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고민! (눅 22:39-46)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 동안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 옛날 2천년 전의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내일 월요일은 길 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을 보시고는 분노해서 대신 그 분노를 무화과나무에 쏟으십니다. 모레 화요일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비탄의 눈물을 짓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있으면 이 예루살렘 성도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요일은 안식하던 날입니다. 3년 동안 하루도 쉴 날이 없었는데 모처럼 이 하루를 제자들과 함께 안식하십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날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흥정을 합니다. 목요일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날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만찬을 마치고 난 후 예수님 일행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고독하게 밤새워 피땀을 흘리는 고민스런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금요일을 맞습니다. 그날은 고난을 받으신 날입니다. 밤새워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던 주님은 새벽 6시에 체포되어 빌라도의 법정에 섭니다. 그리고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여섯 시간 동안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러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그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깔립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다음날 토요일은 예수님이 무덤에 갇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날을 비애의 날이라고 합니다. 다음날은 주일날입니다. 주님은 주일날 아침 일찍이 보란 듯이 부활하십니다. 그날 아침은 아주 통쾌한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죽여서 땅속에 묻으면 그만일 것이라고 믿고 안도하고 있을 그 시간에 예수님은 소리 없이 부활해서 살아나십니다. 얼마나 신비한 기적입니까? 그래서 부활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중심 신앙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땅에 오셔서 3년이라는 아주 짧은 공생애의 기간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3년 동안이었지만 형용하기 어려울만큼 극심한 갈등과 고뇌스런 순간들을 몇 번 맞이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고난도 없고 고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고통과 고뇌를 느끼면서 고민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주간에 겪으신 몇 번의 아주 고민스런 순간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 대한 미련에서 오는 고뇌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지금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이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가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사람들이 옷을 벗어서 깔았습니다. 그리고 환호했습니다. 만세를 불렀습니다. 열광했습니다. 얼마나 고무되었겠습니까?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었다는 것은 송축을 의미합니다. 옛날부터 개선하는 장군들을 맞이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호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호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찍이 없었던 환대를 받아 가며 지금 당당하게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신 분인데 솔직한 심정으로 죽기는 싫었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나이가 지금 33세입니다. 이렇게 일찍 죽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문화 할 것없이 로마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살 때입니다. 백성들이 지금 압박을 당하고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실의에 빠진 백성들을 그냥 놔 두고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 지금 환호하면서 모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예루살렘 시내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12살만 되면 누구나 다 참석하는 명절인데, 옛날 기록에 의하면 보통 유월절 명절 때 제물로 바쳐진 양은 18만 6천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던 그 해 유월절 명절에 바쳐진 양은 25만 6천 5백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전인구가 350만 정도였으니까 한 가구당 양 한 마리씩만 바쳤다고 가정을 해도 그곳에 모인 사람의 수는 200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모여들었습니까? 그것은 그 시대가 희망이 없고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였기 때문에 설움받고 압박받는 백성들이 민족 명절을 통해 함께 모여서 민족적인 설움을 달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얼마나 기대를 가지고 환호를 했고 열광을 했겠습니까?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 생각이 어떻했겠습니까? 그들을 위해서라도 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떠받들고 있습니다. 지금 결단만 내리면 당장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의 앞날도 지켜 줄 수가 있고, 백성들의 마음도 위로해 줄 수가 있고, 더 나아가서 백성들의 숙원인 로마도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여기서 예수님도 굉장한 인간적인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고민입니다.
