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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사56:6-8/대하7:11-16/막11:15-18/마21:12-17/눅19:45-46)

by 【고동엽】 2022. 2. 2.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사56:6-8/대하7:11-16/막11:15-18/마21:12-17/눅19:45-46)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말은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한 말이고 그 다음에 주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서로 만나고 서로 말하는 것보다 반갑고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인생은 만남이요 대화입니다. 교회는 만남의 방이요 대화의 방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과 말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나올 수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도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눅18장에 보면 바리새인도 성전에 올라왔고 세리도 성전에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마21장에 보면 장사하는 사람도 성전에 올라왔고 소경과 저는 자들도 성전에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누구나 나올 수 있는 "만민의" 집입니다. 흑인은 올 수 없고 백인만 올 수 있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에서 물론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교제도 하고 구제도하고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고 회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근본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이란 말은 교회에서 교제를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기도하면서 하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도하는 집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봉헌했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여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7:12,15,16).

성경은 도처에서 기도란 무엇인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56장은 우리가 어떻게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어떤 예배가 바른 예배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른 예배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예배라야 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1. 바른 영적인 생활은?

 

①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6절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언젠가 미국 부시 대통령이 짧은 방한일정을 끝내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부시와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끝난 후 우리 나라 언론들은 그 성과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평가했습니다.
그 중 모 신문의 평가 가운데 「한미 관계의 업그레이드」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왕에 유지되 나오던 두 나라의 관계가 부시의 방한을 통해 한층 더 든든해지고 확고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어느 나라건 자기네 나라 국익을 제쳐놓고 다른 나라를 돕거나 지원하거나 관계를 맺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것은 한미 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언제라도 관계가 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새로운 연합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고독한 생존을 위해 주변의 강대국들과 국교를 맺고 연합하는 정치를 펴 나왔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 강대국들과 국교를 트고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만 그 나라들은 호시탐탐 기회만 되면 침략의 마수를 펴고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연합하라"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와 연합하라"고.
하나님과 연합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손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손을 잡고 있습니까? 누가 나를 돕고 지원해 주고 있습니까?
히13:6절을 보면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4:16절을 보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면 때를 따라 그때그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단10: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 미가엘을 보내 다니엘을 도와주셨다고 했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사자를 담을 상자(셀) 8천 개를 준비했습니다. 월남전 전사자 수를 생각하고 최소한 8천 명의 전사자가 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16개만을 사용했습니다. 여러 가지 승리요인이 있었습니다만 이 전쟁이 승리로 빨리 끝난 것은 최첨단 무기 덕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하 벙커 속에까지 파고 들어가 터지는 스마트탄 같은 무기가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합하면 죄악을 이기고 마귀를 물리치고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진정한 승리자, 인생의 성공자가 되려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②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6).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창2:3절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러라" 본래 안식일의 시작은 천지창조를 6일 동안에 마치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 안식하신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의 근본 출발은 아담과 하와가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식하신 하나님의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날이 마치 내가 먹고 놀고 쉬는 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안식일도 내 날이 아닙니다.
출20:9절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했고, 10절을 보면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출20:9-11절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라는 것, 일곱째 되는 날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 제 칠일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하나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날을 쉬는 날, 노는 날, 먹고 마시는 날, 놀러 가는 날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생각과 발상을 가리켜 사56:6절은 그 날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돈벌고, 일하고, 직장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은 주님을 섬기고 예배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번 돈으로 주님을 섬기는데 쓰고, 맡은 일을 해야 합니다.
주 5일 근무제 실시가 임박했습니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적극 찬동하는 제도입니다만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 주일성수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창조의 원리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신체와 영혼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제하며 살아야 행복하고 평안하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주일에 놀러가고 쉰다고 안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 예배시간 낚시터에 앉아 있거나 골프장에 서있으면서 일말의 가책도 괴로움도 없다면 그는 하나님과 등을 돌린 사람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골프장에 있거나 낚시터에 있긴 하지만 마음이 괴로운 사람이라면 양심의 불씨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 팽개치고 "주일은 교회로, 주일은 하나님께로"라는 신앙으로 주일을 성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시대를 살든지 주일을 바로 지킵시다. 구약시대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만 우리는 주의 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이 날을 더럽히지 맙시다. 거룩하게 지킵시다.

