하고 그럽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 판단에는 그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고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변화받지 못한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은 구원이나 천국 같은 것은 그에게는 전혀 필요없는 것들입니다. 천국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욕할 수 있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핍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적당히 무식할 때가 가장 용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그 그릇된 자아가 깨지고 그 틀 속에서 헤어나서 신앙의 세계를 비로소 알게 되면 그는 엄청난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되고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것이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때 하는 고백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여러분이 이 찬송을 부를 때 다른 찬송에 비해서 힙이 나고 느낌이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울이 그런 고정 관념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잡아가고 핍박하다가 다메섹이라는 언덕에서 비로소 예수를 만납니다. 그가 그렇게 핍박하고 증오하던 그 예수를 거기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지금까지 기지고 있던 그의 고정적인 자아, 고정 관념, 절대 신념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깨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곳에서 철두 철미하게 자신이 부서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 엄청난 변화에 충격을 받고는 3일 동안을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고 깨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울이 바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한 번씩 이렇게 부서지고 깨지는 전화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받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동안 깨졌습니다. 다윗은 아들로부터 쿠테타를 당하고 나서 엉겹결에 맨발로 머리를 풀고 울면서 시골로 피신해 도망 가는 동안 과거에 지은 죄를 피눈물로 회개하면서 부서지고 깨집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을 갇혀 있는 동안 환골 탈태의 회개를 통해서 철저하게 깨지고 거듭나게 됩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가출해서 방탕하다가 마침내 돼지 우리 안에 들어 앉아서 잠자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어 가며 눈물로 회개하는 동안 부서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본분을 망각하고 술과 호색과 연락을 즐기다가 마침내 눈이 빠진 채 맺돌을 돌리며 수모를 당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동안 깨집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깨지고 부서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새 인생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가나 이렇게 깨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깨져야 할 때 깨지지 않으면 자기 본위의 자아가 그대로 남아서 그 인생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이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철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깨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깨지지 않으니까 겉에서 보면 영락없는 그리스도인같이 보이는데 그속을 보면 여전히 사울 그대로 남아 있어 가지고 고집과 혈기와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있지만 가슴은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고 사울 그대로 남아 있어 열기가 없고 싸늘하게 식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가슴 속에서 무슨 힘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고, 고백다운 신앙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면 "예, 사대 성인 중 한 분이시지요"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하고 그럽니다.
깨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굳은 마음에서 생수가 나오고, 체면도 극복하게 되고, 자존심도 부서지게 되고 그래서 비로소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깨질 때는 완전히 깨져야 합니다. 깨지되 완전히 깨지지 않으면 얼마 못 가서 다시 내 속의 내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느 장로님이 양조장 근처를 지나다가 물씬 풍기는 막걸리 냄새를 맡고는 "참 기가 막히는군" 하더랍니다. 사람이 변해서 장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옛날 마시던 그 술냄새를 맡자마자 속에 가라앉아 있던 옛날의 내가 순간적으로 꿈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술냄새가 역겨운 것이 아니고 기가 막히게도 코를 찡하게 움직이게 했던 것입니다. 깨지된 완전히 깨지지 않으면 그 근성이 이렇게 속에서 살아 있다가 되살아 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 학생이 연필 깎는 칼로 옆의 학생을 찔렀습니다. 그러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책가방을 모조리 조사해서 칼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칼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우리식 교육입니다.
칼을 뺏으면 뭘 합니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칼말고도 뾰족한 컴퍼스도 있고 연필도 있고 볼팬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뿐입니까? 주먹도 있고 발도 있습니다. 문제는 칼이 아니고, 인간이 깨지고 마음이 깨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깨지고 부서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사울이 비로소 바울 된 것은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부서지고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폭군 같았던 사울이 변해서 양같이 양순한 전도자로 변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에 하나님은 사울을 전도자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이 과정을 저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깨짐으로 하나님이 그를 불러 이방 전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깨짐으로 하나님은 그를 니느웨로 보내서 구원의 소리를 외치게 하셨습니다. 탕자가 돼지 우리 안에서 깨짐으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피난 길에서 슬피 울며 철저하게 깨짐으로써 피난 길에서 회복되어 다시 용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다리가 부러지면서까지 철저하게 깨짐으로써 20년 동안 원수로 지내던 형과 화해를 하게 되었고, 남은 생애를 비로소 성자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지는 아픔을 겪는 동안 성숙해져서 하나님은 전과자인 그를 불러서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현주소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사울 그대로입니까? 예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예수는 사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종말이 온다고 하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우리들이 죽은 후에는 모두 천국에 간다는 사시를 확실히 믿습니까?
왜 그렇게 자신이 없고 믿음이 없습니까?
그것도 변화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깨지십시오. 주서지십시오. 그래야 사울이 바울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의 내용은 분명해지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시고 그때에야 우리는 세상을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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