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저버리지 말라! (히 10:19-25)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순전히 희생당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제물 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제물 되심으로써 모두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인생을 그분을 위해서 살고, 모여 예배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찬송으로 영광을 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이 같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잇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열심히 모여 예배하는 것도 그 한 가지 방법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를 보면 이 모이는 일이 자꾸만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모두들 모이는 것을 귀찮아 합니다. 겨우 주일날 한 번 모여 예배드리면 그것으로 할 일 다한 것처럼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풍조는 시대가 가면 갈수록 더 확산될 것 같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들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모여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사모하는 그런 마음들이 전과 같지가 않습니다. 부활절도 자꾸만 형식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기다림도 없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글을 통해서 성도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히10:23)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히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모이기를 싫어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이 너무 분주해서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왠일인지 분주합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분주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생활이 분주하고 마음에 여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생활에서 조용히 앉아 생각하고 묵상하는 그런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일날 한 시간 드리는 것도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왔다가도 예배가 끝나면 금방 돌아가 버립니다. 뭐가 그리들 바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활이 번잡하고 분주하면 신앙 생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선 정신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생활에서 우선 순위가 분명하게 정해져야 합니다.
분주하게 살아가다가도 예배드리는 날이 되면 다 놓아 두고 나의 주님이신 예수께 나아가 엎드려 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오늘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배하고 묵상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이것을 생활에서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받은 바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두 번째는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 가장 큰 적이 있다면 그것은 "형식주의"입니다. 이 형식주의는 신앙인들에게서 진지한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눈물도 빼앗아 갑니다. 순수함도 빼앗아 갑니다.
우리들이 처음 신앙 생활할 때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그때 얼마나 기쁨이 있었고, 얼마나 열심히 있었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가슴에 그런 감격이 얼마나 남아 있고, 그때의 기쁨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그때 그 열심히 다 어디에 갔습니까?
그것은 신앙이 그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격도 사라지고, 눈물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열심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형식만 남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앙은 지극히 형식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형식주의라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가장 경건한 교회는 개혁교회입니다. 이 개혁교회는 아주 거창한 신앙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기도하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얼마나 믿음이 좋아 보입니까?
그러면서 주일날 축구 경기가 열리면 이것 때문에 야단입니다. 중요한 경기는 모두 주일날 열립니다. 경기를 보고는 싶고 그렇다고 교회에 빠질 수는 없고 그래서 신자들이 한 가지 방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모두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집사 한 사람이 밖에서 찬 안에 앉아 가지고 경기 중계를 듣다가 A팀이 한 골 넣으면 "빵"하고 경적을 한 번 울려 주고 B팀이 한 골 넣으면 "빵빵"하고 경적을 두 번 울려 줍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사람들이 설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 눈감고 궁금한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빵"하고 경적이 한 번 울리면 "아, 지금 A팀이 한 골 넣었구나"하며 상상을 하고 앉아 있습니다.
평소 가장 경건한 체하는 교단이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얼마나 형식에 빠져 있습니까?
그래서 신앙 생활에서 가장 큰 적은 이 형식주의 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기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세 번째는 안일주의 때문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형식화 되면 곧바로 안일함에 빠지게 됩니다. 주일이 돌아와도 전혀 준비가 없습니다. 토요일 날은 밤늦게까지 놀고 TV 보고 그리고 늦게 잡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예배 시간이 가까워 오면 고민이 많아집니다. "교회에 가야 되느냐, 아니면 계속 잠을 자야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교회에 가야지"하고 일어나려고 하면 온 몸이 천근 만금입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면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고, 허둥대며 뛰어 교회에 와 보면 예배는 중간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뒷자리에 와서 살짝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돌아가 버리는 그 발걸음에서 무슨 뜻을 발견하고 무슨 영적인 깊이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구속해 주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에게 드리는 예배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사실 예배는 떨리는 마음으로 드려야 할 소중한 시간입니다. 예배는 주님이 피흘리심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구속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영적인 헌신의 시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내가 새 생명받은 것을 감사하며 드리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시간을 어떻게 간단하게 해치워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앞으로 시대가 가면 갈수록 이 같은 모습은 더할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TV에 빠져서 주일날고 잊어버리고 살 것입니다. 만화, 영화, 오락에 빠져서 주일날은 아마 등을 떠밀어도 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주일이 되면 잠을 자거나 산으로 강으로 재미를 찾아서 모두 나가 버리고 없을 것입니다.