 

③언약을 지켜야 합니다(6).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받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길은 "언약을 굳게 지키면"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언약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약을 지킨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고 복을 받았지만,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버림받았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그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도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았고, 저버리면 심판을 받았습니다.
언약이란 문자 그대로 말로 하는 약속입니다. 문서로 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말 한마디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믿고 실천하는 것은 약속자에 대한 신뢰가 전제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사랑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면서 그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결혼한지 5년 된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소한 감정충돌이 화근이되 부부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티격태격 거친 말이 오고가다가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언행이 거칠어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안살면 될거아냐." "그래, 헤어지자." "누가 못 헤어질줄 알고?" "그래, 네 맘대로 해 봐."
아내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밖으로 내던집니다. 결혼반지는 약속의 징표입니다. 그것을 집어던지는 것은 약속과 관계를 집어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제 멋대로 하면 언약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굳게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언약을 지킵시다. 주님과 맺은 약속을 철석같이 지킵시다. 힘들어도, 고달파도, 어려워도 약속은 지킵시다.

 

④기도하는 집에서 기도해야합니다(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안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은 이유는 그 곳에서 기도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막11:15-18을 보면 주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고 상을 둘러엎으시며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려면 24시간 기도소리가 끊어지면 안됩니다. 기도의 메아리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집에 나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시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 나와 기도하기를 힘씁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 세 번씩 제 3시, 제 6시, 제 9시에 성전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성전에 나올 형편이 못되면 성전 있는 곳을 바라보고 방안에서는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의 유래(삼하24:1-25)

 

창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의 성전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중국에서 선교사의 딸로 오랫동안 살았던 펄벅이라는 여류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중국 사람의 눈빛만 보아도 대충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해서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 중에 '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발표함으로서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게된 수작입니다.
'대지'는 왕룽[王龍]과 그 일가의 역사를 그린 작품입니다. 왕룽은 가난한 농부로서 노예인 아란[阿藍]을 아내로 맞아 질곡의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홍수(洪水), 한발(旱魃), 메뚜기의 내습 등 거듭되는 천재(天災)와 폭동 등의 시련을 겪으며, 고난을 참고 인내하며 돈을 모으던 중 행운이 따라 주기도 해서 큰돈을 모아 대지주가 됩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긴 왕룽은 함께 고생했던 아내를 저버리고 롄화[蓮華]라는 기생을 첩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얼마 후에 아내 아란은 고생 후에 얻은 부를 누리지 못하고 忍苦(인고)의 삶을 마감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왕릉은 아란을 위하여 성대한 장래를 치러 주지만 그것으로 아내의 넋을 위로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성실하고 착한 사람도 부와 권세를 누리게 되면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삼하24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 다윗도 형통하게 되니까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승리하여 누구도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을 향해 침공하지 못하는 춘추전국시대를 누리고 있을 때 다윗은 또 다시 사탄이 펼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맙니다.
다윗은 느닷없이 군대장관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자체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구조사를 하는 목적과 동기가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디를 가든지 전쟁에서 이기게 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전쟁의 승리는 창과 칼에 있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우수한 병기나 수많은 군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아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수를 세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통해서 파악한 군인으로 동원될 수 있는 장정의 수는 157만 명이었습니다. 157만 명의 병력에 무기만 제대로 갖춰지고 탁월한 전술만 뒷받침된다면 그야말로 무적의 군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힘입어 나가 싸우므로 한 번도 전쟁에서 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군대의 수를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탄에게 감동된 후에 인구조사를 했지만 인구조사를 마친 다음에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자책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10절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적어도 다윗은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자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하루아침에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인하여 죽어 넘어졌습니다.
비록 다윗 자신도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주로 백성들에게 내려졌습니다. 다윗은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변명으로 일관하여 애써 책임을 회피하려하는 그런 군왕이 아니었습니다. 7만 명의 백성이 죽어 넘어간 것은 순전히 자신의 죄 때문이라며 "나는 범죄 하였고 죄를 행하였사온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다윗은 그 엄청난 재앙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여기에 참회개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탓으로 죄를 돌리지 않고 죄를 자신에게 돌릴 줄 아는 사람이 참회개자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으시고 갓 선지자를 시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는 마침 아라우나와 그의 아들들이 타작을 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칼을 든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칼을 빼 들고 서 있으니 수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쓰러지게 된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바로 영적 추수의 장소요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아라우나와 그 아들들이 그곳에서 추수를 했으나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거룩히 구별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모리아산이었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거룩한 성지인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과 대하 3:1절에 보면 모리아 산은 바로 아라우나 즉 '오르난'의 타작마당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 타작마당으로 제사를 드리러 갔을 때, 아라우나는 정중하게 다윗 왕을 영접하며 만일 이곳에서 제사를 드린다면 땅도 드릴 것이요, 제물에 쓸 소도 왕께 드릴 것이요, 농기구를 제사에 쓸 나무로 제공할 것이며 타작한 곡식 중에 소제물로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마당을 高價(고가)를 주고 살 것이요 제물에 소용되는 모든 것들도 후한 갚을 치러 사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고자 함이요 또 다윗이 영감을 얻어 이 타작마당이 범상치 않은 거룩한 성지임을 직감했기에 하나님 성전 지을 터를 염두에 두고 비싼 값을 다 치르고 땅과 제사 드리는 데 소용되는 것들을 사서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대상 21:28절에는 이곳이 응답의 장소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회개를 받으시고 전염병이 더 이상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기를 간구하여 응답 받은 장소였습니다.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후일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이 거룩한 성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회개를 받으셔서 응답하신 장소인 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회개하시며 형벌을 받으셨는데 그 곳이 바로 이 타작마당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다시 세운 성전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인간의 회개를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곳,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이 성전이 내 성전이요 이 교회가 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처럼 회개하는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응답하시며 축복하십니다.

