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요 2:1-1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희극도 있고 비극도 있습니다. 남을 울리는 사람이 있고 남을 웃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분을 상큼하게 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있고, 유익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 잔치처럼 즐겁고 흥겨운 잔치가 있는가 하면, 초상집처럼 슬프고 가슴 아픈 모임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소망은 요람(출생)에서 무덤까지 마냥 즐겁고, 행복하고, 건강하고, 기분 좋고, 넉넉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인생살이가 내 마음대로 됩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 내 희망 사항일 뿐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문제는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 속에서도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문제 속에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길이 나오고, 방법이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문제의 해결의 길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사건으로써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유명한 사건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자!
예수께서 요단강 가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증거를 받으신 후, 다섯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가나라고 하는 동네에 가셨습니다.
본문은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한 가정을 시작하려는 결혼식에 주님이 초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결혼식은 어느 때, 어느 환경,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보배롭고 축복된 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은 '사흘 되던 날'로 시작이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3일째를 맞이하는 날이 되지마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3일은 '생명과 축복의 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1: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제 3일째 날은 육지가 생기고, 황량했던 땅이 식물과 체소로 채워지던 날입니다. 또 3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의 날입니다.
이와 같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이 장차 생명의 부활의 은총으로 천국 잔치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예표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가나'는 요단강 기슭에서 도보로 약 사흘 걸리는 길이며,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는 약 8km 떨어진 마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곳 가나에서 첫 공생애의 첫 기적을 행한 곳이었고, 또 요4장에 보면,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살려주신 두 번째 기적을 베푸신 곳이기도 합니다. 4세기경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이곳에 기념 교회를 세웠는데 지금도 이곳은 성지 순례자들을 상대로 포도주 장사가 성업 중이랍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모든 절기의 칠일예식에 따라 일주일동안 베풀어진답니다. 아마도 본문의 신랑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는 사람인지 손님이 많이 온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이 떨어졌지요! 특별히 오늘 잔치 집에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이 잔치 집으로써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목민들입니다. 그래서 양고기가 주식입니다. 양고기에는 꼭 포도주가 있어야 한답니다. 우리들의 음료수처럼 긴요한 것이 포도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 째 성역이 가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시작하였고,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시작하였는데, 예수님은 즐거운 결혼 잔치 집에서 첫 기적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가정을 사랑하시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잔치하는 종교! 즉 기쁨의 종교입니다. '유교는 제사 집과 같고, 불교는 초상집과 같고, 기독교는 잔치 집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에 가보십시오! 계속 향불만 피웁니다. 꼭 초상집에 온 기분입니다. 또 유교의 의식은 갓 쓰고, 도포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제사 집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교회는 언제나 기도소리, 찬양소리, 웃음소리가 나기 때문에 잔치 집 기분이 듭니다. 사람들이 잔치 집에 갈 때에는 마음껏 먹고, 기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올 때마다 그런 마음을 기지고 나오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행한 기적의 장소가 바로 가정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이 계십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하여 가정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첫 가정을 세우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무슨 축복을 주신지 아십니까? 창1: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씀은 결론적으로 모든 축복을 가정으로 이끌어 가라는 원리입니다. 가정이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받는 모든 복이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내 가정 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출세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세한 것이 가정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성공할 수도 있고, 명예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정에 돌아와서 서로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 그것이 아무리 화려해도 겉만 번지르한 명예에 불가한 것, 허상에 불가한 것입니다.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고,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 복이 가정의 행복으로 바꿔져야만 합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잔치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에게 가정을 주어 잔치하는 축제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 축제를 완전히 비극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과 가정이 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 속에 있는 포도주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포도주가 기쁨의 상징입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고 말합니다.
