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父性 이해! (눅 15:11-24)
입시철만 되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자식들을 향한 부모들의 모습입니다. 자식들을 고사장에 들여 보내 놓고 교문 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 저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부모라는 존재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서 우상이고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 또한 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누가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욕심이 아닌 부모의 소박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모들은 자식이 조금만 잘되어도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고 기뻐합니다.
옛말에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라고들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 자랑은 더 이상의 흉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이라는 존재는 그만큼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마다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마음은 비록 인간의 마음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우리 육신의 부모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타나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마음을 살펴보면 우리 부모들의 자식을 향한 마음과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읽어 보면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몇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대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부모 곁을 떠나서 집을 나가면 무슨 재미가 있는 줄 알고 가출을 했습니다. 집을 나가서 살다가 마침내 실패하여 병들고 지치고 굶주려서 돼지 우리에서 살았습니다. 이 모습은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낙오된 모습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바람이나 기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식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도 아들이 이렇게 실패자가 되고, 병들고, 낙오자가 되고 그래서 돼지 우리로 전락하는 그런 모습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 자식이 장차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한결 같은 부모의 기대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부모의 마음을 무시하고 나가서 방탕하고 실패해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기대를 걸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질 때 얼마나 허무를 느끼게 됩니까? 그래서 그 기대를 무너뜨리며 살아가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과수원지기가 과일나무를 심을 땐 계란 만한 과일을 기대하고 심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과수원지기의 기대는 큼직하고 탐스럽고 볼품있는 과일을 기대하면서 땅을 파고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나무를 가꾸고 기릅니다. 이것이 과수원지기의 기대입니다.
그렇게 기대를 하고 가꿨는데 이 나무의 열매를 보니 계란 만한 열매가 볼품없이 열렸습니다. 그런 열매를 얻으려고 그렇게 땀을 흘리며 물주고 가꾼 것이 아닙니다. 전혀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과수원지기는 가위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정 없이 나뭇가지들을 잘라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실망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밤에 겟세마네 산으로 가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산 밑에 두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여기서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기도를 하십니다.
한참 기도한 후에 와 보니까 베드로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히 타이르십니다. "깨어 기도하라." 그리고 다시 가서 기도하시고 와서 보니까 또 자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지금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오셔서 보니까 베드로가 또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야"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뭐라고 부르시느냐 하면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공인의 이름입니다. 지도자로 임무가 부여된 이름입니다. 그런데 시몬이라는 이름은 그가 변화받기 전의 이름, 어부 시절의 자연인의 이름입니다. 이 시몬이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고 지도자가 되면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라"고 했는데도 뒤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또 잠을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베드로가 자질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야" 하지 않으시고, "시몬아" 하고 부르십니다. "베드로야" 하고 부르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부름받기 전의 이름으로 강등시켜서 "시몬아"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그만큼 실망하셨다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집사 한 사람을 좋게 보아서 권사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집사일 때는 몰랐는데 권사를 시켜 놓고 보니까 너무나 실망이 되었습니다. 권사로서 자질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말하기를 "당신을 다시 집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이것이 "시몬아"하고 부르신 주님의 심정과 똑같은 실망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성도들에게 한 가지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계란 만한 열매가 아니고 아주 풍성하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기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또 빌립보서 1장을 보면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가을에 이렇게 풍성하게 결실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전적인 의지입니다.
탕자가 돼지 우리 안에 앉아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좋은 집, 따뜻한 아버지의 품, 좋은 환경을 떠나 가출을 해서 결국 이렇게 굶주리고 실패하고 낙오되어 "나는 이대로 죽는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단을 내립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자, 가서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는 하지 말고 일꾼 중의 한 사람으로써 써 달라고 하자"(18-19)
그리고 탕자가 집으로 갑니다. 가서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나를 품꾼 중의 한 사람으로 써 주십시오." 얼마나 처량한 모습입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생각은 아들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20절을 보면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집나간 아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다리다가 아들이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들을 완전하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로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라고 이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원망하고 무시하고 탓하는 것은 부모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엊그제 방송에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아이가 가출을 했으니 찾아 달라고 호소하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 아이가 어머니에게 컴퓨터를 사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안 형편이 안 되니 조금씩 기다리면 사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떠니 이 어린아이가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무능하다고 불평을 하고는 집을 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철 없고 괘씸한 행동입니까?
그런데도 이 어미니는 방송을 통해서 가출한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줄테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호소를 합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가 컴퓨터를 사 주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까지 받은 부모의 은혜를 모두 저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부모는 이런 때가 가장 서글픈 때입니다. 자식으로부터 무시를 당해서가 아니고 그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당신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전적으로 신뢰해 주고 맡기고 살아 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하나님을 불신하고 전적으로 의지를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사람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게 되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빽을 찾아 나서고, 사람을 찾아 나서고, 어떤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태도입니다.
사사기 11장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이 먼저 하여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순서입니다. 지금까지 전쟁이 나면 모두 그렇게 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지도자들이 어디로 갔는가 하면 산으로 갑니다. 기도하려고 간 것이 아니고, 산속에 살고 있는 산적 "입다"를 찾아간 것입니다. 가서 입다에게 "당신이 우리의 장관이 되어 적을 막아주십시오"라고 애원을 합니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지금 국난의 해결을 산적인 입다에게 의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아픈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백성들에게 다 주고 싶은데, 전적으로 도와주고 싶은데,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무시되고 사람을 찾아가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서글픈 마음입니다.
죄를 짓고 돌아온 탕자는 품꾼 중 한 사람으로 먹여 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당당하게 아들로 맞아 줍니다. 그리고 탕자에게 옛날과 똑같은 권한을 부여해 줍니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이 같은 하나님의 전적이 사랑을 받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먼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자식들이 세상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원합니다. 언제나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식을 볼 때 부모의 마음은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은 자식들이 세상에서 자신 있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이들이밖에 나가서 얻어 맞고 울면서 들어왔을 때 몹시 속이 상한 경험을 한 두 번씩은 모두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는 "차라리 때려 주고 들어오지"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들이 세상에서 좀더 당당하게 사리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 때문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와왔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아들로 받아들여 달라는 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품꾼 중의 한 사람으로만 써 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볼 때 그 모습이 처량하고 불쌍하고 밉고 측은합니다. 완전히 패배한 사람처럼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24절을 보면 "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당당하게 대해 줍니다. 그리고 아들이 좀더 당당하게 살아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사명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확신 있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사명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교회 성도가 전화를 했습니다. 교회에서 자꾸만 구원받은 증거를 대라고 요구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은 지금 자신감을 상실한 채 싸워야 할 대상과 싸울 생각도 못하고 엉뚱한 문제에 휘말려 있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참 답답한 일입니다. 내가 지금 신앙 생활을 하고 있고, 예배 때마다 입을 열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나의 구주시며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실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했으면 모두 구원받은 사람이지 그 신앙 고백 이상의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확신 있게 살고 자신 있게 살면 될 일을 가지고 쓸데없는 일에 매달려서 의심하고 불신하고 재미없이 살아가니까 신앙인의 삶이 그렇게 힘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생산적인 생활입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와서 "주님은 나의 구주십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으면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왜 이 자리에 와 앉아 있겠습니까? 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주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하는 신앙 고백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나가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그런 삶의 태도를 원하십니다.
탕자 아버지는 죄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 그랬으면 어깨를 펴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과거를 다 잊고 당당하게 아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바람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마음입니다.
이제 한 해를 풍성하게 결실을 이루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다 맡겨 놓고, 자신 있고 확신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고 더 가까이에서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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