 

3. 어디에서 기도해야 합니까? 성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왕상8:41-45)

 

①왜 성전에서 기도해야 합니까? 왕상8:11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라고 했고, 16, 18, 20절을 보면 "내 이름을 둘만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집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며,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자기가 사는 집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해도 성전에 올라가 했고, 성전에 올라갈 형편이 못되면 성전을 바라보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다니엘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대나라가 망할 때 포로로 잡혀간 젊은이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아 포로 출신으로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빼앗긴 바벨론 조정 대신들의 시기와 질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단6:10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야말로 목숨걸고 죽을 각오로 성전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시는 곳, 즉 하나님의 집입니다. 주님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역시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왕상8:22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손을 펴고"라고 했고, 29, 42, 44, 48절을 보면 "이 전을 향하여, 전 있는 편을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8, 43, 52절을 보면 "부르짖고 빌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손을 펴고, 손을 들고, 성전을 향하여,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왜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까?
시3:4을 보면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성산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성산에서 응답하신다는 것은 곧 성전에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왕상8:29절을 보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했고, 33-34절을 보면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라고 했고, 42-43절을 보면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라고 했습니다. 44-45절도, 48-49절도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들으시고"라고 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신앙은 성전에서 기도하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전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 그 이름을 두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성전은 중요한 것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 있는 피아노와 오르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 제품들입니다. 값도 고가입니다. 저희 교회 피아노는 그것들에 비하면 저가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것들은 성구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며, 성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성전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전을 사모하고 살아야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이 있고, 신자가 있고, 제자가 있습니다. 교인은 등록하고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입니다. 교인 가운데는 진실한 교인도 있을 수 있고 사기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난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다릅니다. 제자란 거듭 났을 뿐만 아니라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를 위해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바치고 자신을 주의 것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제자인 것입니다.

 

③솔로몬은 성전에서 무엇을 구했습니까? 왕상8:34절을 보면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했고, 35-36절을 보면 "비가오지 않아 땅이 메마를 때 비를 내리시옵소서"라고 했고, 37-39절을 보면 "기근과 재앙이 계속될 때 기도하거든 응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4-49절을 보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져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이기게 해주시고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43절의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라는 말씀과 52절의 "주께 부르짖는 대로 들으시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천재지변도, 재앙도, 전쟁도, 고통도, 질병도 기도하면 들으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 솔로몬의 신앙이었습니다.
천재지변이나 재앙이나 실패나 고통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54절 "솔로몬이 무릎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왕입니다. 백성들이 왕을 향해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왕을 높이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솔로몬의 성공 비결이었고 복 받은 비결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손들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4.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대하7:11-16)

 

역대하 3:1을 보면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모리아 산에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모리아 산은 창세기 22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독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던 모리아 산 위에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은 오묘한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대하 6장은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친 후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7장은 성전봉헌과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가를 살펴보겠습니다.

