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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목회자(가나다순)

나의 설교 30년 고민(김청수 목사)

by 【고동엽】 2022. 2. 16.

나의 설교 30년 고민(김청수 목사)


목사의 설교에 대한 고민

목사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렵고 목회 평생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아마 설교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성도들에게 할 설교를 찾아 말씀을 전하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글은 설교에 대한 스터디가 아니라 30년도 넘게 설교를 해 온 내가 설교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웠던 일들을 기록했다. 순전히 내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혹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나와 같지 아니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하며 또한 성도들이 듣고자 하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이 점이 설교자하는 내게 크나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같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요. 성도들이 듣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언제나 같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시시 때때로 변하는 이런 양편의 요구를 어떻게 잘 조화시켜 설교하는가가 설교를 잘하고 못하는 핵심이라고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설교를 해야 하는 그 시간과 상황과 설교를 듣는 성도에게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한다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던지, 심방을 한다던지, 상담을 한다던지---등등 그리고 여러 목사님들에게 들은 특별한 방법등, 수 많은 방법을 동원해서 가장 적절한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이 일이 정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설교 때문에 늘 긴장하고 고민하고 어떤 때는 설교 시간이 두려워 지기도 했다. 나름대로 많이 준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방응이 신통하지 않을 때는 좌절하고, 준비가 안되어 강단에 올라 가 시간을 떼울 때는 정말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나는 정말 설교를 잘해서 내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성도들이 멍한 반응을 보일 때는 당황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이 고민은 언제나 나를 따라 다녔고 한시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기를 이런 고민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만일 목사가 설교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참된 목사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고민을 많이 하는 목사일수록 행복한 목사라고도 생각했다.

원칙적으로 하자면 성도들이나 인간사나 세상의 만사를 다 아시는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분명 있으실 것이며 그 말씀을 전할 대리자로 목사를 세우신 것인데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다른 말씀을 전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나 아닌 다른 목사들은 그 시간 그 상황에서 성도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 바로 전하고 있을까가 무척 궁금했지만 이런 문제를 함께 이야기할 동료가 없었으며 이상하게도 이 문제를 이야기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외면하는 많은 목사들을 만났다.

나의 또 하나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핑개로 오히려 성도들의 형편이나 기호에 따라 말씀 아닌 말을 적당하게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전할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 하나님의 원하시지 않는 아첨성 발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여 전하는 일이 없는가라는 것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였으며 신약의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백성들에게 전했는데 그들이 전한 맷세지는 대부분 죄인을 책망하는 것이였고 죄를 회개한 후에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위로와 용서의 약속이였고 그 위로의 말씀의 정점은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구원이였다. 그들은 이 말씀을 전하다가 온갖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했으며 그들이 전한 그 말씀을 들은 어떤 무리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해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나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만일 오늘 어떤 목사가 있어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 처럼 말씀을 전한다고 가정을 해 보자.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지------ 보지 않아도 그 결과가 너무나 명백한 일이 아닌가? 죄를 말할 수도 없고 더욱이 죄 짓는 사람들을 책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오늘의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죄를 이야기 할 수 없고 책망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우리 교회 안에 알려진 불의한 자들을 책망하기가 너무 어려워 포기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큰 잘못을 범한 자들도 그렇고 소소한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책망하기도 불가능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젊었을 때는 예배를 드리다가 잠을 자는 사람을 좋은 말로 타이르기도 하고 주일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나무랜 일도 있었으나 능력이 없고 힘이 없어 그런지 그들은 내 진심 어린 충고와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 보다는 기분이 나빠하고 인신 공격을 한다고 생각을 해서 결국 나를 핍박하는 무리들이 되어 버렸다. 이런 경험이 사실 많았다. 그런 일을 많이 경험하고 나니 잘못하고 있는 일을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나, 설교 가운데서나, 성경 공부하는 시간에도 가르치고 지도하기가 사실 어려워졌다.

우리 교회 안에 장로인 아버지를 노골적으로 미워하며 공박을 일삼는 집사 부부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불효막심한 집사 부부를 목사가 모른체 하는 것도 성도들에게 납득이 되는 일이 아니여서 하나님과 성도와 조인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민하는 것이 이만 저만 괴로운 것이아니였다.

