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소크라테스의 부인 이름은 "쿠산티펫"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철학자인 남편에 비해 상당히 고상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이 여인은 수다가 많았다고 합니다. 수다를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그 수다를 어떻게 다 들어주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들을 만 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또 이 여인은 마음도 고약했다고 합니다. 수다를 떨 때 남편이 대꾸를 하지 않으면 나가서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머리에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참느냐고 물으면 말하기를 "천둥친 다음에는 비가 오는 법"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부인을 악처라고 불렀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악처 덕분에 소크라테스가 철학자가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참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옛날이나 되니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00년경에 살았던 그 옛날의 사람이지만 오늘 현대인들이 그를 통해서 인간의 멋을 느끼게 되고 깊이를 느끼면서 그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사람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서로 반비례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나무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인내심도 잃었고 희생정신도 잃었고 그렇게 풍성하던 감정들도 잃어버렸고 예의도 잃고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주 삭막하고 메마른 마음들만 남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참 인간다운 인간상은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참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냐"하고 질문을 할 수 있다면 그 질문은 참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그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마음을 품으라" 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이냐 하면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오셔서 낮추시고 종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그 예수를 높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다움"의 요소는 종의 마음을 갖는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세라고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이 마음을 품어 보려고 애를 많이 썼던 분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비를 죽은 두 아들 대신 양자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이 마음이 아마 그 마음일 것이다.
주기철 목사도 그 마음을 품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고문과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참았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도 로마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수를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말로 회유를 할 때, "내 80평생 동안 주님이 나를 한번도 서운하게 하신 일이 없는데 내 가 어떻게 주님께 서운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나는 깨끗하게 죽음을 택하겠다"고 해서 마침내 화형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기관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는 곳입니다.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재능도, 학식도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교회의 공동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지만, 인간의 이익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기관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모이기에 하나가 될 수 없는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기에 불협화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는 불협화음만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이미 부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렘17:9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죄로 오염되어 있는지를, 마15:19절에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이 없는 인간의 모임은 시기와 다툼과 분쟁만이 고개를 들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죄성이 있는 인간의 마음을 깨달은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생활이요,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독론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놓은 헌장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당시에 빌립보 교인들이 서로 싸우고,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갈등이 있을 때 "너희가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느냐, 너희가 하나 되기를 원하느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들 안에'인데 이 뜻은 '너희들의 마음들 속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패된 마음을 예수의 마음으로 개조시켜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품으라'는 뜻은 '태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으로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이것이 겸손입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 이것은 섬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것은 희생입니다.
1. 겸손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이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첩경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인 겸손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기독교는 겸손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의 삶을 통하여 겸손한 자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온유한 양처럼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겸손의 십자가입니다.
이 겸손의 십자가를 메시고 죄악으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겸손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실 때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 나셨습니다(마13:55). ▶예수니은 머리 둘 곳이 없는 가난한 일생이셨습니다(눅9:58). ▶예수님은 천대받는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요1:46).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눅7:34).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신다고 했습니다(요5:30).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셨고 겸손하게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내 마음에 품는다면 이 세상을 사는데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계곡이 깊어야 물이 많이 고입니다. 온갖 산 속의 보화는 계곡 깊은 곳에 있습니다. 빈 그릇이라야 물이 담깁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늘의 보화가 쌓입니다. 성경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①겸손한 자가 은혜를 받습니다. 겸손한 자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모실 수 있고 성령의 은사도 받게 됩니다.
시149:4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가 영안이 열려 하늘 보좌를 보는데, 찬란한 하늘 보좌 한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제 저 자리는 누구의 자리인가를 물었더니 천사가 말하기를 교만한 천사가 쫓겨났으니 겸손한 프랜시스에게 이 자리를 주리라고 합니다.
이 제자가 프랜시스를 시험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프랜시스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 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강도나 악한이 많은데 어째서 선생이 그런 자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프랜시스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에 악한 자가 많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내 대신 저들이 받았다면 저들은 나보다 만 배나 더 주님을 사랑하고 힘을 다해 봉사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사는 감탄하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회에서도 겸손한 자들이 은혜 받고 충성하고 쓰임 받습니다.
사57:15절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니 이는 겸손한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겸손한 자가 되어 더욱 큰 은혜 받아서 크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겸손한 자는 어디에서나 높여지며 존경을 받습니다.
잠18:2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고, 또 잠29: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4:10절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벧전5:6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직장에서 높아지기를 원하십니까? 겸손히 일하십시오. 반드시 그 직장에서 인정받고 높아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존경받기 원하십니까? 겸손히 섬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랑응 받고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게 됩니다.