 

①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대하7:12절을 보면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했고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라고 했습니다.
"나타나셨다", "듣고"는 동사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은 "듣고, 보고, 말씀하시고, 오시고, 가시고, 일어나시고,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동행하시고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출20:4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살아서 움직이고 역사하시는 분이신데 손으로 깍고 다듬고 부어서 만든 것들을 신이라고 섬기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십계명 가운데서 이 계명을 빼버렸습니다. 이유는 그들은 성자와 성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에 성자들이나 마리아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 어머니만 되어도 대단한 찬사와 존경을 받는데 예수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야 말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의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못됩니다. 되면 안됩니다. 큰일납니다.
나타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힘씁시다. 반드시 들으십니다. 대하7:15절을 보면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라고 했습니다. 듣고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②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하7:14절을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실체, 인격, 존재를 상징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란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선택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백성과 그들이 사는 땅을 고쳐 주신다는 것이 본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도하느냐, 즉 기도의 태도입니다.
첫째,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란 죄와 불의와 불법의 현장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하나님깨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도둑질하는 죄를 회개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도둑질은 안 하지만 그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의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도둑질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더 큰 죄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떠날 것은 떠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악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거나 스스로 높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교만은 기도를 막고, 은혜를 막고, 축복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셋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사람은 각각 타고난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성형술의 발달로 얼마든지 다른 얼굴이나 예쁜 얼굴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관상쟁이는 헷갈릴 때가 많다고 합니다. 본래 타고난 얼굴이 진짜 관상인데 다 뜯어고쳤기 때문에 관상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나이를 따라 변합니다. 기후 따라 변합니다. 감정 따라 변합니다. 분위기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얼굴이십니다.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는 파리 '르불'박불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신비한 듯한 모나리자의 미소는 지금까지 변치 않고 그대로입니다. 단 그 미소는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미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나를 바라보시는 얼굴, 나를 사랑하시는 얼굴, 나에게 말씀하시는 얼굴입니다. 그 얼굴을 구하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사모하고, 사랑하고,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싸우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독기가 서리고 무섭습니다. 강아지도 잘못을 저지르면 주인얼굴을 피합니다. 사랑과 사모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 회개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주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복받고 고침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했습니다. 땅이란 흙, 경작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땅은 거기 사는 사람들과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토산물들 채소, 곡식, 과일을 의미합니다.
출15:26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땅도 사람도 창조하셨고, 그들을 고치십니다.
특히 그 땅을 고치신다는 것은 그 땅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동들, 예컨대 경제활동, 정치활동, 사회활동 등을 다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어령씨가 쓴 칼럼을 읽었습니다. 배고픈 것을 풀어주는 것이 경제, 귀고픈 것을 풀어주는 것이 음악, 눈고픈 것을 풀어주는 것이 미술, 마음고픈 것을 정치나 경제가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 존재인데 누가 무엇으로 영혼고픈 것을 해결할수 있습니까? 영혼의 고독이나 아픔을 음악으로, 미술로, 밥으로 돈으로 풀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로는 고픈 영혼을 채울수도 달랠수도 없습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께 기도할 때 영혼고픔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합3:17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한 구절 속에 "못하며, 없으며"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것은 다 없어지고, 다 실패하고, 다 사라져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18을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영혼이 고프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허전하고 의미가 없고 죽고싶고 바라볼 것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③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하7:16절을 보면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신11:12을 보면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43:5절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하고 했습니다. 마28:20에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위의 네 구절만으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함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경호원도 항상 함께 있진 못합니다. 부모도 형제도 그렇습니다. 한 몸이라는 부부도 항상 함께가 아닙니다. 때로 함께 때론 따로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영원히,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십니다.
시121:8절 말씀으로 결론을 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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