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사람, 모세! (민 12:1-16)
저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기에 좋은 추억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요즘은 별로 보이지 않아 아쉬운데 옛날에는 제비가 많았습니다. 오월이면 날아와 부지런히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아 길러 9월이면 강남으로 떠나는 제비, 저는 어릴 적에 그 제비를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우리 시골집 마루 위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기 때문에 유심히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비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때 어느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줄 아십니까? 보통 5-8마리를 부화해서 기르는데 차례대로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 입을 크게 벌린 새끼에게 줍니다. 어떤 때는 한 새끼에게 서너 번씩 줍니다.
왜요? 무조건 입을 크게 벌린 놈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배부르면 입을 덜 벌리게 되고 다른 놈이 더 벌리게 되어 얻어먹게 됩니다. 그래서 입을 크게 벌린 놈은 아주 실하게 큽니다.
그러나 입을 잘 벌리지 못한 놈은 늘 밀립니다. 결국은 제비집에서 밀려 떨어집니다. 제가 가엾어서 그 새끼를 책상을 밟고 올라가 제비집에 올려 주면 또 떨어집니다. 떨어진 놈은 어미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죽게 내버려둡니다. 그러다 보니 다 커서 어른 제비가 되어 날아가는 놈은 네다섯 마리밖에 안 됩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제비 마냥 입을 크게 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아멘! /할/
또 하나, 발견한 것이 있는데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면 새끼는 무조건 받아먹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큰 먹이를 물어다 주는데도 무조건 받아먹습니다. 먹이가 뭔가 살펴보고 입 벌리지 않습니다. 무조건 주는 대로 더끔더끔 받아먹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어미가 새끼 형편에 맞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제비새끼가 아주 어릴 때는 작은 먹이를 잡아다 줍니다. 그러다 좀 크면 잠자리도 잡아다 주고 큰 먹이도 물어다 줍니다.
여러분에게 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목사가 물어다 주는 하나님 말씀은 더끔더끔 받아먹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것이 뭔가 살펴보고 받아먹으려면 얻어먹지 못합니다. 입을 크게 벌립시다. 아멘!
▶민1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자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 떼를 불러서 한 달 동안 고기를 실컷 먹여 주시고, 먹은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끼어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민11장을 요약하면 ‘백성들의 원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민1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모세의 가족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하세롯이라는 곳에서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민 12장은 ‘형제들의 원망’이라고 요약 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모세가 흑인인 구스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죽자 재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대가 구스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미리암은 십보라도 유대인이 아닌 미디안 족장의 딸이라 맘에 안 들었는데 재혼하는 여인이 구스 여인인지라 맘에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이인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하고 난리를 칩니다.
이들은 이 사건으로 모세가 갖고 있는 지도자의 권위까지 흔들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하면서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시기나 비방은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거나 먼 데 있는 사람이 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데 있는 사람, 특히 나에 대해 잘 알거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그 사람이 밭을 샀건, 아파트를 샀건,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어 수십 억 원을 받았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좀 부러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내가 잘 안 다거나 내 친구거나 아니면 우리 교인이라면 괜히 심통이 나고 배가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지게 됩니다.
말로는 ‘잘됐다, 축하한다, 수고했다’ 온갖 좋은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무언가 좋지 않은 불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이게 탐심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인간이 갖가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를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가르치고 설득해도 못 알아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면서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다 사랑하던 부인은 떠나고 외롭고 쓸쓸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가족인 그들은 모세를 어떻게 했습니까?
힘든 모세를 위로하고 격려 해주고 배필을 만들어 주지는 않고 구경 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할 때 그 재혼을 축하해 주었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비난하고 비방합니다. 단지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했다는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상한 것은 모세는 그들의 비방과 시기를 묵묵히 듣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습니다. 변명하거나 소리 지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비방의 말을 하나님이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회막으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 가운데로 강림하셔서 아론과 미리암을 앞으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두둔하시고 나서 무섭게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나님이 모세를 인정해 주십니다. 또 6-8절을 보세요.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아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님이고, 여성 지도자요, 여선지자였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 드리는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비방했을 때 하나님은 미리암을 징계하면서 문둥병자가 되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절에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리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모세가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시고 그를 붙들어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면 그는 분명히 온유한 사람입니다. 누가 반론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하게되는 바로 그 시점입니다. 모세가 지금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민족의 아주 높은 위상을 가진 이 지도자가 어쩌자고 에티오피아 여자를 부인으로 맞은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에디오피아 사람은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도 아름다운 팔등신 미인에게 '뿅' 간 것입니다.
그러나 함의 후예인 구스 여인을 모세가 취했다는 사실은 민족 지도자로서,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위치와 입장을 헤아려 볼 때에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백세도 넘는 그 나이에 이방여인을, 그것도 저주받은 검은 여인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누나와 형이 그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운 지도잡니다. 그의 영적 지도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아론도, 미리암도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하고만 이야기하였느냐 우리하고도 이야기하셨느니라"는 내용을 통해서 보면, 아론과 미리암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들을 가나안으로 영도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미리암의 생애를 통하여 모세를 조명해 본다면, 남동생인 모세 자신을 위해 생명 내건 모험을 걸었던 '미리암'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모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인물이 바로 미리암입니다.
