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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운명의 세 때! (히 9:27-28)

by 【고동엽】 2022. 1. 26.

인간 운명의 세 때! (히 9:27-28)

 


사람에게는 저마다 잊지 못할 날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국가도 국가마다 국경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8.15광복절이나 3,1절 그리고 6.25와 같은 날들은 잊을 수가 없는 날입니다. 또 어느 단체나 창립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영적으로 거듭난 날이나 세례받은 날은 잊을 수가 없는 날입니다. 그날들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에게 있어서 약혼한 날이라든가 결혼한 날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날입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이 날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는 날들입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젊거나 나이가 들거나를 막론하고 저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날을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행여 남편들이 그날들을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가면 그 여파가 상당히 오래갑니다. 여성들은 남편이 그날을 기억해 주는 것을 관심의 기준으로, 사라의 척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그날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이 날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들이 우리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날은 우리들이 신앙인이라고 할 때 더더욱 뜻이 있고 중요한 날입니다. 그날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인간 운명의 세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들이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이를테면 이 날은 우리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들이 좀 깊이 음미를 해 보면 굉장히 중요한 날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날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여러분의 존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해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건이고 기적입니다. 그것이 생일날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그 의미가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은 반드시 축복의 날이어야 합니다. 그날은 모든 사람들이 축복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태어나서 하는 날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 인생의 순결한 첫 출발의 날이라고 한다면 그날은 모든 사람이 기다리고 축복하는 가운데 태어나는 축복의 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숙하게 결혼을 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서 살아가던 중에 아이가 잉태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축복하는 가운데 아이가 태어나는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날이 축복의 생일날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과정을 보십시오. 얼마나 신비스럽게 태어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까? 그리고 그가 태어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즉거워했으며 그가 태어나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습니까? 그것이 축복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 태어난 날이 그 어느 날보다도 복된 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면 이 기쁨의 날이 어떤 이에게는 저주의 날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 날이 모든 사람들에게 근심을 끼치고 불화를 안겨 주고 온갖 후회와 갈등을 안겨 놓고 태어나는 생명도 있습니다. 그래서 길에 버려지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해외로 내 보내지는 생명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태어났으되 천덕스럽게 살아가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뿐입니까? 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지금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음지에서 낙태되어서 땅 속에 버려지고 있습니까? 그렇게 버려진 수많은 생명들이 지금 땅 속에서 비명을 비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 다 듣고 계실 것입니다. 아벨이 죽어서 피를 흘렸을 때도 그피의 소리를 들으였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생명은 태어나올 때 온갖 불의와 재앙을 지니고 태어나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남의 아이를 자기 자식인 줄 알고 키우다가 아무리 보아도 아닌 것 같아서 확인을 해 보니까 불륜의 씨로 앵태된 남의 자식이었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태어난 그날이 저주스런 날입니다. 그 아이는 그날 모두에게 재앙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혼전 임신한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자주 싸움을 많이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내내 갈등이 많다고 합니다. 그것도 출발이 좋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건해야 할 것은 끝까지 경건해야 그 열매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좋은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자녀의 출생의 날을 이렇게 준비하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혼한 부부가 이제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을 세웠다면 어느 날 그냥 아이가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이 잉태되는 데 그냥 어쩌다가 보니까 잉태되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두 부부가 함게 한달이나 40일 정도 새벽에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로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순전히 아이를 위해서만 기도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르게 갖고 생각도 바르게 갖고 찬양으로 하루를 보내며 음악과 묵상으로 조용한 시간들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을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부부가 그 기간을 정말 행복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를 하면서 작정한 준비 기간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잉태시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좀 작위적인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면 좀 어떻습니까? 그 의도가 선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준비해서 모두가 기다리며 축복하는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난 그 아이라면 어떤 아이가 될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성장해가는 동안 자신의 부모가 그렇게 준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잉태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아이는 어떤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느 날 보니까 잉태되어서 내어난 아이와 비교를 한다면 어떤 뜻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중요한 날들이 많이 있지만 그 어떤 날들보다도 더 중요한 날은 바로 이 출생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이 날은 축복된 날이어야 합니다. 이 날은 부모들이 만들어 주어야 하는 날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태어난 날은 이렇게 중요한 날입니다.