이제 불원간에 주 이틀 휴무제가 정착될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더 심하게 안일주의에 빠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가면 갈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풍조는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그 신앙이 모두 "개념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에 대해서 중심 있는 어떤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중심 있게 세워지는데 그것이 없으니까 신앙이 힘도 없고 뿌리도 없어서 오늘 같은 세상에서도 너무나 간단하게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이렇게 개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머리로, 생각으로, 지식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신앙 생활을 사변적으로 합니다.
칸트는 신앙 생활을 해도 사변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도덕적인 개념으로서의 예수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말했습니다. 사랑도 연애도 결혼도 머리로 하고 사변적으로 해야지 몸으로 하면 저급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애인이 있었는데도 끝내 머리로 사랑하다가 결혼을 못했습니다.
사변적인 사랑이나 신앙은 멋은 있는지 모르지만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 생활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편의와 환경에 따라서 너무 쉽게 좌우되기 쉽습니다. 사람이 이런 상태로 신앙 생활을 하면 어느 시점에 가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는 속수 무책입니다. 그때는 멋이 어려움에서 구해 주지 않습니다. 사변적인 신앙은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를 못합니다.
그때는 평소에 유치하게 생각되고 고리 타분하게 생각될 만큼 순전하고 구체적인 신앙만이 나에게 힘이 되어 주고, 능력이 되어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길이 되어 줍니다.
옛날 얘깁니다. 학자 세 사람이 조그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 유식한 학자 셋이 노를 젓는 뱃사공을 보니까 참 무식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중 한 사람이 뱃사공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천문학을 아시오?" "나는 무식해서 모릅니다." 그러자 이 학자는 말했습니다. "당신 세상을 헛살았구먼" 하고 멸시하듯 사공을 쳐다보았습니다.
또 한 사람의 학자가 물었습니다. "당신 철학을 아시오?" "나는 무식해서 모릅니다." 그러자 그가 말합니다. "당신 뭣 때문에 살고 있소?" 그러면서 조소했습니다.
세 번째 학자가 또 물었습니다. "당신 생물학을 아시오?" "모릅니다." 이 세 학자는 자신들이 학자 됨을 스스로 즐기면서 그 무식한 사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강풍이 불어왔습니다. 배가 흔들리더니 그만 뒤집혔습니다. 모두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살려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때 사공은 아주 여유 있게 헤엄쳐서 물가로 나와서는 세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수영할 줄 아시오?" 그러자 세 학자는 똑같이 말합니다. "할 줄 모릅니다. 살려 주시오."
그때 사공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세상 헛살았구먼, 그 나이에 수영도 할 줄 모르다니. 그렇다면 당신들의 인생은 끝장이오." 그러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물에 빠지면 수영이 최고입니다. 그때는 철학도, 천문학도, 생물학도 모두 그 다음입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가슴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사변적으로 막연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서 무슨 힘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다가 물에 빠지게 되면 속수 무책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말로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적으로는 참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더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점쟁이들을 가장 많이 찾아가는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운명이 불안해서 점을 본 사람이 30%나 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결혼할 때 궁합을 본 사람도 13.1%나 되고, 기타 물방개 점, 컴퓨터 점, 반지 점을 쳐 본 사람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무려 77%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미래가 왠지 불안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예수님이 내 가슴 속에까지 들어오시도록 초청하지 못하고 머리 속에서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물에 한번 빠져 보십시오. 속수 무책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 고백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으로 고백되어질 때 비로소 거기서 신앙이 주는 힘이 솟아 나오고, 능력이 주어지고, 나의 운명과 미래를 모두 그분에게 맡기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시대가 아무리 번잡하고 형식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신앙 중심을 지키고 받은 바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아가도 주님께 예배하는 생활이 내 생활 중에서 우선 순위 제1순위가 되도록 목표를 세워 놓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인생을 주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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