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전7:13-14)
인생의 가는 길에는 순탄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경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가 있는 반면에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칫하면 환경자체를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따라 감사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 용기를 잃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생애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제반사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계획과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욥12:14절에서 고난의 대명사인 욥도 말하기를 "하나님이(그가) 헐으신 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 즉 놓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과 환난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생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시련과 환난을 피하려 하거나, 그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한 채 불평하고 원망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을 주시고 그 고난을 통하여 주시고자하는 아름다운 계획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재산이 다 날라 가고, 생떼 같은 열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천재지변으로 떼 죽임을 당하였고, 그렇게 건강하던 육신에 질병이 들어 젯 더미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조강지처인 마누라가 와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욥2:9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믿음)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나 욥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습니다.
욥1:21-22절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세우실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아는 것이 귀합니다.
욥23: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42: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제목 소개!▶
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
여기 '형통한'이란 말은 '좋은', '선한', '아름다운'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이란 '성공한 날', '번영의 날', '평안의 날',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하는 일마다 잘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즉 육신적으로 강건하고, 사업이 잘되고, 영적으로 평안한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①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형통에 복이 있습니다.
신29:9절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수1:8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②하나님께 기도하면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③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할 때, 여러분! 형통한 복을 받습니다.
시122:6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
④하나님 앞에 바른 회개가 이루어질 때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잠28: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⑤열심히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시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형통할 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형통할 때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뻐하라'는 말은 '좋게 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좋은 시대에 선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때를 이용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적인 형통이 있을 때 선교하며 구제하며 선한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건강할 때 주를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평안한 기회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힘써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일이 잘될 때, 형통하게 될 때 방탕하기 쉽습니다.
가난하고 궁핍에 처했을 때에는 하나님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는데, 부하게 되니 교만하여지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배반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삼상12:4절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전3:12절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기뻐하라는 복음은 사도 바울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벌써 솔로몬을 통하여 주신 복읍입니다. 솔로몬은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전3:12과 22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기뻐할 줄 아는 것이 행복이요,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건강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밤에 단잠을 잘 수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집이 있고 부모형제 처자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마음껏 기도하고 예배 드릴 수 있는 교회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솔로몬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밤에 단잠을 잘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집이 있고 부모형제 처자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할 수 있는 겅강한 몸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마음껏 기도하고 예배 드릴 수 있는 교회가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분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은혜의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처지에 자족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생각과 성품이 단순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형통한 날은 성공하며 기뻐하는 날이요,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날을 맞이할 때 보통 사람들은 교만하여 쾌락과 방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더욱 겸손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나의 형통은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형통할 때 모두 기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곤고'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 보면 '곤란하고 괴로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이란 환난의 날이요, 실패의 날이요, 불행의 날이요, 재난의 날을 말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지배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언제 이런 곤고한 날이 다가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성도를 훈련하시기 위해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고(욥, 다니엘과 세 친구), 또 하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오는 경우입니다.
롬2:9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대부분의 사람은 곤고한 날에 쉽게 비관하며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대하28:22절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곤고한 날이란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역경과 고난과 환난의 날을 말합니다. 불치의 병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전쟁의 재난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바울처럼 매를 맞는 일도 감옥에 갇히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곤고한 날들이 많이 다가옵니다.
곤고한 날을 당할 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교만한 마음으로 급하게 노를 발하지도 말고 인내하며 겸손하게 깊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전7:8-9절에 보면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것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우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겠습니까?
①나의 부족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곤고한 날은 나 자신을 솔직하게 돌이켜 보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했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열심히 기도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하고 부지런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곤고한 날들이 나로 하여금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만들고 나를 반성하게 만들고 나를 뉘우치게 만든다면 곤고한 날은 나에게 화가 아니라 복이 될 것이고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될 것입니다.
②곤고함을 당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보다도 더 극심한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극심한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곤고함을 당할 때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1: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사실 우리가 곤고함을 당해 보아야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을 생각하게도 되고 이해하게도 되고 동정하고 사랑을 베풀게도 됩니다.
▶정신대에 끌려가서 한 평생을 극심한 치욕과 고통 가운데서 살아 온 어느 할머니가 길거리에서 배고파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 주며 사랑을 베풀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유 전부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써달라고 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난 일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만약 곤고한 날들이 나로 하여금 곤고함을 당하는 이웃들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게 만든다면 곤고한 날은 나에게 화가 아니라 복이 될 것이고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될 것입니다.
③곤고한 날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고난이 아니라 자기 몸에 부어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후1: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히브리서 편지에서는 고난 당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주목해서 바라보라고 권면했습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도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벧전2:19). 곤고한 날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날입니다.
④곤고한 날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곤고한 날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운데, 형통한 날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사방은 온통 캄캄해 집니다. 터널은 종착점에 이르는 한 과정입니다.
곤고한 날을 당할 때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불치의 병에 걸렸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와 야곱이 도망을 갔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40년 광야의 길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신8:7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결국 우리 모두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십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곤고한 날에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곤고한 날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할 수 있게 만든다면 곤고한 날은 나에게 화가 아니라 복이 될 것이고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될 것입니다.
⑤나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곤고한 날을 당하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또는 환경에 돌립니다. 그러나 곤고한 날에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자신의 참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들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⑥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호6:1-2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생각하라'는 말은 '보다', '관찰하다', '숙고하다'라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시절은 자신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시119:71절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곤고한 날에는 자신의 연약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일들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을 비관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곤고함을 통해 유한한 인생임을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깨달아야 하고, 곤고함을 통해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곤고한 날에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곤고한 백성을 구원"(삼하22:28)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곤고한 날이 닥치면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결코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요, 하늘을 바라보는 신령한 자들입니다.
시34:6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22:24절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3.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루에 밤과 낮이 있고 일년에 춘하추동 사 계절이 있듯이 인생 여정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3:4절에 보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조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3: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또는 조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조화의 지혜입니다.
사실 세상에 낮만 있다면 사람이 살기가 힘들 것이고 세상에 여름만 있다면 살기가 지겨울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형통한 날만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게을러지고 안일해지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곤고한 날만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고 우울하고 약해지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바울에게도 형통한 날들과 함께 곤고한 날들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불행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조화이며 우리의 유익이며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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