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진리로 예배하라
본문: 요 4:23-24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예배하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늘 예배하는 우리로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예배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익숙해졌지만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인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배를 노래로 비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노래라면 영은 멜로디이고 진리는 가사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불러지려면 멜로디와 가사가 다 필요합니다. 만약 노래의 가사만 들었다면 아직 노래를 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멜로디만 들었다 하더라도 역시 노래를 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능력 있는 노래와 같습니다. 그 노래에는 멜로디가 있고 가사가 있습니다. 멜로디는 영이신 주님의 임재입니다. 가사는 십자가 복음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주의 임재와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는 예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 준비를 맡았다면 무엇을 준비할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어디서 드릴까? 언제 드릴까? 설교자는 누구로 할까? 누구 누구 참석할까? 반주자는 찬송 인도자는, 찬양대는 어떻게 세우나? 대표기도는 누가 하나? 순서지는 어떻게 하나?’ 이런 것들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준비되면 예배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형식적 예배자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예배 중에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뜨겁게 찬양하며 감사를 올려드릴까?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고 기도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면 또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대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이 아닙니다. 감격입니다.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님 생신 잔치에 참석할 때, 조금도 마음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내가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리로 예배하는 자에겐 이런 담대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 14:6에서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죽고 천국에 갈 때와 예배드릴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명확히 알지 못할 때, 예배는 사람에게 끌려 나오는 예배요, 그저 예배당에 참석하는 예배요, 분위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나면 예배는 나의 예배요, 예배는 감격이요. 예배는 기쁨이요, 예배는 갈망이요, 예배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저를 위한 속죄 제물로 그리 되신 것을 알게 된 후, 저는 찬양할 때, ‘어린 양 예수’ 란 표현에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진리가 저를 진정한 예배로 이끈 것입니다.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청년들이나 학생들 집회에 가보면 조명이나 음향시설을 잘 갖추고, 찬양을 뜨겁게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복음이 무엇인지 물어 보면 대답을 분명히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분명치 않고, 심지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실리아 슐링크 여사가 쓴 [천국의 향취]란 책에서 “어린 시절 누구도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았고, 심지어 목사님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사처럼 나를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수많은 예배는 참석하였지만 진리로 예배드리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고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교인 심방을 가셨는데, 응접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났는데 교인이 “목사님, 안방에서도 예배드려 주세요, 건넌방에서도, 아이들 방에서도 예배드려주세요” 하더랍니다. 이러다가는 화장실까지 가자고 하겠구나 싶더랍니다. 그분은 열심이 대단했지만 지극히 무속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엡 6:14에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어도 체험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믿지 말고, 진리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안타깝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험에 의지하여 예수님을 믿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영적 체험이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서고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뜨겁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 사라졌을 때는 예수님이 떠나신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도 의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서지 못하면 예배는 이처럼 금방 무너집니다.
사단은 우리 인간의 감정을 기만하는데 선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도 진리, 곧 분명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로 예배할 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진리냐?’는 문제로 싸우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사를 통하여 ‘무엇이 진리냐?’는 문제로 수없이 싸웠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규명하는 노력은 이단이 교회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예배도 함께 드리지 않는 것을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인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리와 신학, 교단이 생긴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했던 웨슬리 목사님도 영국 성공회에서 쫓겨났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토론하고 연구하되 꼭 싸워야 할 일은 아닙니다.
진리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교리 따지고 교단 따지고 신학 따지겠습니까? 성경 해석 가지고 따지겠습니까? 그러나 교리가 진리라고 이해하면 따지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누가 독점하겠습니까? 누가 예수님에 대하여 다 안다고 하겠습니까? 서로 깨달은 것을 도움 삼아 주 예수님을 조금 더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싸우면 이미 진리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에베소교회에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처음 사랑입니다. 그러면 다 잃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주일 예배 때, 찬양곡을 불러도 되느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찬양을 좋아하는 교인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흔들리지 마세요. 찬양 예배를 밀고 나갑시다.”저는 그 말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싸우면서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영으로 예배하라는 기준에는 맞지만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찬송가만 불렀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명심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는 목사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이름으로 모인 것도 아닙니다. 부모 이름으로 친구 이름으로 배우자 이름으로 모인 것도 아닙니다. 교단 이름으로 모여서도 안 됩니다. 교리 이름으로 모여서도 안 됩니다.
교리로 모이면 반드시 싸웁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하게 되면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진리에 굳게 세워지게 됩니다.
그것은 예배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예배하면서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복음 위에 굳게 서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수없이 드려도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진리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빗나가 그 목사님은 목회에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아들도 나이드니, 깨닫고 돌아섰지만, 이만저만 타락하고 방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교회 안에서 살면서, 예배 시간에는 경건한데, 말과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교회 어른들을 보고 들으면서 마음이 강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리로 예배하였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예배하기 위하여 항상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면 그는 반드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번은 강원도에 있는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고 찬송을 [94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절만 부르고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요청했습니다. 정말 이 기사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 가사처럼 살 사람만 부르자고 했습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만약 마음이 준비 안 되었다면 안 부르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 찬송을 주님이 들으시잖아요? 마음에도 없는 찬송을 들으신다면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전주를 하고 불렀는데, 아무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찬송가 반주는 계속되고 아무도 부르지 않고, 그러다가 여기저기서 교인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 결코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진리로 예배하면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핍박이 두려워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이 배신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초대교회의 큰 문제였습니다.
그 때 복음서가 씌어져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제자들의 배신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다시 세우시는 주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은 초대 교회가 배교자들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다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 후 초기와 비교할 수 없는 대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교인들은 담대하게 핍박에 맞섰습니다. 엄청난 순교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실패자였던 자신들을 받아준 은혜, 그로 인하여 그들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순교의 갈망으로 나아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강력함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교리 훈련이나 율법적인 생활로 가능할 수 없습니다. 교리로는 배신자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를 통하여 주님은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배교자조차 순교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드리기를 힘쓰면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때 마다 십자가의 주 예수님, 부활의 주 예수님, 우리 안에 임하신 주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참 예배자입니다.
그는 십자가와 성령으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찬송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94장)
1.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2.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3.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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