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기초! (요 21:3-14)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필요한 것들을 찾느라고 그렇게 수고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기본"이고 "기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적인 기초가 튼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사람이 세상을 분별력 있게 살 수 있고, 자제력을 지니고 살 수 있고,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이 이 정신적인 기반이 약하면 어려움이 올 때는 잘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려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원망하게 되고, 환경 탓을 하게 되고, 사희 탓을 하게 되고 그럽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남에게 돌려 버립니다. 그것이 모두 정신적인 기반이 유약해서 그렇습니다.
또 사람은 "가정의 기반도 튼튼해야"합니다. 가정의 기초는 情과 질서로 이루어집니다. 가정은 이것만 잘되어 있으면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가정은 서로 싸우다가도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곧 뭉쳐집니다. 가정의 기본이 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정들이 너무 쉽게 분산되고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그만큼 가정의 기본이 약해져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돈 몇 푼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고 갈라서고 그럽니다. 조그만 문제만 있어도 서로 갈등이 증폭됩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 가장의 기초가 미약해서 그렇습니다.
또 사람은 "건강의 기초도 튼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무서운 질병들이 우리 주위에서 자꾸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몸이 조금 이상하다 싶어서 진찰을 해 보면 암이라는 진단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까운 생명들이 자꾸만 상실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을 오래 사신 분들이 그렇다고 해도 충격적인데 아주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도중에서 무너지고 희생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 평소에 이 건강의 기초에 대해서 무심하게 살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평생을 병원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지만 또 달리 생각을 해 보면 그 말처럼 무지한 말도 없습니다. 그 말은 건강의 기본에 대해서 아주 무관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건강이 무너져서 어느 날 몸이 이상하다 싶어서 생전 처음으로 병원이라는 곳을 가 보았더니 하는 말이 암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추구니없는 말입니까?
이것은 꼭 성수대교가 무너진 사건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평소 사람들이 다리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관찰도 한적이 없고, 보완 작업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괜찮으려니 했습니다. 가끔씩 다리를 살펴보았더라면 그 지경까지야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있는 사이에 그 다리는 병들고 마모되어 가다가 어느 날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또 절실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의 기초도 튼튼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지금까지 서론적으로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신앙인들로서 무엇보다도 이 신앙의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천성적으로 체질이 뜨겁고 정열적인 민족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 보면 아주 단순하고 감정적인 민족입니다. 이 같은 체질은 신앙 생활하기에 아주 좋은 체질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별로 오래 하지 않아도 아주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그런 장점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좋은 장점만은 아닙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본을 무시하고 기초를 경히 여기는 경향도 많습니다. 단순하고 감정적인 그것 때문에 이론적이고 기초적인 것을 무시하고 생략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집을 짓는 데도, 길을 놓는 데도, 다리를 놓는 데도, 물건을 만드는 데도 보면 결과만 중시하고 기초나 과정은 아주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지은 지 몇 달도 안 되는 아파트가 이태리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기본을 무시하고 건물을 지었으면 그런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다리가 무너져 내려서 시공사가 한창 곤욕을 치루는 것을 보고서도 여전히 기본을 무시하고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 구조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보면 열심은 있는데 말씀이 없습니다. 신앙이 열정적이긴 한데 깊이가 없습니다. 신앙이 아주 헌신적인데 뼈대가 없습니다. 기초가 아주 빈약합니다.
이런 믿음들은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평안할 때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사시가 되면 그때가 문제가 됩니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그 무너짐이 심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있다면 베드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몇 가지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고향에 내려와 있습니다. 혼자가 아니고 여러 제자들과 함께 내려와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예수께서 죽으신 직후라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실망을 많이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난 후입니다. 요한복음 20:6을 보면 베드로는 무덤까지 가서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습니다. 또 19절을 보면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까지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상처난 옆구리를 보여 주셨고, 손의 못자국까지 보여 주셨는데 성경을 보면 그때 제자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그때 그 자리에 도마라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예수님이 다녀가신 것을 알고는 큰소리 치기를 "나는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26절을 보면 그때 예수님이 그곳에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8일 수의 일입니다. 그때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모두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21:3에 와서 보면 그런 일들을 보고 목격하고 체험하고서도 지금 베드로는 고향집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나는 고기잡으러 간다고 나가 버립니다.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지금 이 시간에 베드로가 왜 고향집에 와 있으며 어떻게 고기 잡으러 간다고 나갈 수가 있습니까? 그 동안의 열심과 행적들을 비교해 본다면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전혀 벨런스가 맞지 않습니다.