시104:15 "포도주는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기름은 우리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고, 곡식은 우리의 마음에 힘이 솟게 한다"고 했고, 전10:19절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밥을 먹으면 힘이 솟습니다. 기름기가 들어가면 얼굴에서 윤기가 납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우리 심령 속에 있으면 즐겁고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삶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로 말미암아 기쁨을 상실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어느 곳에 가도 행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잔치하는 인생이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다 근심 걱정 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근심과 걱정에 쌓인 인생을 잔치하는 인생으로 바꾸고, 가정을 잔치하는 가정으로 바꿔야 합니다.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문의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우연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정과 우리 심령의 기쁨을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기쁨을 누가 먹어 버렸습니까? 사람이 먹어 버렸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집의 포도주도 사람들이 다 먹어서 바닥이 났습니다.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으로 다 바닥난 것입니다. 바닥난 인생은 즐거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 바닥이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심령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 때문에 심령 속에 기쁨이 바닥이 났습니다.
바닥난 기쁨을 우리 모두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사람이 주는 기쁨으로는 안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람이 주는 기쁨은 영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이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기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기쁨이 있고, 땅에서 만들어지는 기쁨도 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만든 기쁨은 아무리 커도 금방 바닥이 드러납니다.
이 바닥날 기쁨, 세상이 주는 허탄한 것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고, 위로 하늘을 보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 영원히 시들지 않은 기쁨! 빼앗기지 않은 기쁨을 받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요15: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노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고, 요14: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처음에 포도주와 나중에 포도주가 달랐습니다. 처음 나온 포도주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두 번째 포도주는 주님께서 만든 것이어서 더 '좋았더라'입니다. /할/
예수님의 능력은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가나'라고 하는 말은 갈대밭이란 뜻입니다. 쓸모 없는 지역에 예수님이 계시니 쓸모 있는 지역으로 바꿔졌습니다. 우리도 오늘 예배드리다가 맹물 같은 내 인생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에 포도주는 기쁨이외에 영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 교회로, 주의 보혈로, 믿음으로, 능력으로, 축복으로, 성령으로 해석합니다.
어쩠던 우리도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쓸모 없는 인생이 변하여 꼭 필요하고 쓸모 있는 인생으로 바꿔집니다. 미약하게 시작된 인생의 삶이 창대 하게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욥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할/
본문의 잔치 집의 포도주는 <처음 보다 나중 것이 더 좋았더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처음 보다 나중이 더 좋아집니다. /믿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지금 꼬여 가고 있습니까? 가나 혼인 잔치 집은 포도주만 모자랐습니다만, 우리 시대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모자랍니다. 그래서 절망입니까? 해결의 길이 없습니까? 절망이 아닙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그 해답을 본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이 포도주 되는 그 기적의 과정을 몇 단계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시작이 됩니다.
신앙의 첫 출발도 영접입니다. 영접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1절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고 했고, 2절 '예수와 그 제자들도 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문제의 사건 현장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모셔들이고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하면 우리가 수지 맞습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그렇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개입할 때 일어납니다. 주의 성령이 역사하고 운행하면 깜짝 놀랄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인생 길에 슬픔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예수께서 우리 문제 속에, 사건 속에 개입하시면 지금도 여리고는 무너지고, 홍해는 갈라집니다. 믿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주님이 우리 문제 속에, 사건 속에 개입하시도록 믿음의 능력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습니다. 국가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믿어지면 아멘!
문제는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가정에, 사업장에, 우리 인생 길에 모셔들이면 평탄대로가 열릴 줄 믿습니다.
둘째로 철저히 떨어져야 길이 열립니다.
사실 결혼식은 누구에게도 가장 중요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지키는 삼대 종교 절기와 같이 혼인잔치를 무려 일주일동안 합니다. 말이 일주일이지 일주일 동안 손님 치른다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일주일동안 하는 잔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하는 장례식도 최근에는 삼일장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나 상주들은 거의 쓰러질 정도로 지쳐버립니다.
그러니 1주일 동안 하는 잔치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혼주는 자신이 직접 음식을 장만하지 않고 대신 그 일을 할 연회장을 두어서 잔치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잔치를 치르는 집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잔치 집에 꼭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 나라 목포 같으면 홍어회가 떨어져다 할까요.
3절에 보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끝내는 포도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면초가에 있을 때, 모든 것이 떨어지고 바닥날 때 겸손해 집니다. 차고 넘치면 교만해 집니다. 본문에 떨어지고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때, 사건이 터질 때, 그 기간이 주님 만나는 기간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끊임없이 끊임없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바로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기도의 줄을 붙잡게 하고, 내 믿음을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됩니다.
