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현장의 예배 시편 96편 1~13절
이 시간 우리는 함께, "삶의 현장에서 예배"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예배는 언제나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있는 것이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예배에서 해방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생활을 하루만 추적해 보면,
개인 생활에서도 예배가 거의 보이지 않고
가정 생활에서도 예배가 거의 없고
직장 생활 가운데서는, 전혀 예배가 없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제가 지금 '예배'라고 표현을 해서, 마치 틀에 박힌 어떤 절차를 밟는 의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 있다'는 말이고,
예배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 흐려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은 어딘지 다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은, 예배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삶을, 생활 현장에서 항상 보여 주는 사람의 모든 행동과 처신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별되는 것이 별로 안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롬12:1절에 '너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이니라'
즉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모든 삶의 현장이, 하나님 앞에 고스란히 제사 지내는 제단이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은 제물이 되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배 아닙니까?
이런 삶의 예배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가책입니다.
'성도의 삶은 예배의 연속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주일날 드리는 공동예배를 다 끝내고
교회 문을 나서는 그 시간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어디에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브라함처럼 상수리 나무 아래서 제단을 쌓는 삶이 중단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시96편에서, 생활 현장의 예배가 어떤 성격이 되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참 좋은 본문이라고 제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활현장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를 꼭 배우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의 예배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1절 '새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구약에서 '새 노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장차 나타날 미래의 시대를 가리키거나
혹은 메시야 시대를 예언하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새노래를 부를 것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는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임하실때, 나타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노래 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새노래입니까?
마음의 변화를 받아 변화된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새노래 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속사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변화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새노래입니다.
새노래는 새 시대에, 새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다음에
그들의 새마음에서 터져나오는 노래가, 바로 새노래입니다.
오늘날 바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새노래의 찬송이요, 새노래의 예배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나는 아직도 이 새노래를 부를 사람이 못 돼!'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그러나 본인에게 한번 질문해 보세요.
'나는 예수 믿는가?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자 라는 것을
분명히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가?'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지금 영접하고 있고, 그 주님께 내 삶을 온전히 맡기고 사는가?'
물어보시라고요.
그럴 때 '부족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고 있다..' 하는 대답이 마음 속에서 들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새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부르는 그 찬송은, 모두 새노래 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생활 현장에서의 예배는, 이 새노래 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활현장에서 예배는, 이 새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새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활현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2. 새노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절에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 지어다'
그래서 구원자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자 하나님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10절에 나옵니다.
:10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찌라'
여기서 '통치자 하나님'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개역)
:13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이 땅 위에, 이 세상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새노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원자 하나님이신데, 어떤 구원자이십니까?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우리를 찾아오신 구원자 이십니다.
죄 속에 빠진 나같은 추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늘의 영광을 내버리시고 이 세상에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찾아오셔서, 우리와 대면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살아나셔서, 죄에서, 율법에서, 죽음의 권세에서,
사탄의 지배에서 우리를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구원자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새로운 스타일의 하나님입니다.
참으로 새로운 스타일이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대 사람들이나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 하면, 저 높은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려면, 항상 찾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저 높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 영광, 그 높은 보좌를 우리를 위해 내버리시고, 스스로 이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분입니다.
내가 그 분을 찾기 전에, 나를 찾아 주신 하나님이시니까, 새로운 스타일의 하나님입니다.
새 하나님!
이 분을 노래하는 것이 새노래 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배하고 통치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 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의 통치 형태가 있습니다.
통치 형태.. 라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제가 '통치 형태'라는 말을 쓰냐면
10절 끝에 '판단 judge하신다'는 말씀이 나오죠.
13절에도 '의로 세계를 판단 judge하신다, 진실함으로 백성을 판단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말은, 심판한다는 말도 포함하고, 통치한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샤파트
왕이 다스린다는 뜻이죠. 왕의 통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비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치하시면서, 드디어 우리의 모든 마음의 세계를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그 결과, 불의한 것이 있습니까? (판단하셔서) 깨끗이 제거하시고 의를 그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잘못된 가치관이 있습니까? (통치하셔서) 깨끗이 무너뜨리시고
새로운 가치관을 그 마음에 정립시켜 주십니다.