성도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를 찾고 치유의 말씀을 들을려고만 한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 즉 전도, 기도, 헌신 등을 강조하고 나아가 순교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빈곤을 강조하고 죄를 책망한다면 그 목사는 틀림없이 끔직한 일을 당할 것이고 결국 교회를 사임하여야 할 것이라는 공포심이 내내 나를 따라 다녔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하나님을 속이고 나 지신을 속여 성도들이라는 사람들에게 아첨성 설교를 많이 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이 바라시지 아니하시는 아첨성 설교를 하고 있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라는 두려움이 또 다른 공포였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이런 일이 있을 것으로 간파하셨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의 형벌이 더 중할 것」이라고 하셨고 아첨하는 선지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거짓 선지자’라고 하셨다. 또 불의를 보고도 책망하지 않고 죄를 보고도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지어 저주를 받은 그 사람의 피 값을 대신 받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죄를 회개하라 말하고,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리라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선지자들을 ‘짓지 아니하는 개’라고도 하셨다. 그래서 나는 결국 거짓 선지자요, 죄인의 핏값을 대신 치루워야 하는 자요, 짓지 아니하는 개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늘 성도들의 조그마한 헌신과 희생과 노력에 대하여 과분한 칭찬과 온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엄청난 축복을 빌어 주기가 일수였다. 집을 새로 사 와 집들이를 하는 집사는 집들이 하는데 기십만원을 썻다. 그리고 우리가 입주 예배를 드릴 때는 기만원의 감사 헌금을 드렸다. 나는 그들을 위해 온 지구를 살만한 축복을 해야했다.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그 집사는 일년 내내 수천만원을 과외비로 지출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집사는 아이의 합격 감사 헌금을 몇 십만원 드렸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21세기를 책임질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21세기를 사람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인가? 역사를 책임지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기도를 해 주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축복인가를 생각하면서------ 안 할 수도 없고, 하기도 괴로운 일이 아닌가?

뭘 그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좋겠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몇 푼의 팁을 받기 위해 온갖 아양과 아첨을 떠는 기생과 같은 기분을 떨처 버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큰 축복 기도를 해 주어 감사하다면서 조그마한 선물을 줄 때는 통곡을 하고 싶었던 때가 많았다.

지금 우리 시대에 무슨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있는가? 누가 우리들에게 순교를 강요하는가? 100일 동안의 새벽 기도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에 있지도 않고, 누가 했다는 기록도 없는 아침 금식 기도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11조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늘 감사는 마땅이 해야할 우리들의 본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 엄청난 축복을 가져 올 것이라는 말은 누가 한 말인가?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니, 목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이 말을 강조해서 복을 빌어 주어야 하고 그렇게 심하게 반복하다 보니 복음이 아닌 것이 마치 복음인양 착각되여 오늘 교회에 대 유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점에서 어떤 목사 보다도 더 강조를 하고 더 많이 말했다고 고백한다.

나는 목회를 바르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모르지 않는다.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수없이 기도를 강조해서 말씀대로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목회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이 바른 목회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일어 나고 있는 사건들은 그렇게 목회하는 목사들의 노력이 얼마나 허탈한 노력이며 혼자만의 몸부림인가를 너무나 절실히 깨닭게 한다. 어디에서 말씀을 배웠으며, 무슨 말씀을 들었기에 죄를 짓고도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으며, 오히려 죄 의식도 없이 서로 하나님을 말하고 거짓 말을 일삼는 무리들이 있는지? 장로가 장로를 정죄하고 권사가 권사를 정죄하며 집사가 집사를 매도하고 목사가 사기를 치고------ 정말 안보고 안듣고 말하기 싫은 꼬라지가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연하고 있다.

내가 잘 아는 어떤 분이 결혼 상담소를 한다. 주로 재혼을 하게된 교인들을 상대하는 상담소인데 그만 두려고 한다. 그 이유는 서로 미팅을 하고 사귀는 가운데 그야말로 태반이 정말 목불인견의 비밀을 간진하고 있음이 들통 나기 때문이다. 여자를 사귀고 있으면서 재혼하려는 남자들들----- 여자들------그들은 장로요 권사요 집사들이 대부분이다.

서로 미팅을 하는 가운데 호텔에 가 잠을 자고 헤여지는 집사들----- 병든 아내를 놔 두고 자선 사업가인체 하며 여자와 하룻 밤을 즐기자고 거짓말을 하며 접근하는 서울의 모 큰 교회 장로------조그마한 구실만 있으면 집사를 쫓아 다니며 헌금을 해서 시골의 기도원을 도와 달라고 보체고 다니는 어떤 목사 -----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믿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보다는 믿지 아니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더 편하게 되어 버렸다고 했다.

