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불이 임하는 예배
본문 : 왕상 18:30-40
왕상 18: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어느 목사님이 어릴 때, 친구들을 만나면 자꾸“어쩌다 목사가 됐어?”라고 묻는답니다. 그 때마다 길게 설명하기 어려우면 “예배드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라고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예배에 그렇게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것입니까?
본래는 새해 첫 주일부터 시편 강해를 이어 하기로 했는데, 주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예배’에 대한 말씀을 몇 주 드리려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정말 잘 믿어야 하겠는데, 하나님을 잘 믿는 기본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에서 매우 중요한 과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따로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떼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 전 교인들에게 예배 문제를 다룰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여 예배에 실패하는 이들이 많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주일 성수의 개념이 강합니다. 불교 신자나 천주교 신자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불이 임하는 예배는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신학생 때, 교회사를 공부하는 중, 부흥시대의 역사를 읽어 내려가다가, 부흥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예배 중에 눈물과 감격, 치유, 회심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수없는 예배를 드렸지만, 이런 예배를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예배를 드려 보았으면!’ 하는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부러운 장면 중 하나가 왕상 18장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임하는 장면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1명의 영적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신이 참 하나님이냐?’ 하는 대결입니다.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신이 참 하나님이다. 이것이 이 대결의 핵심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이 하루 종일 발광하며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임하였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예배드릴 때면 이 장면을 머리에 그립니다. “주여, 불을 내려 주소서!”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했던 일이 있습니다. 제단을 수축하는 것이었습니다.
:30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당시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제단이 무너져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열두 지파의 수를 따라 돌 열두 개로 제단을 수축한 다음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 그 위에 12통의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시대에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 다음에 예배를 드리면서 불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예배가 불이 임하는 예배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불의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주시는 말씀이 있고, 회개의 눈물이 있고 감동이 있고 기쁨과 감사의 회복이 있으면 불이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배에 불이 임하지 않는다면 제단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가 지겹지는 않습니까? 어떤 분은 예배 때 가장 은혜 받는 시간은 끝날 때라는 분도 만났습니다. 예배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시계를 보게 되고, 찬송가가 4절짜리만 되어도 신경 쓰시는 분이 많습니다. 제단이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지겨운 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가 예배를 지겨워하면 하나님께서도 예배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고 결국 그 두려운 일이 이스라엘에 임하였습니다.
아예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 없어진 것입니다.
예배가 지겨운 마음이 든다면 예배할 수 없을 때가 올 수 있다는 의미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두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예배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주일성수]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지 진정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받으시는 것일까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창 4:3-8)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 드리다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레 10:1-2)
사울 왕은 제사드릴 소와 양을 끌고 왔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집사님이 회사 창립 4주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새벽기도회 때, 회개했습니다. 어제 많은 사람을 초청했지만 하나님을 초청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준비를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마음은 거의 없었고, 회사와 파티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예배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이 임하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것도 솔직한 심정입니다.
부흥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전도의 역사는 점점 식어지고 교인들도 급속히 줄어든다고 하는 때입니다. 이런 때인데 우리 예배에 불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던 엘리야 시대는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우리 보다 더 암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만 해도,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주일 예배 때 찬송가 부르던 것을 찬양 시간으로 바꿈으로 찬양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자연히 예배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하루는 한 청년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주일 낮 예배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특히 찬양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장로님들에게 그 청년 이야기를 했더니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하며 짜증을 내셨습니다. 그 청년이 함께하는교회 담임으로 나가신 정기연 목사님입니다. 같은 예배를 드려도 불을 경험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지겨운 예배가 얼마든지 감사한 예배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고등부 선생님 한분이 입대를 하여 고등부 학생들에게 첫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등부 여러분께……다들 잘 지내시나요? 저는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 받았습니다. 우리 부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6명도 안 됩니다. 자대 배치 받기 전 훈련소에서 ‘자대가면 주님 열매를 맺겠습니다, 주님의 역사를 저를 통해 이루소서.? 라고 기도했었는데 이곳에 오니까 힘이 쭉 빠집니다. 밤에 자기 전에 엎드려 기도하니, 여기저기서 쟤 뭐냐, 군 생활 꼬이게 생겼네. 기도할 때 말 걸어서 대답 못했더니 말을 씹는다는 둥…… 이거 원 주님께 나가기가 이리도 힘들 줄은 몰랐습니다.
고등부 여러분 혹시 예배드릴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하신 적 있으신지요? 제가 속한 부대는 예배를 거의 드리지 못합니다. 이곳에 온 첫 주일, 교회 가는 일이 얼마나 마음 설레던지 감사기도로 준비하며 기다렸는데 취소되었습니다. 전 제가 교회 못 가게 되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릴 줄은 죽어도 몰랐습니다. 참 많은 생각이 나더군요. 매 주일 아침마다 일찍 깨는 게 싫어서 일요일도 못 쉬네 하며 투덜거리며 억지로 집을 나섰던 제 모습이 생각나, 주님께 죄송하다고 기도했어요.
