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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 (고후 5:13-17)

by 【고동엽】 2022. 1. 26.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3-17)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방법이 있다면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성령의 매개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중매하시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찬송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성경을 보고 연구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는 조국의 앞날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다가 각각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주석을 쓰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웨슬리는 성경연구를 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경우는 모두 성령의 매개로 하나님을 만난 경우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성례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례전은 세례와 성찬을 합해서 성례전이라고 말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들이 주님을 생각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서로 나눌 때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없이 성의 없게 성찬을 받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오늘 세례를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세례를 받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말할 때는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의 그 광경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문이 열렸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강림했고 동시에 음성이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서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그때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이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 재현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물로 씻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죄로 너무 더렵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받는 것입니다. 그 의식이 곧 세례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어린아이를 하나 입양하려면 아이를 데려다가 그냥 살지 않습니다. 아이가 더럽고 추해서 그냥 데리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깨끗하게 씻깁니다.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사다 입히고 또 새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런 후 데려다 집에서 함께 삽니다. 그것이 입양 절차입니다.
옛 문헌을 보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여자들을 잡아 갔습니다. 당시는 우리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항거도 못했습니다 여자들을 데려다가 몇 년씩 살다가 다시 돌려 보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환향녀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돌아올 還, 시골 鄕, 계집 女를 써서 "돌아온 여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바람난 여자를 환향녀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돌아와서 반갑기는 했는데 이미 여인들이 부정해졌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돌아왔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것이 환향녀들을 모두 세검정으로 데리고 가서 깨끗한 물로 몸을 씻기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기는 의식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들을 그렇게 씻긴 후에 비로소 용서를 했고 용납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곧바로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무악재 고개를 넘어서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모두 고개 넘어에서 함께 모여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동네 이름을 홍재동이라고 했습니다. 홍제동은 클 弘, 건널 濟, 마을 洞인데, 그 말의 뜻은 "크게 인심을 써서 구제받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한 동네"라는 뜻입니다. 홍제동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네입니다.
세례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씻어서 새 사람을 만들어 자녀로 용납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너무나 더러워졌습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다 더러워졌습니다. 전에는 우리들이 모두 환향녀들이었습니다. 그런 생태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로 씻기는 것입니다 씻는 후에 비로소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느 아들"이라 인치시고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씻긴다는 뜻과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는 "담근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례는 나의 존존재를 물 속에 담근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익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세례는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물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죽은 내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의 나는 물에 빠져 죽었고,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모두 이미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옛날의 나는 이미 죽었고 오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오한 뜻이 있습니까?

이렇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무엇인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남다른 각오와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음의 몇 가지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부터 나는 주님과 함께 산다"는 각오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알기 전에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내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았다" 이말은 "이제부터 나는 내 마음대로 살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는 예수와 함께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제 나도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이런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엄밀히 말하자면 십자가의 삶은 그렇게 기쁘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십자가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보다 훨씬 더 험악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요세푸스라는 역사가는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 살던 유다라는 사람이 로마를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로마의 마리우스 장군이 군사를 동원해서 무력 진압하여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결과 로마는 그 반란자들을 엄벌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 2천 명을 무작위로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 2천 명을 잡아다가 길거리에 십자가를 일렬로 세워 놓고는 거기다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메달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며칠이고 볼 수 있도록 그냥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갈릴리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때 그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 몸서리쳐지는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나를 좇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미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나도 그 십자가를 지고 살겠다"는 각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얼마나 세례의 의미가 깊습니까? 이런 세례를 그냥 남들이 받으니까 나도 받고 신앙 고백도 없이 하나의 의식으로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세례를 받는 데는 이런 각오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각오는 "나는 이제부터 온전한 신앙인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과는 그 책임감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우선 책임감이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그리고 정신부터가 다릅니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나는 어렸을 때 받았던 그 세례 때문에 훗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쩌다 신앙의 길에서 떠나 살아도 마음 중심 속에서 언제나 신앙의 뿌리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 뿌리가 그 사람을 놓아 주지를 않습니다. 평생 동안 긴장하게 해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세례의 힘입니다. 그래서 세례받은 사람은 책임감이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얼마나 좋은 힘입니까? 알고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의 의미 속에는 "이제부터는 나는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도 들어 있습니다. 그 동안 신앙으 변두리에서 오락 가락하던 사람들도 세례를 받게 되면 적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밖에 있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회피하던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구경하던 사람이 참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이것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신앙인의 성장 모습이고 성장 과정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나는 이제부터 변화된 삶을 살겠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세례가 뭐냐 하면 물에 빠져 죽는 장례 의식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나의 새 삶을 축하받는 축제 의식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다시 살아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의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식도 변화해야 합니다. 생각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살아가는 방법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13절에서 "미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은 곧 "내가 예수께 미쳤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 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신앙인으로서 소신 있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예수께 미쳤다"고 했습니다.
예수에 미치되 건전하게 미치기만 하면 참 좋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모든 것이 일절 바뀝니다. 그러면 얼마나 세상 살기가 편한지 모릅니다. 예수 때문에 고민이나 갈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그렇게 행복해 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부모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아들보다 딸이 좋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인정 많고 효성스럽던 딸도 일단 결혼을 해서 시집을 가기만 하면 하루 사이에 완전히 변해 버립니다. 언제 그렇게 달라지는지 친정을 곧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친정에 한 번 오기만 하면 절대로 그냥 가지 않습니다. 값이 있고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라도 더 집어 가려고 애를 씁니다. 얼마나 많은 변화입니까?
그런데 그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시집간 딸은 그렇게 변해야 합니다. 마음도 변하고 정신도 변하고 의식도 시댁 중심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 변화는 마음이 이를테면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 없이 시집살이를 잘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만 친정을 자주 찾아오고, 와서는 가기를 싫어하고 시댁 흉이나 보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아직도 변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시집살이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조그만 서운한 말 한마디도 문제가 됩니다. 그 말 한마디를 소화해 내지를 못합니다. 아직 변화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께 대해서 진정으로 연합이 되고 하나가 되면 이 세상의 문제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때문에 욕을 먹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살다가 실패를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살다가 죽을 일이 생겨도 그것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는 있다" 이 만남이 바로 인간을 변화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연합이 되고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 세상의 문제들은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세상의 일들 때문에 고심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만나야 할 분을 아직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어야 할 것들이 변화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옛날 세례받을 때의 그 감격을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정말 진정한 변화의 삶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새 삶이 주어져서 여러분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와 축복과 능력과 세 생활이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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