내 친구 목사는 서울 서부역 근처에서 무료 급식 사업을 한다. 그 목사님의 아버지도 사회 사업가셨는데 정말 진실하고 정직하신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친구는 그 일을 아주 기쁨으로 감당한다. 그런데 그 친구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도움을 받고 자원 봉사자들이 왔지. 그러나 지금은 교인들을 상대하지 않아. 교인들은 작은 일을하고 자기 낯을 낼려고 온갖 짓을 다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깨끗해. 바라는 것이 없고 요구하는 것이 없단 말이야. 교인들, 왜 그런지 모르겠어.」

오늘 우리 성도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서도 상을 받을려고 하고, 하나님이나 교회를 위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지 아니하면서도 엄청난 희생을 한 것으로 자기를 미화하고 침소봉대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고 목사의 설교를 자기 입맛에 맞게만 요구한다. 그리고 목사는 그들의 요구에 맞게 설교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바라시는 말씀의 전달자가 아니라 성도들의 기호에 맞추어 말씀을 꾸며대는 아첨군들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요즈음의 목사들의 고민은 성도들이 듣기에 좋은 말씀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에 있다. 나도 목회를 하면 할수록 그렇게 타락해 갔다. 먹고 살기도 해야하고 아이들 공부도 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누구 보다도 거룩하고 진실한체 해야 하는 외식에 대한 고민이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목사의 설교가 교회의 부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설교가 교회를 성장시키는가? 몇 해전 설교 무크지에서는 성장하는 교회 목사의 설교는 오로지 ‘치유적인 설교’라고 했다. 회개를 촉구한 설교, 교리적인 설교, 교육적인 설교, 전도나 기도나 또는 헌금 등, 성도들에게 부담이 되고 짐을 지우는 설교를 하는 교회는 결단코 성장하지 않는다는게 무크지의 통계였다.

오늘의 성도들이 무슨 상처를 그리도 많이 받아서 맨 날 치유하는 설교만 들을 려고 하는가? 그들은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화려하게 꾸미고 교회를 찾아 온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일이며, 더 넓은 집을 사고 , 더 좋은 차를 사는 것이다. 땅과 집값이 오르고, 사 놓은 증권이 올라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장사가 잘되고, 지위가 더 높아져 남들의 존경을 받고 싶어한다. 그들은 아이들이 좋은 학교만 들어 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많은 돈을 쓸 수가 있으며, 남편이 승진만 할 수있다면 얼마던지 뇌물을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설교는 치유적인 설교를 들을려고 한다. 그렇게 세상을 살려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며 물질적인 손해를 보아야 하는가? 그러니 밖에서 받은 상처를 교회에서 치료 받아야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밤낮 그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성도들에게 치유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 많이 연구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을 위한 헌신도, 그리스도를 의한 아픔도, 성도들을 위한 희생도,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희생도 하지 않는다. 세상을 위한 빛도 아니고 소금도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와 가족들만 위해 산다. 그들이 세상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들을 위한 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를 강요한다.

이런 틈세에 사는 목사들 또한 이상하게 변해 간다. 목사들은 좋은 자동차를 타고 해외 여행을 뻔질나게 하며 성도들의 그런 식의 아픔과 수고를 정말 넉넉히 위로해 주고 어떤 구실을 붙여서든지 하늘 만큼, 땅만큼 축복을 빌어 주며 으리 으리한 성전과 당회실과 존경과 공경하는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을 거느리는 목사가 성공한 목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이면 해외 여행 가자는 말이 나오고, 어떤 유력자- 돈이 많다던지, 지위가 높다던지, 세상적인 조건이 남달이 좋은 사람이 자기 교회에 나오는 것을 자랑한다. 목사들이 성도들의 비위를 마추는 방법 중에 또 한가지가 있다. 성도들을 대리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봄에 한차례 여름에 한차례, 그리고 겨울에도 간다. 리무진 버스를 대절해서 온천으로 여행을 간다. 가면서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목욕하고------ 그러면서 집안에 갇쳐만 사는 구역장들과 권찰들의 그 동안 싸인 스트레스를 푼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니 이제는 단체로 해외 여행을 떠난다. 그런 일을 잘하는 목사가 목회를 잘하는 목사가 되어 간다. 외화가 어떻고 IMF가 어떻고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지 아니한가?