혹시 내게 공평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 불공평을, 공평한 것으로 전부 대치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신 주님의 판단(다스림, 통치)의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드디어 나를 통치하시는,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생각했던 가치관이 이제는 바뀝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바뀝니다.
나를 바라보는 자아의식도 바뀝니다.
나 자신이 이와 같은 통치에 의해서 변화가 되면
내가 살고 있는 가정이 변화가 되고
드디어 사회가 점점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노래가
바로 '새노래' 입니다.
이 구원자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요, 우리를 의로 판단(통치)하시는 분으로서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시고 계시는데,
그 새로운 스타일의 하나님, 그 놀라우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노래가, 바로 새노래입니다.
여러분께 이 새노래가 있습니까?
◑3. 세 번째로 새노래는 가만히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입니다.
가만히 숨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3절,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국제적으로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온 세계가 다 알 수 있도록 선포하는 노래가, 새노래입니다.
10절,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찌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찌로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모든 나라가 들을 수 있도록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그러니까 이 새노래는 절대로 구석진 곳에서 숨어서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소리친 말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는 한편 구석에서 행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는 지구 한모퉁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 새역사는 전세계가 알도록 일어났다'고 외쳤습니다. 그 말은 참입니다.
행26:26 '(아그립바)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그러므로 무슨 방법을 동원하든지, 새노래는 모든 족속에게 들려져야 되고
천하만민이 들을 수 있어야 되고, 설령 그들이 듣지 않더라도
우리가 큰 소리로 불러야 되는 것이 새노래 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밤중에 감옥에 들어갔습니다만,
바울과 실라가 들어온 감옥에 드디어 찬양의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잠이 깜박 들었던 모든 수인들의 귀에, 새노래가 들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노래하는 새노래가
모든 감방에 있는 수인들의 귀를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새 통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놀라운 메시지가 감방에서 쇠사슬에 매여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놀라운 새노래 앞에, 감옥의 문이 열렸고
그 새노래 앞에 간수가 엎드려서 굴복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파트에 예수 믿는 사람, 새노래를 부르는 성도가 이사를 오면
그 가정은 며칠도 되지 않아서 아파트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정상입니다.
한달이 되어도, 1년이 지나도 여러분을 보고 예수 믿는 성도인줄 모르고 있습니까?
이것은 대단한 잘못입니다.
성도가 그 아파트에 입주하면, 간간이 그 가정에서 들리는 찬송소리,
승강기 안에서 마주치는 밝은 얼굴,
그리고 '예수 믿으시냐?'고 묻는 밝고 다정한 질문,
이런 새노래 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웃들의 귀에 전부 들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크리스천입니다.
새노래는 나 혼자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입니다.
▲7절,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이 구절은, 주일예배 시작할 때 '예배의 초청'의 말로 종종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이 새노래는,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만방의 족속들, 온 세계 사람들이 함께 부를 찬송입니다.
11~12절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찌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이 새노래는 사람들만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삼라만상이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가만히 보면, 이 새노래는 사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귀에 들릴 노래입니다.
그때가 되면 온 세계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요
그 다음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속에 가득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성호(거룩한 이름)를 찬송하는 새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참 그 때는 얼마나 황홀할까요!
그러나 이렇게 새노래는, 종말적인 사건에 불리울 노래이긴 합니다만
그와 아울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사건은, 지금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삼라만상이 하나님을 찬송하느냐? 하고 물을 때는
빨리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삼라만상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의 죄 때문에 탄식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더 쉽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무서운 인간의 죄를 내려다보면서
바위가 눈물을 흘리며, 나무가 손짓으로 소리를 지르고
모든 우주만물이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
이 삼라만상이 하나님을 노래하고 즐거원 한다고만은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세계 도처를 보면, 모든 민족들이 다 하나님 찬송하고 있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서 오늘도 소리 지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직도 새노래를 다 함께 부르는 이 놀라운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지금 (완전한 새노래로 부르는 종말로)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그럼 그 진행과정이 누구를 통해서 되고 있습니까?