왜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기본의 문제입니다. 베드로의 기본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평화로울 때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만 발생하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도 평소에는 열심도 있었고 누구보다도 용기도 정열도 좋았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을 때 그는 그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신앙의 기본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오리겐은 신앙의 세 가지 속성을 말했습니다. 그것을 오리겐은 지성과 영성과 삶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에는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되어야 의지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지성은 삶이나 판단이 맹목적이 되지 않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줍니다. 사람이 삶을 맹목적으로 살면 단순화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사람이 쉽게 속단하고 쉽게 오류를 범하고 그럽니다. 특히 신앙인들이 삶이나 판단이 단순화 되어 버리면 아주 쉽게 상대방을 정죄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중세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갈릴레오가 "지구는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1616). 그때는 로마 교황청의 세도가 상당했을 때입니다. 종교 재판에서 그는 지동설을 포기하도록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때 교회가 지동설을 포기하도록 강요한 근거가 시편 93편에 근거해서입니다. 거기 보면 "(시93:1)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보면 땅은 분명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갈릴레오는 유배당하고 수난을 겪는 동안 실명하여 일찍 죽습니다.
그런데 그후 연구 결과 알고 보니 지구는 분명히 돌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은 말하기를 "이제부터 지구는 돌아도 좋다."라고 발표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소위 "맹목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리겐은 신앙의 첫 번째 요소를 지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지성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영성도 들어가야 합니다. 이 영성은 신앙인뜰에게 확신을 주고, 자신감을 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삶입니다. 어떤 삶이냐 하면 책임 있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잘 어우러질 때 그 신앙은 균형을 이룬 의지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어 행동하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여러번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이와 같은 균형 있는 신앙 자질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베들로뿐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어이없는 것은 다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3절을 보면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자 다른 제자들이 말하기를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섭니다.
얼마나 우수운 일입니까? 자기들이 왜 고기를 잡겠다고 따라 나섭니까? 베드로는 원래 어부였고 그곳은 베드로의 고향이었으니까 그렇다쳐도 다른 제자들은 왜 따라 나서는 겁니까?
그때 따라 나선 제자들이 누구였으냐 하면, 2절을 보면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했으니까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거기에 또 다른 두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있었으니까 모두 일곱 사람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신앙적인 중심이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당시 제자들의 마음 상태나 신앙적인 인격이 얼마나 엉성했는가를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열심히 던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을 보면 "(요21:3)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고 했습니다. 일곱 명이 합심을 해서 그물을 던졌을텐데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자세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니 고기인들 잡혔겠습니까?
여러분, 물고기는 그물만 던지면 잡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합니다. 일이란 마음을 전념해서 해도 어려운 법인데 "고기나 잡으러 가자." 그런 마음으로 나가서 고기를 잡으니 고기가 잡힙니까? 그렇게 해도 고기가 잡혀 준다면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땀을 흘리고 밤을 새워 일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밤새 그물만 던지면 고기가 잡혀 준다면야 뭐가 문제입니까? 여기 제자들은 지금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참 다행스런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밤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곳까지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고기가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없다고 하니까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오른편에 던졌더니 153마리의 고기가 순식간에 잡혀 올아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무능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어이없이 실수만 하는 제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주님이십니까?
그날 아침 제자들은 지쳤지만 바닷가에 앉아서 예수님과 함께 오랜만에 조반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 번 물었으나 번번이 실패한 제자였지만 오늘 또 다시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듣기에 얼마나 송구스런 질문입니까?
지금 주님은 바닷가에다 모닥불을 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에 고기를 굽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닥불만 보면 알레르기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모닥불 곁에서 불쬐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사건이 있은 후로는 모닥불만 보면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 모닥불을 피워 놓고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그 질뭉에 베드로가 무슨 힘으로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근심하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여기서 또 한번 속아 주십니다. "이번에는 진짜냐?" 그렇게 다그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고 주님은 또 다시 베드로를 믿고 재차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주님이십니까? 그때 베드로를 무능하다고 버리셨더라면 베드로는 끝내 실패자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날 아침을 주님과 함께 먹고 나서 베드로 일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기까지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는 모두 순교자들이 되어 죽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우리 주님은 끝까지 속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속고서도 또 믿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우리들을 향한 마음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기본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기초도 다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이 더욱 다져지고 깊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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