요즈음 목사들이 기도원을 가는 것은 쉬로 가는 것이지 기도하려 가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목회를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요구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이 목회를 잘하는 목사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목회가 너무 피곤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간다 하고 하룻 밤에 몇 만원씩을 지불하는 조용하고 아늑한 호텔식 기도원을 찾아 가 홀로 쉬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내가 기도원에 와 있으니 성도들이 나를 기도 많이 하는 목사로 존경해 줄 것이다’라고 착각을 한다. 성도들이 목사가 다니는 기도원이 어떤 기도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른체 말이다.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죄인의 가슴을 치게 하는 설교가 나올 수가 있을 것인가? 나도 사실 여기서 말하는 목사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써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많았고 성도들 앞에서는 공포심이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내가 우리 교회에서 한달 동안 전도하자는 설교를 하고 기도하자는 연속 설교를 한 일이 있었다. 교회를 개척했으니 교회가 살 수 있는 것이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랬는데 남편은 변호사요, 아내는 유명 대학 음대 성악과를 나와 우리 교회 성가대의 소프라노 리더였던 집사 부부가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떠나면서 한 달동안 골치 아픈 설교만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 없어 편한 교회를 찾아 간다고 했다. 그들이 찾아 간 교회는 우리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큰 교회였다.

나는 그들이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으며, 한 달 동안 그런 설교를 한 것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기도하고 전도하자는 설교를 하고 난 다음 후회하는 목사가 무슨 바로된 목사이겠는가?

나는 지금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 죄를 짓고 사는 것을 보면서도, 알면서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요구가 무엇인지 깨닭으면서도 얼굴에 기름이 번질거리며 중형이나, 대형 자동차를 안타면 축에 못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목사들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정상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타락한 이 시대의 상징물인가?

설교적 입장에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있는 목사는 세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지 곧대로 전하다가 목회를 못하게된 고지식한 목사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되 그 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성도들의 기호에 맞게 설교를 해 서 교회를 크게 잘 하는 목사가 있으며,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 사이에 어물 어물 고민을 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줏대없 는 목사가 있다.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를 그대로 전하고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중생한 성도들이 많은 교회를 섬기는 행복이 내게는 큰 소원 이였으나 그것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다.

목사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어야 하며 그 설교를 하는 목사는 그리스도의 피에 흥건히 젓은 경험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그리스도께 회개하고 돌아 온 성도가 많았던 것처럼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

교회가 아니라도 세상 어디에 가던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도덕적인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말하는 비 성서적인 설교, 하나님께서 불러 앉쳐 놓으신 그 시간 그 자리에 온 성도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기를 원하지 않는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자신있게 전하는 잘못된 멧세지, 중세의 카도릭 교회처럼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선포되는 위장된 거짓 설교, 양심의 가책을 이기기 위해 억지를 부리며 더욱 큰 소리로 외처되는 외식된 설교, 터무니 없이 과장되고 포장되 있어도 내용은 한가지도 없는 허구에 불과한 설교, 성도들이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는 독백적인 설교, 아첨이 가득찬 비열하기 그지 없는 설교, 하나님의 축복권을 통체로 전세 얻은 축복의 전권대사인양 축복을 남발하는 자칭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말하는 설교 아닌 말, 말, 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강단에서 수도 없이 남발되고 그 값싼 설교 아닌 설교에 성도들은 심령이 병들어 하나님을 위해 무슨 큰 일을 한 것처럼 착각하는 과대 망상증 환자들을 되어 가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아니한다고 해서 원망과 시비가 가득찬 원한 맺친 사람들이 되어 간다.

죄를 회개하라 하지 아니하니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회개할 줄을 모른다. 그런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듣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죄인은 없고 오로지 축복을 받아야할 축복 받은 죄인들만 가득하게 되어 버렸다.