핏덩어리 모세를 역청을 칠한 갈대 상자에 넣어 애굽인의 눈길을 피해 나일강에 띄운 여인이요, 행여나 그 어린 생명이 죽을세라 끝까지 갈대 숲을 따라 살핀 여인이요, 바로의 딸에게 모세가 발견되자 재빨리 달려가 유모를 필요로 하느냐고 묻고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친어머니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고 어머니를 유모로서 데려다 줌으로, 모세는 진짜 어머니의 품에서 기적같이 성장하여 애굽 궁중에서도 히브리 교육을 어머니에게서 배우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길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여인입니까? 이러한 여인이 동생 모세를 나무라듯이 비방한다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종이 비방 받는 일에 대하여 추호도 용납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비난을 받게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모세는 모든 사람보다 가장 온유하다, 그런고로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 그의 충성은 최고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모세 편을 들어주십니다. 놀랍고 감격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생애를 우리가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혈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또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애굽사람이 자기 동족을 괴롭힌다고, 이유야 어쨌든 애굽사람을 쳐죽이는, 그러한 혈기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새겨 주신 소중한 십계명을 새긴 그 비석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걸보고 분노함으로 그 비석을 내려쳐서 깨뜨리는 그런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이제 또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자 반석을 그대로 두 번 혈기로 내려치는 그런 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모세의 이 모든 허물을 다 덮어주시고 말씀하시기를 "저의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 저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온유하다고 하시면 그는 온유한 사람이 틀림이 없습니다.
온유가 뭡니까? 이 온유란 말은 '굽히다, 굴복한다, 혹은 절을 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 단서가 붙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굴복해서 굽히는 게 아니고 스스로 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무서워서도 아니고 보상을 위해서도 아니고 수단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자기를 굽히는 마음, 이것이 온유입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의적으로 굽히는 마음이 온유입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쓰여지는 덕목입니다. 그러나 온유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도 쓰여지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칭할 때에도 쓰여지는 소중한 덕목입니다.
온유! 그래서 삼하22:36절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마11:29절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그 여덟 번 째 열매가 온유입니다.
▶모세를 보자!
하나님이 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라" 할 때에도, 사실은 그가 이 능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끝까지 말을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고로 애굽에 갈 수가 없습니다. 또 애굽에서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사랑을 받고 신세를 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배신한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바로의 궁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해야되겠는데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라는 핑계를 댑니다 만은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가라면 가"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 때에 자기 생각, 자기의 두려운 마음, 인간적인 지식, 판단, 다 버리고 굽힙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는 겁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그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었어요.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나 허물을 다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그대로 수용합니다. 이게 온유함입니다.
또 그는 많은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능력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전설에 의하면은 보좌에 앉아 본 일이 없답니다. 평범한 옷을 입고 언제나 돌 위에 앉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면서 이들을 다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만 번성하게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주마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출32장에 보면 "하나님 정히 그러시려거든 나도 저들과 함께 죽게 해주세요" 이러한 온유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 대한 자기중심적 욕망이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1. "온유"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온유란 말은 당시에는 이런 의미로 많이 쓰여졌습니다. 야성을 가지고 있는 사나운 짐승들이 훈련되어져서 길들어졌을 때 길들어진 모습을 표현할 때 온유하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호랑이나 사자들을 훈련시켜서 주인의 말에 잘 복종할 때, 잘 훈련되어진 개의 모습을 보고 온유해 졌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 온유라는 말이 성경에서 사람에게 쓰일 때는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훈련되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을 표현할 때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길들인다'는 말은, 우리의 정욕과 힘을 빼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힘과 정욕의 방향을 원래 타고난 그 기질을 좋은 방향으로 돌이켜 놓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가운데 생각하기를 "나는 성격이 급해서, 성격이 느긋해서, 나는 성격이 내성적, 외성적, 등등 이렇쿵 저렇쿵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다고 해서 급한 성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급한 성격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급한 성격을 누르고 옳게 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면에서 급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을 잘 훈련시켜 쓰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성품들을 방향을 돌이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지게 될 때 그것이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새우기 위해 나일강에서 구해주시고, 애굽의 궁궐에서 40년간 세상의 최고 교육을 시키시고,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의 특수 교육을 받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광야에서의 40년간의 교육에 대해 어떤 신학자가 아주 재미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교양과목과 목양학과 기본 신학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교양과목은 광야에서 생존하는 법을, 목양학은 길 잃은 양을 발견하고, 보호하고, 인도하고, 양털을 깎고, 잃은 양을 찾기까지의 인내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기본신학은 출3:13에 나오는 말씀인데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말하리이까?" 이 물음에 하나님께서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론, 하나님을 아는 기본신학인 것입니다.