▶영국 런던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날 기도를 맡았던 장로님이 무단 결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여왕으로부터 왕실 오찬에 초청 받고 주일을 범한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사님은 당회를 소집하고 장로님에게 "주님이 존귀한 분이십니까? 여왕이 존귀한 분입니까? 주님이 준비하신 신령한 오찬이 중요합니까? 왕실 오찬이 중요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답니다. 계속해서 "장로님은 모든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므로 1년 동안 근신토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장로님은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겸손히 순종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 겸손한 장로님은 더욱 존경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깊은 물은 조용합니다. 속이 꽉 차있는 통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입니다. 믿음이 성숙하면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③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시10:17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며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지만 겸손한 자의 기도는 들으십니다.
성전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각각 기도하러 갔습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하여 자기 의로움만 자랑하고 남을 정죄하는 기도를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우러러 감히 머리를 들지도 못한 채 자기가 죄인이라고 회개하면서 고백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비판하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두 사람 중 세리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빕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겸손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④겸손할 때 하나님이 더욱 크게 축복하십니다.
한번 은혜 받기는 쉽습니다.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매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남보다 받은 것이 많음에 감사하고 겸손하면 하나님은 더 많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넘어지게 됩니다.
▶겸손하게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①겸손은 하나님 앞(신전의식)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할 때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늘 의식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인간 중심이 되어 교만해 집니다.
②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한 분이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 하시지 않으시고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늘 낮은데 찾아 가셨고 낮은 자와 함께 하시고 낮은 자의 편이 되셨습니다.
빌2:3절 "아무 일에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③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예수를 본받는 삶을 시작했으며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습니다. 엡3: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셨다"고 했으,며, 딤전1:15절 "죄인 중에 괴수"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습니다.
④자기의 죄와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요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버려야 할 마음은 무엇입니까? 세상 욕심, 허영, 혈기, 정욕입니다. 이 마음을 버리시고 주님의 마음으로 채우십시다. 미움, 시기, 질투가 차 있으면 비우시고 사랑의 마음으로 채웁시다. 근심으로 차 있으면 버리시고 믿는 마음으로 채웁시다. 온갖 불의, 죄악, 혈기가 차 있으면 비우시고 주님의 의로움으로 채웁시다. 불평, 불만으로 차 있으면 비우시고 감사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2. 예수의 마음은 섬기는 마음입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 이것은 섬김입니다. 겸손은 섬기는 종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마20:2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교만은 섬김을 받으려 하고 겸손은 섬기려 합니다. 교만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을 이용하며 겸손은 남을 살리며 잘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며 은혜 받았던 베드로는 훗날 믿음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젊은 자들아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겸손은 자기를 희생시키고 남을 세웁니다. 자기 유익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겸손히 섬김을 보이셨습니다.
▶대학교에 총 학생회장이 되면 굉장합니다. 어느 대학에 6명이 후보로 나와 각자 정견을 발표하는데 한 학생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이 저를 회장으로 뽑아 주시면 저는 여러분을 위한 걸레가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몰표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걸레 역할을 하겠다는 그 학생의 다짐엔 진정한 섬김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걸레는 더러운 것을 씻는 것입니다. 남의 더러운 허물을 씻어주고,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고, 이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을 닦아주는 것이 걸레의 사명인데, 예수님께서 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이 세상의 모든 더러운 인간의 마음을 닦아주고, 눈물을 씻어주고, 오염된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섬김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존경받는 분이 누구입니까? 다 섬기는 분들이 존경받았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보다 많이 가진 자요,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를 많이 버린 사람들입니다. 소유를 많이 가진 자가 성공한 자요, 위대한 자는 인격을 아름답게 만든 자인데 인격의 아름다움이 뭡니까? 겸손, 섬김,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명예와 영광과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겸손이 복종의 삶을 살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순종은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지만, 복종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종에는 완전한 복종입니다. 왜냐하면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완전한 복종입니다.
신앙에는 순종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입니다(삼상15:22).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시면 순종할 뿐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시니 순종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니 서로 사랑할 뿐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시니 기도할 뿐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니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배워야 됩니다. 힘이 들어도 부단히 배울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히5:8절 "그(예수)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습니다.