설교를 잘하려면 우선 성경 말씀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성경을 잘 알기 위해서는 다윗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하면서 성경을 많이 읽고 깊이 읽어야 하며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한다.
교파만 보수주의요. 학교만 보수주의 학교를 나왔으면 성경을 잘못 이해해서 잘못 가르치고 심하면 이단들이나 하는 그런 말을 해도 보수적인 설교, 성경적인 설교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목사들에게나 성도들에게 다반사로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잘못 가르치고 설교를 했음에도 잘못을 알지도 못한다. 잘못 해석하여 잘못 가르치고 설교했다는 것을 알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며 성도들에게 사과나 용서를 빌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결국 실력 없는 목사요 무식한 목사가 되어 교회에서 쫓겨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성경에 무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공부는 단순히 주석을 가지고 설교에 참고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신학책을 인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설교를 인용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성령의 가르치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바울이 스스로를 사도라고한 것은 그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지 못했으나 삼층천의 체험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른 기도를 많이 하고 깊이 하고 뜨겁게 해야한다. 1970년대의 한국 교회는 정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어떤 사람은 60년대의 300만 성도가 70년대에 와 1,000만 성도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 여의도와 도처에서 C.C.C를 비릇한 「빌 그래험」 목사의 대 집회로 인한 영향이라고들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른 일리가 있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70년대의 한국 목사들은 반드시 거처야 하는 특별한 난 코스가 있었는데 그것은 장기 금식이였다. 20일이나 40일 금식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목회를 할 수 없으며, 설교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40일 금식 기도를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도 하고 세 번도 했다.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사모들도 했으며 심지어 어떤 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식들까지도 금식을 시켰다. 그야말로 금식 대 유행의 계절이였다. 기도원마다 금식 기도하는 목사들로 가득차고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은혜를 받기 위한 기도 운동이 활발해서 청계산 기도원이나 지금은 패허가 되다 싶이한 동두천의 미디안 기도원도 기도하려 온 목사들과 평신도들로 만원이 되어 미리 예약을 해야 방을 잡을 수 있었고 한얼산 기도원도 사람이 너무 많아 목사들도 거처를 평신도와 함께 해야 했다.

나도 동두천의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를 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기도하던 그 때 함께 장기 금식 기도를 하는 목사들이 무려 30여명이나 되었으며 태반이 개척 교회를 하는 목사들이 였다. 그 중에는 채력이 약해서 금식 기도중에 피를 토하는 사람이 허다하고 살점을 베여 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 도중에 그만 두기도 하는 목사들이 있었는데, 도중에 금식을 그만 둔 목사들은 무슨 큰 잘못이나 범한 사람인양 피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또 회개를 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목사들의 입을 통해 선포된 말씀들은 죄인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이고 주님을 위해 죽기로 각오한 성도들이 되게 했다. 그런 결과로 우리 한국의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때 그 기도 운동은 모두 어디를 갔는가? 지금의 목사들은 그런 의지도 없고 그런 열정도 없이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해서 성지 순례를 하고 해외 여행을 해 볼까라고 생각하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모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나 기도를 통한 신령한 체험과 은혜 받은 이야기가 아닌 여행과 여행 중에 얻은 재미 있었던 일들을 화두로 삼는 목사들을 수없이 만난다.

말씀을 바로 전하되 그 말씀이 성도들을 회개케 하고 그리스도의 사람되게 하는 말씀의 선초가 없이 어떻게 교회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문제로 평생 고민을 했다. 하나님께 원하시는 말씀과 성도들이 듣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살았다.

목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 할수록 그런 고민이 더욱 심각해졌다. 어떤 때는 목회를 못해도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하고 힘있게 성경을 고지 곧대로 선포하면 얼마 못되여 성도들의 괴로워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성도들에게 듣기 좋은 말씀만 골라 하면 내 심령이 괴로워 견딜 수 없는 설교의 갈등을 벗지 못했다.

나는 이런 갈등을 해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되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생활도 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을 받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고 했으나 도무지 그런 힘이 부족했다. 지리산에 친구와 함께 올라가 100일이 넘도록 기도도 해 보고 그렇게 유행했던 시절의 금식도 해 보고, 성경을 수 없이 읽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사람 마음을 휘여 잡은 기술을 배워 보고자 했으며 공부가 부족한가 싶어 다시 10년 이상이나 다시 공부를 했고 누구처럼 여행을 안해 견문이 좁은가 싶어 미국 전역을 여행해 보기도 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사단은 어떻게 역사하여 성도들을 타락케 하고 교회를 패허화 하고 있는가?

아담에게 나타 난 사단은 뱀의 모습이였으며 그는 ‘보는 것’과 ‘먹는 것’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아담 일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다.
구약에서는 그런 짓을 거짓된 선지자들을 통해 자행했으며,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단의 하수인들이 였다. 그들은 지배욕과 탐욕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을 중상 모략하여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물리치셨으며 처처 곳곳에 아름답고 거룩한 교회를 세우도록 사도들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다.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죽도록 충성하여 초대 교회를 세웠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를 사단은 다른 방법으로 유혹하여 타락 시켰는데 초대 교회 때는 각종 이단들을 동원했고, 중세 때는 카도릭 교회를 통해 그 짓을 자행했다.

