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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7-28)

by 【고동엽】 2022. 1. 26.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7-28)

 


빌립보의 원래 이름은 크레니데스라는 이름입니다. 이 말은 '작은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주 유명한 판게우스라는 금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크레니데스는 처음에는 아주 보잘 것이 없는 조그만 지역이었는데 금이 많이 생산되는 바람에 당시 마게도냐 왕 빌립 2세가 그곳을 정복해서 자국민을 많이 이주시켜 놓아 큰 도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빌립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도시에 사도 바울이 방문을 했습니다. 그때가 50년경이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 집에서 마침내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루디아 집에서 세운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은 그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다했고 애착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교회에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휩쓸고 있던 두 가지 극단의 풍조입니다. 이 두 가지 풍조가 마침내 빕립보 교회를 아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쾌락주의입니다.

 

이 쾌락주의는 윤리적인 실천이나 절도 있는 삶을 무시하는 신앙 형태입니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죄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살아가는 데 윤리적인 것은 무시되도 괜찮다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 쾌락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무질서한 삶이 뒤따랐습니다.
그뿐 아니고 이 쾌락주의에서는 인생은 아주 짧은 것인데 괜히 고민하면서 복잡하게 살지 말고 쉽고 단순하게 살며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 강조했ㅅ브니다. 그리고 죽음 따위는 없는 것이고, 살다가 내가 죽은 후에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 죽음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쾌락주의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이 사상이 그 사회를 휩쓸었습니다. 인생을 복잡하게 살지 말고, 진지하게 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쉽고 단순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치 아프게 죽음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말고, 심각해지지도 말고, 괜히 미래를 생각하느라고 오늘을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살자는 풍조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만연했던 풍조입니다. 그러니 그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이 풍조가 빌립보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하나의 신앙 형태로 작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사상은 그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보면 그 사상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가만히 이 세상의 풍조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오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런 인생관이 아주 팽배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들은 이 풍조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풍족한 돈을 타 가지고 마음껏 쓰고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이 풍조에 물들어 있는 아이들입니다. 좋은 차를 타고 돌아 다니면서 밤을 즐기고 색을 찾아 돌아다니고 인생을 즐깁니다. 수고롭게 돈을 벌어야 하는 염려도 없고 문제가 생기면 배경 좋은 부모가 모두 해결해 주고 그래서 밤낮 없이 마시고 즐기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여러분, 그 아이들에게서 어디 내일을 볼 수 있으며, 거기 어디에 고민이 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고, 인생에 대한 책임감인들 있습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속력을 다해서 질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폭주족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붙잡아 놓고 경찰이 물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고 나서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그랬더니 대답하는 말이 "신나게 달리다 죽으면 그만이지요" 그럽니다. 거기에 복잡한 생강이 없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단순한 생각입니까? 거기에 고민이나 체면이나 구속이나 어떤 틀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단순함 단단함 그것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해지면 규모가 없어지고 무질서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요즘 청소년들을 볼 때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청소년들이 옷차림도 단정하게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깎고 깔끔하고 세련되게 옷을 입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요즘 아이들의 옷 입는 모양이나 머리 모양을 한번 눈여겨 보십시오. 꼭 거지들 같습니다. 속옷은 바지 속에 넣어 일어야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속옷이 밖으로 보기 싫게 나오도록 하고 겉옷을 입고 다닙니다. 또 머리 모양을 보면 깎다가 중단한 모양을 하고 다닙니다.
모두 질서나 단정함이나 깔끔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냥 무질서하게 풀어 놓고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유행이고 멋입니다.
이것이 바로 쾌락주의의 일단의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규모나 질서나 책임이나 윤리는 없습니다. 있다면 자유 분방함과 무질서와 단순화뿐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이 풍조가 세상을 휩쓸었고 이 풍조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생활은 기독교 신앙의 적입니다. 규모 없는 생활, 오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생활, 현실만을 쫓는 생활, 이것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풍조를 강력하게 경고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금욕주의입니다.