Ex) ●'마틴 루터'가 꿈을 꾸었는데, 왕 사탄이 있고 그 밑에 많은 졸개들이 그 사탄에게 보고를 하더랍니다. 졸개 하나가 교인 하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막을 걸어가는 교인 앞에 사자 한 마리를 보내었더니, 그 교인이 '주여!'하면서 사자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 앞에 사자가 있을 때' 성도는 바로 그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주의 손길을 붙잡는 도구입니다.
그 다음 다른 졸개가 보고를 합니다. 교인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고 풍랑을 일으켜 암초에 부딪치게 했더니 교인들이 부셔진 배 조각을 붙잡고 기어올라가서 기도하며 찬송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도무지 교인들은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그때 왕 사탄이 소리를 지릅니다. 이 졸개들아! 하나도 성공 못하였느냐?
그때 한 졸개가 대답을 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성공을 했습니다. 나는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재물을 주고 축복을 주고, 또 교인들 가정에 잘 되게 내버려두었더니 나중에는 재물에 떨어져 신앙이 잠이 들고, 사업 때문에 잠이 들고 거듭되는 축복에 신앙이 잠이 들어서 다 넘어진 것을 오늘 이 자리에 끓고 왔습니다.
그래 네가 최고다. 대장 마귀가 칭찬을 해 주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적은 내 인간적인 지식이, 교만이, 수단이, 방법이 다 떨어져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만든 포도주가 완전히 바닥이 나야 주님이 만드시는 새 포도주가 항아리에 차게 됩니다.
주님 말씀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낡은 포도주와 주님이 만든 새 포도주를 섞으려고 해도 안됩니다. 믿습니까?
셋째로 철저히 떨어진 것을 주님께 아뢸 때(기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절에 보면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예수께 아뢰였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저는 이것이 매우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지금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도 누구인지 정확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기도 아주 적절한 시기에 예수님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그리고 끝입니다.
포도주를 만들어 내라든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든지, 아무튼 뒷말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의 형편만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올바른 기도란 자기의 입장과 처지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 당시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그 집주인도, 하인도, 초청 받은 사람들도 다 알았습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마리아만 진솔하게 아뢰였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제일 중요한 원인은 바로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4:2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염려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사람 다윗은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백 번의 근심보다, 한 번의 기도가 났고, 천 번의 한숨보다 찬송 한 곡이 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네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무엇이든지 떨어진 것이 있으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포도주가 떨어져 근심하고 한숨쉬는 잔치 집에서 마리아의 한번의 기도가 잔치 집에 기쁨을 가져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 우리의 염려! 기도로 해결합시다. /할/
●4절의 우리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잘못 해석하면, 주님이 어머니 말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자여' 우리말 어감으로는 무척 안 좋게 들립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여자여' '귀나이'라는 말로 존칭어입니다. 왕후를 부를 때나, 여자를 다정스레 부를 때 최대의 귀부인의 존칭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당신이 내게 대하여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즉 "내게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말을 듣고 행동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때'에 따라서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때는 지정된 시간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때를 말합니다.
비록 어머니의 부탁이었지만 어떤 이적을 일으키는데 인간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때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 그 때를 따라서 사셨습니다.
여기 어머니 부탁에 불순종하는 아들로 보면 안됩니다. '여자여' 라는 최고의 존칭어로 어머니의 인간적인 생각을 예수는 거절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여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려는 것밖에 안됩니다. 나는 그것을 위하여 온 자가 아닙니다. 여자여 당신의 요구는 틀렸습니다. 나는 "때" 즉 '십자가의 죽음'을 위하여 온 자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은 그 어머니를 깨닫게 하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넷째로 물이 포도주 된 기적의 원동력은 뭐니뭐니해도 순종의 결과입니다.
5절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하라'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한 것입니다.
또한 8절을 보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역시 그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순종한 것입니다.