카도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교리를 앞세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각가지 추한 짓을 했으며 이를 보다 못한 칼뱅을 비릇한 종교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세우기를 해서 오늘의 우리 교회가 있게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에 와 사단은 어떻게 교회를 시험하고 황패케 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 시대에 나타난 사단의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다. 1950-60대는 종말론적인 사단의 역사가 극심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는 이단들이 난무했다. 그들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따르기도 했으며 그야말로 구룸처럼 많은 그들의 추종자가 있었다. 그들은 과천에도 있었고 삼각산에도 있었고 용문산에도 있었고 도시 한 중심에도 있었다.

1970년대에 와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기도 운동이 맹렬이 일어 나면서 그들의 모습은 잠잠해 지는 기미가 보였다. 그러나 사단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였다. 70년대가 지나고 바햐흐로 우리 나라가 선진국를 바라 보는 기점에서 사단은 교회를 세속화 시키는 간교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유혹을 시작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잘 살기 운동에 동참을 했다.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고 잘 살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누가 나무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때의 잘 살기 운동은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것도 아닌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강조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국가적 잘 살기 운동에 크게 고무되여 많은 돈을 벌기위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정신적인 문화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물질 문명의 풍요로움만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고, 도덕도 없고 풍요로운 물질적인 삶만 제일이 였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 벼락 부자가 많이 생기고 그 시대에 생겨 난 벼락 부자들이 몰락하는 것을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다.

이런 새태를 사단이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도 덩달아 잘 살기 운동에 맹렬한 기세로 뛰여 들었다. 목사들의 설교는 잘 살기 위한 방법으로 일관되고 세속적 축복을 받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데 집중이 되었으며 그런 가르침과 말씀의 선포가 있는 교회들이 경의할만한 속도로 성장을 했다. (여기서 말한 성장은 교인 수가 많아 지고 헌금이 많아지고 교회당을 어마 어마하게 크게 짓는 그런 보이는 풍요로움을 말한다.)

교회의 진실한 성장을 그런 것에서 찾아 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와서는 교회의 성장을 모두 그런 외형적인 발전에 국한 시켜 해석을 한다. 정말 잘못된 교회 성정의 정의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본 목사들은 한결같이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야망에 빠졌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따라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성도들을 잘 살게 하는 목사’가 되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행태가 벌어졌다.

교회를 성장 시키기 위해 연애인들을 불러다가 그들의 하잘 것 없는 가식과 거짓된 간증을 듣게하고(물른 모든 연예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처처 곳곳에서 교회 성장 세마나가 쉴세없이 열리고 있었으며, 귀신 잘 쫓아 낸다는 목사의 특별 강의와 훈련은 그것이 이단성을 가졌던 아니던 상관이 없이 대 성황을 이루웠으며 엄청나게 교회를 성장시킨 목사의 목회를 배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목사들이 구름 떼처럼 움직였다.

그런 세미나 가운데 정말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를 잘 섬기는 바른 교육을 실시한 세미나가 많았다. 그럴지라도 내가 수 없이 많이 다닌 교회 성장 세미나에서는 참된 하나님의 종으로 교회 성장 세미나를 개최하는 목사들의 세미나 내용은 대게 지금의 그들과 교회의 모습을 강의했지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 앞에 연단을 받았는가는 언급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큰 교회 성장을 꿈꾸며 엄청나게 큰 교회 목사의 성장 세미나를 쫓아 다니는 개척 교회의 목사인 나는 정말 그들의 교회 자랑에 쓸쓸하고 허전한 죄괴감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형편에서 많은 목사들이 목회를 잘하는 목사들의 노력과 수고와 말씀의 해박한 지식과 헌신에 대한 내용은 접어 두고,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실한 목사의 모습을 발견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목회의 방법(테크닉)’을 배우기 위해 동분 서주하는 그런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그대로 선포하고 - 이 점에 있어서 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 그들의 행정과 재정 운영과 심지어 목소리까지 흉내를 내고 싶어했다.