여러분들도 아셨음 해요. 교회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감사할 일인지를 기도할 수 있는 것의 소중함도 아셨으면 해요. 여기서는 기도할 때 별소리를 다 듣습니다. 그 때 전 기도하죠, ?오직 주님만을 두려워하게 해주소서. 주님만을 바라보게 해주소서.? 라고요. 자기 전에 엎드려 기도하려고 준비하는 순간이 제겐 우습게도 가장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랍니다. 여러분 중에 왜 누워서 몰래 기도하지 엎드려 기도해서 걸리느냐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보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를 하루 동안 교회에 살게 해준다면 하루 종일 기도할 자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말이 많으냐고요? 아닙니다. 그냥 ?감사합니다.?만 계속 반복할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처음 찬양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여러분 중에 찬양할 때 멀뚱멀뚱 처다만 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세요. 주님 안에 뛰어 놀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달라고 말이죠. 훈련소 교회에서 찬양할 때 손뼉 치며 손 흔들며 율동에 맞출 때 주님 안에서 뛰어 놀 수 있다는 느낌이 이건가? 하며 감사의 기도를 했답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여러분들 그냥 멀뚱거리며 보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 고등부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주님 안에서 만났다는 건 행복한 일이랍니다. 여긴 고작 6명밖에 없어요. 제가 늘려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더욱 더 늘려나가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감사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저도 자부심을 갖고 오늘도 모진 소리를 이겨내며 엎드려 기도하렵니다.
우리는 시대가 영적으로 매우 암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로 역사하기 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제단이 수축되기만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예배부터 바로 드립시다!
키에르케고르는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극장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예배를 연극에 비유한다면, 누가 배우고 누가 관객입니까?
목사와 찬양대는 배우이고, 자신은 관객인 줄로 생각하는 교인들은 [예배를 보는 자]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은 지각을 해도, 일찍 나가도, 졸아도 연극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목사나 찬양대 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배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이 지각을 하거나, 일찍 나가거나, 졸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연극을 망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위하여 모든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예배 때, 대표기도 순서를 맡았거나 독창을 부르기로 되었다면, 마음 자세가 어떻겠습니까? 시간에 늦을 수 있겠습니까? 입는 옷 하나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참여할 때는 평소와 다른 옷을 입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할 때도 옷을 챙겨 입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할 때, 특별한 모임에 참석할 때, 특별한 사람을 만날 때 입을 옷을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특별한 일이나 모임입니까?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특별한 분이십니까? 장례식의 돌아가신 분이나 유족들, 회사의 사장이나 바이어, 대통령보다 더 존귀하고, 더 중요하고, 더 특별한 분이십니까?
정말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계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시간에 신경이 쓰이고 옷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성도 한 명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 말씀이 들리기는커녕 졸음만 와요. 어떻게 해야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말씀을 들올 수 있나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오늘부터 성경을 읽을 때 옷을 단정히 입고,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 읽어 보세요. 그렇게 며칠 동안 읽어 보고, 그래도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다시 저를 찾아오세요." 그 성도는 다시는 그 문제로 목사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배하러 나온 동기가 또한 우리 마음에 제단이 무너졌는지 아닌지를 드러냅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동기가 은혜로운 설교를 들으려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오늘 설교를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설교하지 않는다면 화가 나실 분이 계십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교회에 갈 것을!’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헌금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고 싶어서 예배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헌금에 담아 드리려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설교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설교 때문에 선한목자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부담스럽습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원하여 선한목자교회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바로 드리기 시작하면 반드시 예배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제가 어릴 때 예배를 잘 드리는 기준은 [떠들지 마!]였습니다.
그런 예배를 수도 없이 드리면서 자랐습니다. 당연히 불이 임하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사가 되었고,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제자훈련도 하고 전도도 하고, 양육도 하고 속회도 선교회도 활성화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럴수록 교인들은 힘들어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우리를 들들 볶는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니 가랑이가 찢어지는구나.” 하는 말을 들었을 때,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지쳤습니다.
그 때, 예배는 제게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예배드릴 때도 머릿속에는 교인이 얼마나 왔나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성가대는 잘하나, 안내위원은 잘하나, 음향 상태는 좋은가, 예배 시간 내내 일만 생각합니다. 당연히 예배를 드려도 충만함이 없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제게 있어서 제단이 무너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은혜 받는 시간이 없이 은혜를 끼치려고만 하니 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성장시켜 보려는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단했습니다. 저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며, 고백하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를 통하여 모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힘을 얻었습니다. 오히려 제자훈련, 전도, 선교회 등에 열정이 일어났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제 목회의 변화도 예배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새해는 정말 하나님께 예배부터 바로 드립시다!
“목사님 새해가 되었지만 제겐 아무 것도 새로워진 것이 없습니다.”
왜요? 가장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요? 위대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새해, 예배부터 바로 드립시다. 그리고 함께 예배하는 자로 섭시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불이 임하기를 기다립시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바른 예배가 삶을 변화시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제 예배를 받아주소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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