●사실 그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선뜻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①그 방법이 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깨끗하기로 소문난 민족입니다. 깨끗함에는 단순한 위생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례도 그 중에 하나로 이것은 위생적이면서도 종교의식으로 중요한 행사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결례의 항아리도 그들이 식사 전에나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손을 씻는 항아리로써 위생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예식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그 항아리는 포도주를 담는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발을 씻고 손을 씻는 세수 대야에 고깃국을 담는 비위생적이고, 비상식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하인들이 선 듯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②비과학적입니다.
포도주는 잘 익은 포도로 담습니다. 그 당시에는 포도주 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 집에서 적당한 방법으로 담가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한 가지 원리는 포도주는 포도로 담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순수한 물(H O)만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오늘 본문이 처음이고 마지막 사건입니다.
하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았지만 포도주를 담글 포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란 당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를 깨트리고 짜서 그 액체가 상당 기간 동안 발효되도록 보관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포도주를 만들겠다고 하인들에게 명령을 했기 때문에 선뜻 순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③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인들의 입장에선 이것이 정말 포도주인가? 괜히 떠다 주고 핀잔이나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인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 행하였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물로 된 포도주를 떠다가 연회장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처음 보다 더 좋은 포도주의 기적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하인들이 떠서 가지고 가는 동안에 포도주가 되었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상식이나 과학을 초월합니다. 이 세상에는 상식이 벗어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 색깔은 진흙탕 색깔이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푸른 풀을 먹고사는 소에게서 짜내는 우유는 푸른 색깔이어야 그것이 상식입니다.
죽음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임하고 젊은이는 나중에 죽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엔 비상식적인 것들이 더 많습니다.
더욱이 성경 안에는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사건, 40년 동안 굶어 죽지 않고 광야를 횡단했던 사건, 하룻밤 사이에 창 한 번 던진 일이 없었지만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던 앗수르 병사 18만 5천 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 등 '창-계'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상식적이든 비상식적이든,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그대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사45:9절을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피조자는 창조자의 절대 권능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①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능력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1분에 100미터를 달리면 하나님도 1분에 100미터밖에는 달릴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패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②사탄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③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과소 평가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을 거역했거나 불순종한 사람들은 모두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2:8절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라는 대로합시다! '하겠습니다. 힘쓰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시다. 그리하면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순종의 사람이 됩시다. 모든 역사는 순종의 결과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①이치에 맞지 않아도 믿고 순종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천지창조 사건이나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 십자가나, 부활사건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이해하는 책이 압니다. 믿으라고 주신 책입니다. 믿고 보니 깨닫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의 비밀입니다.
②힘이 들어도 순종합시다.
사르밧 과부가 이런 순종했다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지키기 어려운 힘든 사명을 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로 가는 삼일 길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가 평생에 걸어온 길보다 더 길었을 것이며, 평생에 졌던 짐보다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이 들어도 끝까지 지시한 말씀을 좇아 나아가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③자존심이 상해도 순종합시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예수가 당신들을 불러서 '무엇을 시키면 그대로 순종하시요' 라고 했습니다.
연회장과 주인이 있는데 예수의 말을 듣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두 세통 더는 여섯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갔다 드리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종의 심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합니다(욘 1:2). 요나의 감정은 도무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우리 민족들에게도 전할 자가 많은데 니느웨까지 가야 하는가?
또 하필이면 이방 중에서도 선량한 민족들이 많은데 유대 민족을 괴롭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을 전해야 하는가? 만약 내가 늬느웨에 가면 나는 민족의 반역자요 매국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편치를 못한 것입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요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스로 향하여 가기로 작정하고 배를 탓습니다. 얼마를 가지 못하여 대풍을 만났습니다. 요나는 상한 감정을 풀고 하나님께 항복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달려갔습니다.
자존심이 상해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고침받기 위하여 자신을 개같이 취급하는 주님 앞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자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했습니다.
④억지로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잔칫날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날입니다. 아무리 하인이지만 이날에 두 세통 더는 항아리 여섯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우는 것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실 때 구루네 사람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다가 예수 만났습니다.
■정경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기독교적 교훈을 주는 외경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산에 올라갈 때 각자 돌을 하나씩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돌을 하나씩 들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아주 대조적으로 돌을 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 성질이 급해서 덜렁대는 것이 흠이지만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베드로는 힘에 겨울 정도로 큰돌을 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은 무슨 돌하고 콧방귀를 뀌며 조그마한 돌 하나를 들고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어느 듯, 산에 다 올라가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해서 기도하시고,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가지고 간 돌이 떡이 되었습니다.