길들여진 말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기수에 의해 내려치는 채찍으로 명마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성도는 순종할 줄을 모릅니다. 소는 코를 뚫고 멍에를 메는 고통이 있을 때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닥친 고난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순종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이 고난의 훈련장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마귀의 속삭임에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요구에 끝없는 복종만이 있어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개척 교회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고난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고난 없이 편하게 예수님을 믿으려는 생각으로 큰 교회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림의 식구들은 남들이 회피하는 고난을 감사함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의 훈련장에서 아픔을 함께 나누고, 눈물로 씨를 뿌리며, 성도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1:19-20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4. 예수의 마음은 곧 희생의 마음입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희생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철저한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대속의 죽음으로서 죄인을 위하여 지는 십자가였습니다.
요12: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의 씨앗이 싹을 내기 위해서 껍질을 벗습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 꽃잎을 떨굽니다. 열매는 씨앗이 되기 위해 스스로 썩습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서 비단으로 된 자기 무덤을 뒤에 남깁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한국교회 100년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한 여종이 있습니다. 그 여종이 백선행집사입니다.
그는 16세에 자식도 하나 없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 먹고, 안 쓰고, 삯바느질하여 번 돈으로 재봉틀을 사서 200냥을 벌었습니다.
200냥을 벌어놓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 시아버지, 남편 좋은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써서 잘 모실 수 있는 선산을 사야지' 하고는 모은 돈 200냥으로 선산을 구입하려고 먼 친척 뻘 되는 사람에게 산을 사달라고 했더니 대동강변에 있는 산을 하나 사 주었습니다.
산 문서를 받아 쥔 백 과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무덤을 이장하려고 산 구경을 가보니 이것은 산이 아니라 나무하나 살 수 없는 바위산이었습니다. 너무나 크게 실망하였으나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려니 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 산을 샀더라면 그가 망할 것인데 이 손해를 나에게 돌리시니 감사합니다."
백선행집사는 예수님 마음으로 이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일로 백 과부는 망했다는 소문이 평양에 자자했습니다. 그 후에 일본 사람들이 대동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계획하고 시멘트 공장을 세우려고 석회암 지질조사를 하던 중 대동강에 있는 석회암산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주인을 찾으니 백선행 집사 땅이었습니다.
기업주 오노타는 소개인을 넣어 300냥에 산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선행 집사는 팔지 않는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거절하므로 더 받으려는 줄 알고 나중에는 일백냥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거절하자 나중에는 오천냥을 준다고 했는데 또 거절했습니다. "이 산은 절대로 팔 수 없으니 절대로 오지 말라" 했습니다.
그들은 백과부가 석회암이라는 것을 알고 베짱을 부리는 줄 알고 산값의 백배인 2만냥을 준다고 했습니다. 또 거절했습니다. 드디어 일본 사람은 백집사가 목사님 말씀은 잘 듣는다는 얘기를 듣고 도지사를 동원하여 백과부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에게 설득하도록 했습니다.
목사님은 심방을 하여 산을 팔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백선행 집사는 "목사님, 제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백냥에 이 산을 사가지고 사람들이 나더러 망했다고 하는데 이 산을 이만냥에 사간다면 그 사람은 망할게 뻔한데 그 사람이 망하는 것을 어떻게 봅니까? 믿는 내 양심으로는 나 혼자 망하고 말지 다른 사람 망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자기 산이 석회암 산임을 알고 이만냥에 산을 팔았습니다. 그는 그 재산으로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 회관 건물을 짓고, 평양신학교 재단 설립에 예산을 바쳤습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사회장을 치뤘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한 집사를 위해서 사회장을 치룬 예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마음을 품고 착한 마음으로 남에게 유익을 주려고 자기를 비우고 선하게 살았기에 후대에 그 이름을 선행이라 지어 불렀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는 겸손, 섬김, 순종, 희생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별세의 마음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 마음이 내 마음이 됩니다.
성도는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결코 이기주의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빌2:4절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희생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러분! 저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의 마음, 섬김의 마음, 복종하는 마음, 그리고 희생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 이것은 높아지심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였습니다(9절). 이것은 곧 최고의 높은 자리로 올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보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에 끓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 세계가 예수님께 경배하며, 복종하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낮아집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죽기까지 복종합시다. 눅14: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요셉은 노예로, 죄수로까지 낮아진 자리에서 애굽의 총리로 높아졌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의 양치기로 낮아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높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철저히 교만이 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낮아지므로 기독교 선교역사에 전무후무한 샛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십시다. 겸손한 예수의 마음으로 바꾸십시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잠15:33).
예수님의 마음을 가짐으로 마침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손에 의해 높아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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