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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종교성! (행 17:22-31)

by 【고동엽】 2022. 1. 26.

인간의 종교성! (행 17:22-31)


성경은 마지막 시대가 되면 사람들이 허탄한 것을 쫓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점성술이 너무나 많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점치는 일들과 무당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사롭지 않은 일 같습니다.
1994년 11월 27일자 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에서는 한국의 무당 심진송씨에 대해서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김일성의 죽음을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무당입니다. 이 사람은 그 일로 인해 하루아침에 유명해져서 99년까지 점 예약이 이미 다 끝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매스컴들이 이 무당에 대해서 너무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TV를 보면 무속인들을 자주 등장시켜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사고가 없겠느냐, 사회가 안정되겠느냐, 내각제가 되겠느냐는 등 별 이야기들을 다 하고 있습니다.
잡지들을 보면 또 이런 문제들을 특집으로 다투어 다루고 있습니다. 신문들을 보면 거기에 주간 운세를 연제하고 있습니다. 금년 정초에는 평년 같으면 일 년 동안 다녀갈 만큼의 사람들이 며칠 사이에 이미 모두 다녀갈 정도로 성업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같은 합리적인 시대에, 그것도 최첨단 과학이 난무하는 시대에 무당들을 불러들여 매스컴들이 야단을 떨고 있습니다.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한편으로는 최첨단 과학 장비들이 동원되어 시체를 발굴하고 있는데 그 곁에서는 사람들이 무당들을 동원해서 시체를 찾았습니다.

며칠 전 인공 위성 무궁화호가 발사되기 전날에는 관계자들이 돼지 머리를 갖다 놓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모습을 보시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21세기를 눈앞에 둔 이 시대에, 그것도 우주 정복을 위한 최첨단 과학 장비를 만들어 놓고 그 옆에서 돼지 머리를 놓고 넙죽 엎드려 절하면서 이 우주 장비가 무사히 발사되기를 비는 그런 원시적인 모습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또 이 시대의 최첨단 과학 장비인 최신형 비행기를 새로 도입하게 되면 맨 먼저 고사부터 지낸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때 사용되는 돼지의 얼굴은 웃는 돼지여야 한다고 합니다. 보통 돼지 머리는 50만원 살 수 있는데 웃고 있는 돼지 머리를 삶을 때 핀으로 꿰매서 웃는 모습을 하도록 만들어 놓고 삶아 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교만하고 자만스럽고 최첨단 장비를 만들어 인간 만능을 부르짖으면서 신을 부정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은 그렇게 약할 수가 없습니다. 무지하고, 나약하고, 무력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오죽 사람의 마음이 무력하면 돼지 머리를 놓고 거기에 절하면서 기대어 보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점에 관신을 갖게 되고 무당에게 찾아가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시대가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산업사회가 되다 보니까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어 버렸ㅅ브니다. 경쟁사회가 되면 우선 미래를 예측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이 급해지고 무엇이나 신속한 결론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지고 불안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치열한 입시 경쟁이 얼마나 긴장을 줍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합니까? 이번 시험에 합격할까 못할까,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는데 이 사업이 성공할까 실패할까, 이번 선거에 출마하면 당선될까? 막대한 경비를 들이기 때문에 당선되면 괜찮지만 낙선하면 집안이 망합니다. 그 결과가 왜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답답하니까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또 자식의 결혼을 앞둔 부모들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옛날 같으면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여부가 없었습니다. 처녀 총각이 동네에 한둘 정도여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결혼하는 데 별다른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습니다. 또 실패율도 그만큼 많습니다. 누구와 결혼을 해야 잘 살 것인지 확신이 안 섭니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게 되고 그 점쟁이에게 자신의 운명이 선택권을 맡겨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서 물어 보았더니 그 사람과 결혼하면 "잘 못산다"고 합니다. 그말 한다디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다른 것 다 좋아도 그 말 한마디에 끝장을 냅니다. 장래를 쪽집게처럼 말해 주는 무당이 말 한다디에 사람들은 울고 웃고 그럽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무당집에 한번 가 보십시오. 무당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주제 하나 주체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몸담고 살고 있는 집을 보면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 하나 개선하지를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집 문전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해주는 모습입니다.