나는 그렇게 해서 교회를 크게 잘하는 목사들도 안다.
그런 그들의 목회을 배워 실천하므로써 효과를 본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릇한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목사들이 그들의 흉내를 내다가 수년씩 목회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해야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젊은 목사가 목회를 잘 하시는 유명한 목사를 찾아 가 「목사님! 어떻게 교회를 설립하셔서 2년도 안되 이렇게 큰 교회를 하실 수가 있는지 방법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 유명한 목사는 그 젊고 패기 만만한 목사를 한참이나 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가르쳐 드리지요. 지금 우리 교회는 설립한지 2년이 되었지만, 내가 목사가 된지는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말하자면 내가 목회를 20년 하기 전에 우리 아버님께서 60년도 더 넘게 하나님께 충성하셨고,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50년이 넘게 하나님께 충성하신 장로였습니다. 그 분들의 기도와 충성심을 모두 함하면 햇수로만도 140년이 넘는데 우리 교회는 2년된 교회가 아니라 140년만에 이렇게 성장한 140년된 교회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뿌리지 않고 거두고자 하는 목사들, 인스탄트 식품처럼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목사들, 그래서 엄청난 일을 한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목사들, 이런 목사들의 야망과 야심과 터부니 없는 착각을 부추기는 3년만에 1,000명이 모이고 10년만에 5,000명이 모인다는 식으로 자기 선전을 하는 목사들과 교회들-------- 그들의 나타난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한 교회의 목사에게는 그 분들 이전에 그 분들이 거두도록 씨를 심으신 어떤 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으니 모두 함께 즐거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3년씩이나 전도를 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설교에 그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했고 사도들의 교회가 성장을 한 것이지 단슨히 사도들만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뿌리신 것을 사도들이 거둔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 않는데서 거두시지 않으시고 심은대로 거두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를 과대 선전하는 목사들이 교회를 타락시키는 사단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사단은 교회를 세속적 잘 살기 운동을 하는 매체로 전락시켜 버렸다. 성경적으로 볼 때 축복이라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는가에 따라 측량되고 저울질 되어야 한다. 많은 것을 받고, 높은 대접을 받으며, 다른 사람의 위에 앉아 지배하는 것을 주님은 축복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런 자리에 있을 때 타락하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셨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과 엄청난 부를 생각하기 쉽지만, 아브라함은 많은 자식을 두지 않았다. 오직 이삭 한사람을 낳아 길렀을 뿐이며 다른 아들 때문에 무척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는 엄청난 부자가 아니였다. 그는 움막에서 살았으며 따지고 보면 양을 치는 유목민의 족장으로 살았을 뿐이다. 지금 누가 아브라함 정도의 축복을 기대하겠는가? 지금 누가 아브라함 보다 축복을 덜 받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그런 계념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가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선택된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을 말하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의 충성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리는 것이였고 그 드림의 축복의 결정은 이삭을 재물로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진실한 하나님의 축복의 계념은 하나님께 무엇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진실되게 헌신하고 죽도록 충성한데서 찾아야 한다. 즉 좋은 것을 드리고, 많은 것을 드리고, 생명이나 몸까지 드리고, 자식도 드리는 참된 헌신이 진실한 축복인 것이다. 우리들의 요리 문답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지 않는가? 사람의 제일된 본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축도록 충성하는 헌신이다.

그런데 이런 축복의 계념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오로지 세속적인 계념의 축복만이 남아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나 가르침이나 모두 이 점에 강조점이 맞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사단의 장난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단이 아담을 유혹하던 유혹이 무엇인가? 오늘 세상이 교회와 성도와 목사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과학적인 발전도, 산업의 발전도, 학문도, 거기다 교회도 모두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며, 지배하고 나아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에덴 동산에서 사단이 저질렀던 엄청난 도전을 하나님을 향해 하고 있다면 교회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워 드릴 수가 있을까?

우리 목사된 자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오늘 교회를 넘어 뜨리려는 사단의 세속적 유혹에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인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도록 하는 일을 책임진 하나님의 종들이 깨여 나야한다.

초대 교회로 돌아 가자는 말을 함브로 할 시기가 아니다. 초대 교회는 부자가 되기 위해 축복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죽기로 말씀을 지키고 순종했던 사람들의 교회였다. 차라리 초대 교회가 아니라도 70년대의 한국 교회로 돌아 가자고 하는 것이 더 낮지 아니한가?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것이다.

우리 목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많은 고뇌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면 무슨 소리가 날까? 그리고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당한 목사가 있던가???????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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