 

쾌락주의의 정반대는 금욕주의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쾌락주의와 함께 이 금욕주의 즉 율법주의가 깊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쾌락주의와는 정반대로 아주 엄격한 금욕을 강조했고 엄격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해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혼동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은 이 금욕적인 생활을 실제로 아주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늘 긴옷을 입고 다녔고, 길거리에 서서 기도를 했고, 걸을 때는 천천히 걸었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고, 아무 집에나 함부로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음식도 아무것이나 먹지 않는 아주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속죄일에는 금식을 하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공을 세우기 위해서 일주일 중에서 월요일과 목요일 이틀씩 철저하게 금식을 했고, 전통 의식에 따라서 엄격하게 금욕 생활을 했습니다.
그 당시 세네카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금욕주의자였습니다. 자기를 학대하면서 철저하게 금욕하는 불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같은 금욕주의는 중세기까지 계속되어 갑니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세상을 잊고 망각하고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서 수도하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가장 경건한 신앙 생활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흠모했고 또 그런 생활을 본받아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이런 신앙 형태가 있습니다. 오늘도 부수주의 교단에서는 철저한 경건 생활을 강조합니다. 주일날 물건 하나 사는 것을 죄로 여깁니다. 주일날 놀러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절제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수난절 때 금식하는 날에는 자신들은 물론이고 집안에 있는 짐승들까지도 금식을 시킵니다. 얼마나 철저합니까?
또 이런 신앙에서는 부부 생활도 죄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가끔 상담 전화를 받아 보면 밤만 되면 남편이 사탄같이 보인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이나 토요일이 되면 아예 방을 따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주 잘못된 신앙 형태입니다. 지나치리만큼 엄격하게 바리새적으로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다 보니까 이런 생활 형태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삶을 수도 생활하듯이 살아갑니다. 산속은 아니지만 골방 생활을 즐겨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아주 편협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 나처럼 되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죄인으로, 적으로 여겨 버립니다.
그래서 보수주의에는 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보수주의 교단일수록 파가 많습니다. 적이 많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나처럼 살라고 했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인은 생활이 엄격해야 합니다 절제가 있어야 하고 경건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자기를 학대하면서까지 수도하고 금욕하고 세상을 아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은 쾌락주의와 함께 아주 좋지 않은 극단주의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로 이 같은 상대적인 두 신앙 형태로 대립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유 분방한 신앙 형태였습니다. 또 하나는 아주 엄격한 통제의 삶을 강조하는 바리새적인 신앙 형태였습니다. 그러니 그 빌립보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본분을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너희는 일심으로 그리고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보편주의입니다.

이것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생활입니다. 누구나 용납하고 누구나 받아들이는 생활입니다. 복음의 생활은 한 뜻으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서구의 신앙 체계를 보면 금욕주의와 이 기독교의 보편주의가 만나서 오늘의 서구 기독교의 신앙 형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기독교의 신앙 형태를 보면 한편으로는 경건하면서도 또 한편을 보면 극히 보편적입니다.
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들고 한국 땅에 들어옵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계급을 허물고 벽을 허문일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고쳐진 것이 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양반 상놈의 계급이 타파되고 남녀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쯤인 1880년경에 남녀의 구별이 얼마나 심각햇습니까? 그래서 교회서도 처음에 예배드릴 때는 칸막이를 해놓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자만 양쪽을 볼 수 있었지 남녀석에서는 서로를 볼 수 없도록 막아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칸막이가 없어지고 차츰 남녀석도 구분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개혁입니다.
또한 계급의 장벽도 허물어 버렸습니다. 처음 보편주의 신앙 정신을 가진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승동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그 교회는 처음에는 양반들만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청계천에 나가서 백정들을 데리고 교회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마침내 양반과 백정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파격적인 일입니까? 그래서 마침내 이 땅에서 계급의 장벽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보편주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편을 만들고 벽을 만들고 극단에 치우쳐서 서로 당을 짓고 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강조한 후에 한 뜻 한마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삶을 즐기는 것은 쾌락주의와 다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우리들이 말씀 안에서 즐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영적 생활로 삶의 질을 높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삶을 즐기는 생활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매일같이 금식이나 하고 골방 생활을 해서 파리한 모습으로 극기적인 생활을 하고 언제 보아도 음산하고 초라한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힘있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면서 이웃의 어려운 점을 조와주고 채워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면 그 생활에는 맛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행복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생활은 누리는 생활이고, 즐기는 생활이고, 향유하는 생활입니다.

 

셋째는 헌신의 삶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내가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바치고 섬기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삶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정신이 성숙하게 되면 편안한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보면 주부들이 병원에 나가서, 자선단체에 나가서, 무의탁 노인들의 집을 찾아가서 빨래를 해주고 봉사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러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무료로 봉사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봉사를 하려고 하면 고생도 되고 땀도 흘려야 하고 수고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일을 통해서 기쁨을 얻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봉사하고 헌신하고 누군가를 섬길 때 어떤 삶의 맛이나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헌신의 삶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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