이렇게 8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모양으로 여러 방법으로 교육시킨 하나님께서 모세가 잠시 실수를 하여 비방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비방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은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훈련되어 져서 우리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고, 우리들의 죄 성이 다스려지고, 불같은 성격이 다스려졌을 때 온유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 온유한 사람이지만 불순종하면 거만한 사람이요, 온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말씀에 잘 길들여진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팔려서 애굽까지 간 사람이지만 그는 온유함으로 애굽의 땅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보디발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고, 총리가 되었을 때도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 침묵을 지킵니다.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 왔을 때에도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선대하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온유함으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을 이룬 사람입니다.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베드로도, 예수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온유한 일꾼들이 다 되었습니다.
2. 그렇다면 언제 온유함이 우리에게 나타나는가?
①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함으로 받아야합니다.
약1: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를 책망을 받았을 때 일국의 왕이지만 왕좌에서 내려와서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삼하12:1-13)라고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의해 훈련되어져 있고 말씀에 의해 훈련되어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함으로 받습니다. 온유는 말씀으로 잘 길들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②주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마11:29절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팔복을 가르치신 이후에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6:9절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님의 기도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 마음을 내 놓고 보고하고 상의하고 호소하고 간구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데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며 살면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어처구니없는 일들, 불행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보면 모두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자꾸만 사고가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 없이 살아가면 비인간화되고, 짐승화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살되 좀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늘의 소리를 들으라"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특히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합니다. 이 하늘의 소리는 조용히 엎드려야만 들립니다. 엎드려서 깊이 묵상을 하면 내 속에서 이 음성이 들립니다.
양심을 통해서 들리고 마음을 통해서 들리고 생각을 통해서 들려 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살아야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 늘 만나자는 당부"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쩨쩨한 하나님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이기에 못보고는 못살겠다는 하나님의 사랑표현이십니다.
주의 종(자녀들)은 날마다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을 만나야 삽니다.
③주님의 기도의 모습을 배우자!
눅22: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눅22: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너희는 네게 부르짖으라!" 땀을 짜며, 피를 짜며, 생명을 짜며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3. 온유한 자는?
①자기를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온유라는 말은 본능과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을 말합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어떤 일보다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므로 우리들은 잘못인 줄 알면서도 해서는 안될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잠4: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25: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온유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잠16: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②온유한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삼상15:2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③죄를 범한 자에게도 우리는 온유해야 합니다.
갈6: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바로잡다'는 말씀은 '제 자리를 찾아 주다,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들추어내어 정죄하기 보다는 죄에서 건져내어 죄를 짖지 않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영혼을 사랑함으로 안타까이 여기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잘 훈련되어진 성도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긍휼히 여기고 온유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④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온유해야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반대와 비방 속에서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침착하게 행동합니다. 모세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거슬린다고 해서 대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자에게 온유함을 나타내 보여야합니다. 내가 온유함으로 대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전에 내가 내가하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의해 훈련되어져 있는 사람은 반대자들 앞에서도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딤후2:24절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4.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키가 5척밖에 안 되는 작고 마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항상 검소하게 무명옷을 입었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온유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무저항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 차례 투옥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늘 하나 들어보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았으면서도 300년 동안 그들을 지배해 온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어느 분이 그의 위대한 삶을 평가하면서 "그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토록 작은 체구를 가지고 이렇게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온유의 능력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솝의 우화에 해와 바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이서 서로 자기의 힘이 더 강하다고 주장하다가 지나가는 어느 신사의 외투를 누가 벗기는지 내기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강한 바람이 벗기려고 했지만 오히려 바람과 추위를 이기려고 더 잘 붙들었기 때문에 실패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해가 따뜻한 햇볕을 비추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은 스스로 외투를 벗었습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강하고 힘이 있는가를 우리들에게 잘 말씀해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성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의 기본 자세이기도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땅은 어떤 부동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땅위에 모든 범사가 땅의 복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온유한 마음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잘 섬기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 온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5:22-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씀해 주셨는데 온유가 8번째 열매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한때 유럽 세계를 정복했던 영웅이었지만, 그의 말년에는 '세인트 헬레나'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온유한 예수가 세계를 점령했다"고 했답니다.
▶여호수아가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하여도 모세가 느보 산에서 죽지 아니하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모세는 워낙 큰 거목이었기 때문에 그 그늘이 너무 커서 누구도 그 뒤를 이어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의 그늘을 없이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느보 산에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스스로 자신의 그늘을 없이하였고, 그 때문에 여호수아가 능히 모세의 뒤를 이어 훌륭한 백성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모세 같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욕심을 내야할 부분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의 자기 부인입니다. 느보 산에서 후계자 여호수아를 안수하고 백성들을 축복하고 죽을 수 있는 그 훌륭한 겸손입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당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마5: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땅은 부동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땅위에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가령 건강도, 제물도, 부귀영화도 다 그 땅위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기업은 자기의 것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시37:11절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할/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요 2:1-11) (0) | 2022.02.02 |
---|---|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사56:6-8/대하7:11-16/막11:15-18/마21:12-17/눅19:45-46) (0) | 2022.02.02 |
초대교회를 배우자!(부흥하는 교회) (행 2:42-47) (0) | 2022.02.02 |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전7:13-14) (0) | 2022.02.02 |
형통케 되는 축복의 통로는? (신 29:1-9) (0) | 2022.02.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