 

셋째는 이것이 굉장히 오래된 습관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무속은 우리나라의 민속 신앙입니다. 이 땅에 고등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이 무속에 의해서 질고를 풀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인들조차도 그 무속 신앙에 대한 향수가 대단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당집에 드나드는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30%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알고 보면 이 무속 신앙이 우리들의 생활에 너무나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4자를 싫어합니다. 4자는 죽을 사자라고 해서 더무시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 보면 어디를 가나 4자는 없습니다. 건물도 보면 4층은 없습니다. 비행기 좌석을 보아도 4자는 없습니다. 이것도 무속 신앙 영향입니다.
그리고 大자는 많습니다. 사람들이 대자는 다 좋아합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무당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당도 다 같은 무당이 아닙니다. 큰 무당이 있고 작은 무당이 있습니다. 스님도 큰 스님이 있습니다. 다리도 보면 모두 대교입니다. 한강에 놓여 있는 다리는 모두 대교입니다. 사람들이 대 자를 좋아합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오래된 무속 신앙의 습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의 중직들도 보면 아주 거리낌없이 사주를 보고 궁합을 고집하고 거기서 나오는 점괘에 따라서 손쉽게 좌우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얼마나 뿌리가 깊습니까?

 

넷째는 종교성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깊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은 종교성이 다분합니다. 극히 감정적이고 단순하고 운명적입니다. 그래서 그 심성의 토양이 극히 종교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이단이 많이 발생하고, 잡종교가 많고, 신흥종교가 많고, 무당이 기생하기에 아주 좋은 종교적인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종교성은 비록 우리나라 사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희랍신화를 보면 희랍에는 이 우상들이 더 많습니다. 알프스 산상에는 잡신들로 우굴거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두머리 신인 제우스신을 비롯해서 육의 신인 비너스신, 술신인 바카스신 등 수많은 신들이 우굴거리고 있습니다. 그 신들은 아주 조잡해서 서로 질투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6-17절을 보면 "(행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했습니다. 또 "(행17:22)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하도 많아서 제사를 지냈는데 혹시 잘못해서 빠진 신이 있으면 노여워할까봐서 빠진 신들도 화를 내지 말라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별도의 제단까지 만들어 놓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고, 사도 바룽이 아덴에 가서 전도하다가 사람들에게 지적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대 종교성을 부여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으셨습니다. 물건이 사람의 손을 떠나서는 의미도 없고 값도 없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의미도 없고 존재의 값도 없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면 모두 하나님을 믿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모두 신을 믿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 대신 물질을 믿든가, 권세에 집착해 있든가, 취미에 깊이 빠져 있든가, 아니면 어떤 일에 골몰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 메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참 신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기지 말고, 이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시고 예수를 죽은 잘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의지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요행적이고 사행적이고 이생적이고 운명적이면 그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또 신앙이 너무 이생적이고 현실적이면 성공 여부에 너무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꾸만 조급해지고, 참고 인내하지를 못하고, 언절부절하고, 성공 여부를 미리 알고 싶어서 안달을 하게 되고 결국엔 무당을 찾아가고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한 가지는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진정 중요한 것들은 사람들이 미리 알 수 없도록 감추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면 좋을 것 같아도 사실은 좋지 않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아마 장차 크게 실패할 것을 사전에 알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리부터 자포자기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죽을 날을 미리 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떨어질 아이가 미리 알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 결과들을 미리 알 수 없도록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결과론을 너무 신봉해도 좋지 않습니다. 오늘의 낙방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결과를 가져오고, 합격 그것이 또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워싱턴, 클리불랜드, 링컨, 트루먼, 영국의 처칠, 이들은 모두 대학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대학에 갔더라면 오히려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문학가 중에서도 조셉 콘라드, 헤밍웨이, 버나드 쇼, 버지니아 울프, 시인 하트 크레인 모두 대학을 못 간 사람들입니다. 화가 중에도 고갱, 피카소, 석유 왕 록펠러도 그렇고, 정치가 중에는 유고의 티토 대통령, 최초의 비행사 라이트 형제, 자동차 왕 포드 모두 고등학교 중퇴자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도 못 다닌 사람들이 한몫 한 경우도 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 배우 채플린, 발명가 에디슨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합격이 반드시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공이 또 장래에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사람들은 한때 굉장히 성공한 사람들이었ㅅ브니다. 또 전두환, 노태우 이들도 한 때 얼마나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면 그들이 그때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나의 운명을 모릅니다. 그리고 나의 성공 여부도 알수가 없습니다. 또 오늘의 나의 성공이 반드시 계속된 성공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성공이 다가 아니고, 오늘의 실패가 또 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질 것이 내일의 나의 모습을 미리 알려고 허둥대지도 말고, 무당에게 가서 나의 운명을 논하는 그른 허탄한 생각을 가지지도 말고, 오늘 나의 모습을 열심히 가꾸며 열심히 심고 살아가면 나의 앞날은 반드시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오늘 심고 가꾸고 수고하는 이 삶이 장차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를 기다리면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도 얼마나 스릴이 있어서 좋습니까?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보다 알차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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