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새벽 미명에! (막 1:35-39)
간혹 어떤 분들은 새벽기도를 왜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고생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것을 만들어 놔 가지고 오늘같이 바쁜 시대에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입니다. 참으로 새벽기도는 어렵고 힘들고 고된 일입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역시 이 새벽기도회가 목회 분야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하루의 생활을 새벽 미명에 산에 가셔서 기도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누구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한적한 산으로 가셔서 깊은 생각과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피곤하든 바쁘든 하루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산으로 가셔서 거기서 홀로 하나님을 만나서 묵상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마음을 정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새벽의 시간이 예수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하도 분주하고 삭막하다 보니까 사람이 이렇게 조용하게 앉아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 시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들이 없습니다. 모두 바쁘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고 정신적인 여유가 전혀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감정이 메마르고 마음들이 삭막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옛날에 비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자꾸만 악해지고 삭막해지고 포악해지는 것도 알고 보면 그 원인이 바로 이 같은 조용한 시간들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간들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화되지 못하고, 자꾸만 기계화되고, 황폐화되고, 짐승화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자꾸만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살고 피하여 도망가려고 하니까 많은 문제들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생활이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이렇게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다음과 같은 축복이 주어집니다.
먼저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이 어떤 고민이 있고 걱정이 있어서 새벽마다 산을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사에 가셔서 엎드려 있는 그 조용한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고 오늘 내가 할 일은 무엇이며 그리고 내일 내게 주어질 십자가를 어떻게 질 것인가를 예수님은 그 새벽 시간을 통해서 생각하고 다짐하면서 그 시간에 하나님과 대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대한 일을 앞에 두면 반드시 산을 찾아가셨습니다. 12제자를 선택하실 때 예수님은 먼저 산에 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내려와서 12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눅 6:12-1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중요한 질물을 하실 때도 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에 물으셨습니다.(눅 9:18) 또 베드로가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실 때도 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눅 22:32).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찾아가신 곳도 산이었습니다(눅 22:39).
본문 말씀도 처음으로 갈릴리 지역에 전도하려고 가시기 전에 먼저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떤 준비를 하실 때는 먼저 하나님과 내밀한 영적 교제를 통해서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이 실수를 하시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생각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요히 자신을 돌아다보면서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들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실수를 저지르고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도 살펴보면 모두 이런 시간들을 갖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남도 아닌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데 그 사라도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기 전에 잠시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번 걸려 내고 다스리고 조절했더라면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슴 속에 아무리 독하고 무서운 원한과 분노가 자리잡고 있어도 한번 더 생각하고 또 한번 더 생가해 보는 동안 얼마든지 조절할 수가 있을 것이고, 그 분노를 삭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런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 사람뿐이 아닙니다. 내일 또 어떤 사람이 똑같은 사건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오늘 사람들이 조용히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다보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이런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발생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라고 해서 그런 가능성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도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노와 원한과 증오를 효과적으로 다스리지를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다 볼 수 있는 묵상의 시간이 없이 살게 되면 그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이 있다고 하면 모두 이 고요한 시간들을 갖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 고요한 시간들을 통해서 자기의 우치를 한번 생각해 보고 한번 더 자신을 정리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이 이렇게까지 시끄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속해서 일어나는 실수나 사건들도 현저하게 적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침 일찍 날이 밝기도 전에 산을 찾아가 고요한 시간을 가졌던 것은 모두 이런 깊은 뜻을 생각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은 자신을 재확인하고 사명을 다시 자각하고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그리니 그 시간이 얼마나 진지한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이 고요한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또 정신적인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산을 찾아가서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사사로운 생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을 것이고, 민족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고 세상 구원에 대한 깊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 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안일과 행복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후에 십자가가 주어졌을 때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잘 감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이와 같은 고요한 시간들을 통해서 얻은 힘과 지혜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고요한 시간들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또 묵상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되면 먼저 정신적인 성숙이 주어집니다. 사람이 정신적인 성숙이 이루어지게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갈등이 많이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분노가 너무 많이 들어있고, 미움이 많이 들어 있고, 보기 싫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가슴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자니 세상살이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도 싫어지고 누굴 만나기도 싫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재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마음에서 像이 없어져 버립니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하고 또 어떤 상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들이 너무 탁해지고 욕망만 가득 들어 있기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서 저 높은 곳이 보이질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떠오르는 생각들이 모두 삭막하고 포악한 인간적인 생각들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일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아니 사람이 얼마나 마음에서 상이 흐려지고 눈이 가리워졌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몸에 칼을 댈 수가 있습니까?