지금 예수 믿고 있는 우리 우리들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우리들이 가는 곳마다 새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노래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그 노래에 동참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새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새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다시 탄생됩니다.
그래서 점점 새노래를 부르는 합창단 멤버는 자꾸 늘어납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나중에는 저 산에 있는 돌들이 소리지르며 찬송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교인들만 불러서도 안 되고,
또 나 혼자 골방에서 불러도 안 되고
어디서든지 이 노래는 함께 불러지도록, 모든 사람들을 이 노래로 초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 노래의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을 잠깐 정리해보고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1) 새노래는 누가 부르는 노래입니까?
새사람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즉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2) 새노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노래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통치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것이 새노래입니다.
3) 새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가만히 조용히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알도록 크게 불러야 하며
새노래는 나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모든 족속이 나중에는 삼라만상이 함께 부르는 찬양입니다.
▲시편 96편에서 한 가지 또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새노래로 '노래하라' 했으니까, 늘 '찬양, 노래'만 하고 다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시96편 안에 있는 새노래와 관계되는 동사들을 잘 살펴보세요.
굉장히 다양하게 나옵니다.
'노래한다, 선파한다, 선포한다, 찬양한다, 경외한다, 돌린다, 경배한다, 즐거워한다'
이렇게 다양한 용어들이, 새노래와 연결되어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새노래로 예배한다는 것은, 단순히 노래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수단과 모든 형태를 동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감사하는 우리의 밝은 표정이 새노래로 노래하는 제사가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외함으로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이, 새노래로 하나님께 노래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요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삶도, 세상 사람들 앞에 새노래로 노래함이 될 수 있고요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며 전도하는 도전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새노래로 예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다양한 삶의 형태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자 하나님을 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면, 그 모든 것이 '새노래로 찬양하며 예배하는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정리해 볼 때, 새노래의 예배란
우리 생활 현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한국에는 주변에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987년 설교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을 통해서, 캠퍼스 이곳저곳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공부하면서 엎드려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보입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캠퍼스마다 이와 같이 새노래로 노래하는 젊은이들의 모임을 찾는다면
수 백 개가 넘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굉장히 많은 젊은이들이 캠퍼스에서 새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믿는 사람들끼리 신우회 예배를 통해서 새노래를 부르는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짧은 점심시간을 쪼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분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각 구역에서는 다락방 구역모임을 통해서, 주부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노래들을
온 사방에 들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는 복 받은 나라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생활현장에서 계속 계속 파급되면
결국은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새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이 올 것이요
이 찬양의 새노래가 전 세계 끝까지 메아리치는 날이 분명히 오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나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활 현장의 예배 가운데서, 제가 볼 때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예배, 직장 예배도 중요하지만,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단위는 가정입니다.
가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금년부터 우리는 주일 저녁마다 가정 예배를 장려하고, 또 실천하고 있습니다.
잘 들으세요. 가정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새노래로 예배하는 생활이 잘 지속되면
우선 먼저 가정이 얻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 진실로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실 때, 남녀를 세워 놓고 '너희는 한 몸이니, 하나가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제 가장 이상적인 하나가 되는지 아십니까?
둘이 하나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부가 무릎 꿇고 엎드려 경배하며
새노래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때
그 시간에 그 부부는 드디어 가장 이상적인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부부는, 서로 하나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한 집에서 산다고 하나가 됩니까?
한 침상에서 잔다고 하나가 됩니까?
남편에게 싹싹하게 해 준다고 하나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가장 이상적인 하나가 됩니까?
부부가 하나되라고 명령하시고,
가정과 자녀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새노래를 부르며 가정예배를 드릴 때
부부가 먼저 하나되고
부모와 자녀가 하나가 됩니다.
'◑명인 명설교편◑ > 옥한음목사 설교(66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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