그 날 베드로는 포식을 했고, 가룟 유다는 자기가 들고 간 손바닥만한 떡 하나 먹고 쫄쫄히 굶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 어질기로 유명한 순 임금님이 하루는 신하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아주 엉뚱한 일을 시켰습니다. 즉 밑 빠진 독에다 물을 부어서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하들은 밑 빠진 독에 물을 길어 붙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임금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신하는 이것이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임금님이 명하신 일이기에 끝까지 물을 길어다 부었습니다. 아무리 부어도 밑 빠진 독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우물물이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어느 듯 우물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물 바닥이 번쩍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니 우물 밑바닥에 커다란 금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임금님 말씀에 순종한 신하는 그 금을 임금님에게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러자 순임금님은 순종한 신하를 크게 치하하시고, 그 금을 상금으로 주셨습니다.
때로는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답답하게 보입니다. 융통성이 없어 보입니다. 지혜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다섯 번째: 기적은 채워져야 일어납니다.
7절 '아구까지 채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이 아구까지 차기 전까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안았습니다. 왜 채우라고 합니까? 깊은 교훈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업자를 원하십니다. 무슨 동업자냐고요? 믿음의 동역자를 찾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혼자 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같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구까지 채워라'는 말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그 항아리 속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라! 항아리는 질그릇입니다. 우리 모두는 질그릇입니다. 그 그릇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믿음을 채우고, ●능력을 채우고, ●찬양으로 채우고, ●기도로 채우고, ●봉사로 채우고, ●전도로 채우고, ●순종으로 채울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째째한 역사가 아닌 풍성한 역사! 여섯 항아리에 차고 넘치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얼마나 크고, 풍성하게 넘쳤는가를 잘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 기적의 역사가 단지 사이다 병에 조금 담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돌로 만든 큰항아리 여섯 개, 그것도 아구까지 꽉 채운 량이었으니 질적으로, 양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기적이었는가?
주님의 기적은 믿음이 차야 일어납니다.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로 가득 채워 넣으면 주께서 우리들의 전 삶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나에게 채워진 기쁨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가져가도 모자람이 없는 풍성한 것으로 항상 잔치 집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심령의 돌 항아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웠더니 그 심령 속에 기쁨의 포도주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돌에 맞는 순간에도 그의 기쁨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할/
여섯째: 하나님의 은혜는 체험하는 자만이 압니다.
9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실은 음식 전문가인 연회장은 알 수 까닭이 없었으나, 무식한 하인들만 알았습니다. 영적인 지식도 이처럼 유식한 사람에게 가리워 질 때가 있습니다. 무식하지만 열려진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알려집니다.
열린 마음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말씀에 그대로 행했던 하인들만이 체험하는 은혜입니다.
기독교는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는 아룸다운 체험을 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곱째: 하나님의 기적은 처음 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축복입니다.
10절에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 말은 처음 것 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포도주가 더 좋았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점점 좋아지는 축복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이 달 보다 다음 달이, 금년보다 내년이 더 좋아질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덟번 째: 왜 주님께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결론부분입니다.
주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즉 주제가 있습니다. 그 해답은 1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①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입니다.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②제자들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믿게 하기 위하여 행한 것입니다.
③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교훈한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예수님의 말씀과 만나면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요 바른 정체성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면 가치가 달라지고, 인생의 맛과 멋이 달라지고, 색깔도 달라집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쓰임새와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변해야 합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김익두 목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소문난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했다고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질 않습니다. 결국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보냅니다. 동네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몇 일 후 김익두가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누군가가 시험해보기 위해서 그에게 오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는 미소를 지으며 '김익두는 죽었다. 만약에 그가 죽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오늘이 제삿날이었을 것이다'라고 하며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은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결혼 잔치 집에서 행하셨습니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가정을 축복하셔서 늘 기쁘고 은혜로 충만한 가정이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축복에 주님을 모셔들이고 그 분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3년 1월 12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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