요즘에는 제발 모두들 조용히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시끄럽습니다. 세상이 너무 요란스럽습니다. 음악도 들어 보면 요즘 음악은 왜 그리 요란합니까? 정신이 혼란스럽습니다. 정서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정서를 파괴하고 안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흥분 상태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는 음악은 모두 사탄적인 음악들입니다.
오늘 청소년들이 모두 그런 환경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자라고 있으니 무슨 정서에 도움을 줄 것입니까?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히 살면서 모두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 앉히고 차분하게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야 비로소 정신적인 성숙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성숙도 주어집니다.
사람이 진정 완숙해진 모습은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완성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도 산을 찾으셨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서 밤을 새워 가면서 몸부림 치는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새벽녘에 산을 내려오십니다.
산밑에는 가룟 유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때는 가장 신임했던 제자였는데 오늘은 배반자가 되어서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초연하게 유다를 맞이하십니다. 전혀 흥분하지 않고 마음의 동요조차 없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리만치 초연한 모습으로 말없이 이끌려 가십니다.
이것이 무슨 힘 때문입니까? 바로 이 영적인 힘이고, 영적인 능력 때문입니다. 그 힘이 뒷받침되어 주니까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초연해 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언제 보아도 힘이 없고 자신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슴이 너무 메말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가슴이 너무 가물고 메말라서 힘도 없고 용기도 없고 맛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힘도, 용기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메마른 땅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물어서 온 땅이 말라 가고 있습니다. 이 나무도 마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잎이 말라 가고 생명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고 태풍을 견디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영적 모습이 어떤지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영적인 모습은 지금 얼마나 건강하십니까?
쿼바디스의 작가 센케비치라는 사람이 흑암 속에 비취는 빛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미옹카라는 조각가가 조그만 동산 중턱에 오두막 집을 지어 놓고 작업장에서 일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꿈을 꾸는데 꿈 속에서 보니까 위로부터 환한 빛이 오두막 집에 내리 비칩니다.
그러더니 그 빛이 오두막 집의 지붕을 말아 올라가 버립니다. 지붕 없는 집안 모습이 보이는데 어떤 남자가 허름한 침대 위에 누워 있습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은 쩍 벌려져 있는데 마치 죽어 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이 보기에는 그 모습이 아주 비참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중얼거리기를 "세상에 저렇게 비참하게 생긴 사람도 다 있는가" 하고 말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돌아다보니까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꿈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 개관화시켜서 보여진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까지 비참한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보잘것없는 영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때로 교만하기도 하고 때로 자만하기도 하면서 큰 소리도 치고 남을 탓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수운 모습입니까?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자니까 힘이 들고 용기가 없고 기름이 말라 버린 기계가 힘겹게 소리내면서 돌아가는 것처럼 인생살이가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기독교인들에게 박해가 심할 때 어떤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예수 믿는다고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그 악명 높은 원형 극장에 이 모자가 내던져졌습니다. 저쪽에서 굶주린 사자 떼가 으르렁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으로 파고 들면서 무섭다고 웁니다. 그때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조용히 이야기해 줍니다. "아가야 잠시만 참아아, 곧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짐승들에게 찢겨져 죽습니다.
여러분, 이런 용기와 힘이 어디에서 나온 힘입니까? 그것이 바로 영적인 성숙함이 주는 힘이고 용기입니다. 주님은 이런 힘을 주로 새벽 미명에 산에 올라가셔서 얻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고요한 시간을 속에서 얻어진 힘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시끄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메마른 가슴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산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고요한 시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를 그리스도인으로 실수하지 않고 살 수 있고, 무력하게 살지 않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아침에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들을 통해서 이 같은 힘과 성숙한 영적인 축복을 힘입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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