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없는 나사로! (눅 16:19-25)
여러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조사 통계를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시하는 것을 세 가지로 꼽았는데 첫째가 건강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65%였습니다. 건강은 자본 중의 자본입니다. 모두를 얻고서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둘째로는 행복한 가정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60%였습니다. 가정 평화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경제를 들었는데 응답한 사람이 51%였습니다. 이 세가지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식이 아주 건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인들은 무엇을 가장 우선해서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았더니 그들이 첫 번째로 꼽은 것도 역시 건강이었습니다 모두 58%였습니다. 두 번째는 좋은 직업을 들었는데 49%였습니다. 세 번쩨가 행복한 가정으로 45%를 들었습니다. 흔히 미국인들을 황금 만능의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미국 사회는 건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이렇게 지극히 기본이 되는 삶의 자본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은 최소한의 삶을 조화 있게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만이라도 상실하거나 부족하게 되면 사람들은 용기를 잃게 되고 의기 소침하게 되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평이 많은 사람을 보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 정도는 없거나 아주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의 가정에 어느 정도 평안이 있고, 또 조그만 집이라도 지니고 살고 있고, 그곳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건강하게 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다 주어졌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그 정도의 환경이라면 최상의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한이 없습니다. 욕심입니다. 거기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우선 가난한 사람입니다. 거지라고 했습니다. 거기다 건강도 없었습니다. 병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병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온몸에 부스러기가 나서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심각한 병입니다.
거기다 가족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남의 집 문전에서 먹다 남은 부스러기를 억어 먹고 살아가는 처량한 인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고독했겠습니까? 이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입니다. 아주 지독하리만치 불운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쯤 되면 할 말이 참 많을 것입니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흔히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자학하고 탓하고 운명을 저주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마구 학대하고 욕하고 증오하고 그럴 것입니다. 오죽이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욥도 자식들을 잃고 재산도 잃고 건강도 상실한 후에 얼마나 자기의 생일날을 저주합니까? 욥기서 3장을 보면 온갖 어두운 마음으로 자신의 생일날을 저주하기를 "그날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더라면, 나를 밴 태가 저주를 받았더라면, 나를 받는 사람이 엎어 놓았더라면"하고 저주합니다.
그런데 여기 나사로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오죽 할 말이 많을텐데도 말 한마디가 없습니다.
또 "부모에게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먼저 부모 탓을 많이 합니다. 조상 탓도 많이 하고, 환경 탓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이 탓하는 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유산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부모가 무능한 것에 대해서 유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 탓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나사로라는 사람은 부모 탓을 하자면 누구보다도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탓을 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이 없습니다. 탓이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여전히 조용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과 다른 점입니다.
또 "세상을 향해서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가난하게 되면 성격이 이상해집니다. 괜히 부자들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좋은 집을 보면 이상한 마음이 들어옵니다. 저 집이 폭삭 무너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좋은 차를 보아도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돌로 긋고 지나갑니다. 흠집을 내놓습니다. 침을 뱉고 지나갑니다. 요즘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런 행위들이 모두 이 같은 심리에서 나온 자학적인 행동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말을하자면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부자는 매일같이 연락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여기 "연락"이라는 말은 매일같이 잔치를 베풀며 즐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부자는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고 매일같이 호화롭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자기 돈 가지고 즐기며 살아가는 데 죄 될 것은 없지만 그집 문간에서 그런 모습을 매일같이 보며 빌어 먹고 사는 나사로가 볼 때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 나사로는 말이 없습니다. 침묵만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천국에 가서도" 말이 없습니다. 그는 죽어서 낙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어서 음부로 갔습니다. 나사로가 낙원에 가서 가만히 보니까 음부로 간 부자가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목말라 죽게 생겼으니 나사로를 보내서 물 좀 마시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나사로가 지켜 보고 있습니다. 그때 나사로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지금의 입장은 세상에 있을 때와는 정반대 입장입니다. 그때 나사로의 입에서 말 한마디 쯤은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도 말이 없습니다. 나사로는 끝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오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너무 탓을 많이 하고, 원망을 많이 하고, 불평을 많이 합니다. 우리들이 나사로보다 형편이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두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사로의 모습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말이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을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등의 그런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사로는 왜 그런 환경에서 살았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 잘이겨 낼 수 있었겠습니까? 거기에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 인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 나의 인생 속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다"는 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직면하고도 시험에 들지 않고, 그 환경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이겨 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상담학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상담자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 먼저 그에게 거룩한 것에 대한 경외심이나 세상에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어떤 대상이 있느가를 먼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부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그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경외심이라든가 세상에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어떤 대상 조차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큰 문제 앞에서 그 문제를 극복할 수도 없고, 치료를 받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섭리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왜 하필이면 예수를 배반하는 일에 재자인 유다가 끼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사람들 보기에 참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배반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왜 하필이면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문제를 아주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성경에 보면 그렇게 예언되어 있지 않느냐.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다"(행 1:16)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 말을 듣고 나서 비로소 가룟 유다 사건을 마음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좀 창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말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시편 73편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거기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73: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시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시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73: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왜 악인이 세상에서 형통하는가, 그리고 왜 악한 사람이 죽을 때도 곤히 죽는가, 나는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실족할 뻔했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다윗뿐만이 아니고 우리들도 가지는 의문입니다. 왜 악인이 세상에서 잘살아야 합니까? 악인은 망해야 하고 실패해야 하는데 악인은 돈도 잘 벌고 사업도 흥하고 죽을 때도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데 보면 편안하게 죽습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가 하는 의심마져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갖는 의문이고 다윗이 가졌던 의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의문을 이렇게 해결합니다. "(시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의문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문을 시원스럽게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 보기 전에는 그 이유를 몰라서 스스로 놀라고 스스로 시험받고 불평도 했는데,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다가 풀 길 없는 숱한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그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풀려고 하고 성경으로 풀려고 해야지, 괜히 내 생각의 범주 안에서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때로 사람들이 낙심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무조건 안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일이 아니고,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다는 또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피난을 갈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따라오면서 지독하게 저주를 할 때 다윗은 그 말을 하나님이 그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랬기에 그 순간을 초연하게 이겨 낼 수가 있었습니다.
욥은 건강을 잃고, 자식도 잃고, 재물도 모두 잃었을 대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가져 가시는 것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찬송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도 형들에게 팔려서 남의 나라에 가서 원치 않는 종살이를 했지만 자신이 그곳에 온 것은 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먼저 그곳으로 보내신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 섭리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그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고 지혜롭게 극복해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나사로라는 사람은 할 말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불평을 하자면 누구보다도 실감 나게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망을 하고 탄식을 하자면 누구보다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섭리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이 처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없이는 이렇게 될 수가 없다는 섭리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그 환경을 조용히 수용하면서 말없이 그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후에 나사로가 죽어서 낙원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안식을 그곳에서 누리며 보상을 받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궁극적인 문제들 속에는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또 일이 잘될 때도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만, 반대로 일이 잘 안 될 때도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신앙인은 그런 섭리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의 손길을 목격하게 되고 체험하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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