 

2. 일생을 마치는 날입니다.

 

이를테면 죽는 날입니다. 이 날도 우리들이 피할 수 없는 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날이 배당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날입니다. 그날을 우리들이 모르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 그때가 어느 시기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형태로 그날을 맞이할 것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생을 마치는 날을 보면 모두가 가지 각색입니다. 참 복되게 그날을 끝맺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 중의 복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이 복되어야 한다면 일생을 마치는 그날도 그렇게 성스러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마쳤던 장소가 흉해서 그렇지 마지막 순간은 참 만족스럽게 마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을 보면 마지막 순간에 한마디를 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예수님은 한 많은 인생을 장엄하게 마치십니다. 그때 예수님의 나이 33세였습니다. 얼마나 아쉬움이 많은 아니입니까? 그럼에도 여한이 없고 만족스럽게 "다 이루었다"는 짧막한 한마디를 남기고 일생을 마치십니다. 그 인생의 마지막이 얼마나 성스럽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일생을 마치는 순간이 복된 시간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은 부모가 성스럽게 준비해서 만들어 주어야 하지만 세상을 마치는 날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준비하고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둘다 함께 일생을 마치고 죽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일생을 마치던 날 부자는 최악의 날이었고, 거지 나사로에게는 최상의 날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일생을 살아간 모습 그대로 마지막 날 그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고 온갖 수고를 다했으면서도 마지막 생을 마치는 모습은 모양새가 아주 흉물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던 강도는 일생을 험하게 살고 죽을 때도 흉물스런 형틀에 매달린 채 죽어 갔지만 그는 끝마침의 모양새가 가룟 유다와는 대조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 날이 축복의 날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자주 있습니다. 그 임종의 순간만큼은 인생의 어느 순간보다도 심오한 느낌이 드는 그런 시간입니다. 그 순간에도 종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생을 마칠 수다 없습니다.
어떤 권사님은 마지막에 운명할 때 자꾸만 손짓을 하면서 웃는 얼굴로 조용히 임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임종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구차한 말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이 나를 오라 하신다"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 긴 인생의 시간을 마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모습입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도 그 수난만큼은 진실해지고 고개를 숙이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빈도 마지막 임종하는 시간에 로마서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는 말씀을 암송하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성스러운 종말입니까? 죽어 가면서도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신앙인들의 종말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날도 복되게 태어난 날과 같이 복된 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평안한 마음으로 생을 마치는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 보면 어떤 사람은 마지막 모습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힘들게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주 추하게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 모두에게 큰 아픔을 주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는 채 그 시간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손님이 갑자기 오면 사람들은 당황하게 되는 법인데,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은데 갑자기 종말의 순간을 맞이했으니 얼마나 당황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다가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모우에게도 어느 날 그 시간은 옵니다. 어느 날 예고하고 오는 것이 아니고 전혀 예고 없이 그냥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날도 복된 날이 되어야 하지만 이 마지막의 날도 축복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날을 준비하는 생활이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3. 하나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이 날도 우리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시간입니다. 사람이 모두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또 하나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일입니다. 본문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우리들이 모두 거쳐야 하는 관문입니다.
그날 하나님과의 대면은 결코 편안한 대면이 아닐 것입니다. 그 만남은 결산을 위한 만남입니다. 그날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의 날이 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치욕의 날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날을 위해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날 받을 상을 위하여 지금 쫓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날이 영광의 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날이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그날 살아간 대로 결산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날이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복된 날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날이 치욕의 날일 것입니다. 후회와 탄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일찍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회환과 통분의 통곡이 있을 날일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다루어질 사안은 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살아간 이력서는 별로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 맘남에서 긴히 다루어질 사안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이 세상에서 살아간 사람의 내용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날 그 심판대 앞에서는 정상 참작이라는 것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언제나 저울이 들려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살아간 그대로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서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단5: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도 축복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운명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짧막한 인생의 시간을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바로 마지막에 이 같은 관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참아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수고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관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토록 모진 고난을 참고 인내하신 것은 바로 미래에 주어질 그 영광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이 관문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서 인생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적어도 세 날만은 복된 날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이고, 죽는 날이고, 심판받는 날입니다. 이 날들을 복된 날로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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