두 번째 주변의 실망감에서 오는 고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아침이면 체포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십니다. 만찬을 나누시던 도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하늘나라로 가야하리라"(요 13:3).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얼마나 의미 심장한 순간입니까? 드디어 제자들에게 임박한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때 제자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때 제자들은 숙연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침통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그 상황을 인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님이 이제 왕이 될 것을 기대하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리 자툼을 하고 있습니다.(눅 22:24).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바치는 환호를 보니까 이제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주님께 "호산나"를 외쳐 대며 환호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이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리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자리 때문에 가장 심각한 사람은 아마도 요한과 야고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신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타가 인정하는 수제자이니까 오른편 자리를 차지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남은 왼쪽 자리는 요한과 야고보 둘 중 한 사람이 차지하여야 할 것인데 이 두 사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의 경쟁이 너무 치열해지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중재에 나섭니다. 그 어머니는 한술 더 떠서 베드로를 제쳐 두고 내 아들 둘을 오른편에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합니다.(마 20:21). 예수님은 그때 참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주변의 몰이해가 그의 고뇌를 더 아프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침묵하고 계시던 예수님이 그들에게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이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겠느냐." 이 말은 "내가 지는 십자가를 너희가 질 수 있느냐"라는 뜻의 질문입니다. "제가 마시겠습니다(마20:22). 야고보는 그 잔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해했다면 그것이 포도주 잔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이 철 없는 제자들과 함께 그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밤이 얼마나 고뇌스러운 밤이었겠습ㄴ까?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12제자 중에서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해서 죽습니다. 그 잔의 의미를 알고 대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 그는 순교 제 1호를 기록했습니다.
그 밤 그 자리에는 문제의 인물 가룟 유다도 와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는 이미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이미 스승을 팔아 먹기로 작정을 한 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다를 다 이시고도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사실 고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를 사랑하되 누구보다도 가장 우선해서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고 했는데 아직 분명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짐작하건대 예수님은 12제자들 가운데서 누구의 발을 먼저 씻겨 주셨을 것 같습니까?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어 주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평소 사랑의 이론에 의하면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유다의 발을 먼저 씻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보개ㅣ 싫다고 해서 맨 나중에 씻겼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사랑의 이론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을 씻기고 나서 예수님이 유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느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참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한때 가장 신임했고 사랑했던 제자인데 그 제자의 비참한 운명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발을 씻기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예수님, 얼마나 그 고뇌가 컸겠습니까? 그럼에도 속 시원하게 "이 나쁜 놈아"하고 한마디 분을 내지 못하고 조용히 고뇌하시는 예수님, 얼마나 고뇌스러운 아픔입니까?
그러면 그것이 유다뿐입니까?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나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면서 맹세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불과 몇 시간 후에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주님은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을 사전에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탄스러운 밤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고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같은 변절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고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심성 속에도 그런 타락된 기질이나 욕망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유리할 때는 달라붙고 불리할 때는 멀어지려고 하는 그 간사함이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얼마든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제 가룟 유다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우리가 베드로처럼 순간적으로 표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런 주변의 실망스런 일들 때문에 그 고난이 더욱 컸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음의 고독함에서 오는 고뇌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 굉장히 고뇌하셨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을 했고 각오를 했는데도 예수님은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들을 몹시도 두려워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내일이면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의 시간을 미리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고문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들은 선고받는 순간부터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 간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각하면 그러겠습니까?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고 계셨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시간에 인간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그 밤에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올라가서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심정을 마태복음 26장에서 이렇게 토로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으로 더 고뇌스럽다는 말입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고 6시간 동안 매달려 있을 고통도 크지만 그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탄식한 말이 "내 마음이 고민스럽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 "괴로워 죽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후에 "목마르다"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를 표현하셨습니다. 수술해 보신 분들은 다 알 것이지만 수술 후에 가장 심한 고통은 수술한 자리가 아픈 것이 아니고 목마름입니다. 입술이 타 들어가는 갈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 물을 마시면 죽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런 갈증으로 입술이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는 부활의 아침이 오고 영광도 있고 또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죽는 일이 고되고 두렵고 고민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그런 인간의 한계 상황 앞에서 처절하게 고뇌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기도가 본문 42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말은 "십자가의 영광도 좋고 부활의 영광도 좋으나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고뇌가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난이 바로 이번 주간에 주님이 받으실 고난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같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헌혈도 하고 금식도 하면서 그 예수님의 고난을 되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마음 깊이 묵상하는 동안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과 심령 속에 주님의 십자가의 형상이 더욱 선명하게 새겨지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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