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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점일(0.1%)와 100%의 신비! (삼상 17:45-49)

by 【고동엽】 2022. 1. 26.

0.1%와 100%의 신비! (삼상 17:45-49)


본문을 보면 "의외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블레셋의 장군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골리앗입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육척장신이고 그가 사용한 칼이 크다고 하지만 여기 골리앗과 비교를 하면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사무엘상 17:4을 보면 골리앗의 신장이 여섯 규빗 한뼘이라고 했습니다. 한 규빗은 45㎝이니까 여섯 규빗이면 2m 70㎝입니다. 골리앗의 키가 자그만치 2m 70㎝하고도 한뼘입니다. 얼마나 장신입니까? 또 5절을 보면 그가 입은 갑옷은 무게만도 놋 5천 세겔이라고 했습니다. 한 세겔은 무게가 11.4㎏입니다. 그러면 5천 세겔이면 약 57㎏입니다. 골리앗의 갑옷 무게만도 57㎏입니다. 또 7절을 보면 골리앗이 가지고 있는 창자루는 베틀 채 같았고, 창날은 철 600세겔입니다. 약 6.8㎏의 무게입니다.
이런 장수가 나와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포효하고 있습니다. 마치 호랑이가 부르짖듯이 으르렁거리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장수끼리 싸우는 시대입니다. 양측이 장수가 나와서 싸워 이기는 편이 다 이기는 것입니다. 지면 모두를 잃습니다. 지면 상대편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골리앗과 싸울 상대가 없습니다. 누가 선뜻 나서서 싸우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두려워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나가서 골리앗의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모든 백성이 두려워 떨고 있는 그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상대방의 장수는 너무나 건장한 사람입니다. 그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고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은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품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섭니다.

40절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데 손에 막대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양칠 때 사용하는 막대기입니다. 그 막대기는 버드나무 가지로 껍질을 벗겨서 지팡이 겸 양몰이를 위해서 사용하는 막대기입니다.
또 냇가에서 주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이 돌은 양들이 이탈할 때 던져서 이탈을 방지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하던 조약돌입니다. 또 맹수들이 올 때 이 돌을 던져서 쫓아내는 데 사용하던 돌입니다. 다윗이 그 나무 막대기아 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갑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합리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싸움이 과연 성립이나 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0.1%와 100%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확률은 0.1%도 안 됩니다. 그리고 골리앗이 다윗을 이길 확률은 100%입니다. 사람들이 이 싸움을 놓고 내기를 한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다윗을 편들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가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결판이 났습니까? 어린아이가 막대기를 들고 싸우겠다고 나서니까 골리앗이 웃습니다. 43절을 보면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오느냐"하고 웃습니다. 이것은 장수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도 이것은 전혀 승산 없는 행동이고 부질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45절을 보면 다윗이 아주 당찬 말을 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그리고 49절을 보면 가지고 온 돌 하나를 던집니다.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골리앗이 땅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51절을 보면 "골리앗의 몸에 지닌 단칼을 꺼내서 머리를 베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적군들이 모두 도망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00%의 확률이 무시되고, 0.1%의 확률이 승리를 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의 요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그런 기적성이 없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기적이 많이 나오는데 그 기적들 때문에 성경을 읽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기적들이 너무 황당해서 성경을 읽을 때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적적인 요소가 없으면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책을 사서 삼경이라고들 말하는데, 사서 삼경이 아무리 심오하다 해도 성경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책 속에는 기적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서 삼경은 아무리 심오하다 해도 윤리 도덕책에 불과하지 성경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 기적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0.1%가 일으키는 기적을 몸소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실 때 99.9%의 확률이 있는 것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시거나 섭리하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적인 섭리는 대부분 0.1%의 확률밖에 없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 행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적적인 섭리가 이루어지는 현장에는 언제나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고, 감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 0.1%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무에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신앙은 형성되지도 않고 이루어지지도 않고 더구나 그곳에 기적이란 없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서울의대에서 인턴으로 수련을 하고 있던 장차 산부인과 의사 지망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이 어느날 실험을 하다가 유리가 깨지는 바람에 오른쪽 손목 동맥 옆에 있는 신경이 손상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진단 결과 90%가 손상되고 10%만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처입은 손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손을 사용하는 산부인과는 전공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순간의 사고가 일생을 망쳐 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심방을 갔더니 이 사람이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자살해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패의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일입니다. 90%가 가망성이 없고 겨우 10%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10%이지 그 말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일류 코스만 걸어왔는데 이제 와서 낙오되게 생겼으니 죽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때 제가 그 젊은이게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은 그 10%에 소망을 거는 생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10%가 100%의 능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속단하지 말고 좀더 기다려 봅시다." 그랬더니 그 젊은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제가 잘 압니다. 제가 의사가 아니면 이렇게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가 의사인 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절망이 더 큰 것입니다. 뭔가 남들보다 좀더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이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 깊이 인식을 하고, 그 자리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때로 이렇게 좀 안다는 것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적이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깊이 있는 믿음의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그런 사람의 생활 속에서는 감격적이고 감동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때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를 드려라.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는가? 바로 이런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 믿어 오지 않았는가? 아마도 하나님은 당신이 지금까지 믿어 오는 동안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의 축복을 주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고는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때 그 젊은 의사는 돌아가는 저의 등 뒤에다 대고 굉장히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합리적인고,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고, 의학 상식이라고는 전무한 전근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렇게 비웃는 그 마음이 참 불행한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비웃는 그 비웃음 뒤에 얼마나 괴로운 낙심이 있고, 탄식이 있고, 절망이 있고, 비참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절망되면 죽어버리겠다고 난리를 쳤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절망하는 순간에 역사하십니다. 바로 그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처지에서 하나님은 슈퍼맨처럼 나타나셔서 보란 듯이 섭리로 역사하셔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고, 사람들의 그 고정 관념을 보기 좋게 깨뜨려 놓으십니다.
얼마 후에 가 보니 그 젊은 의사가 기적같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던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그럼으로써 그 젊은이는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신앙의 경험을 그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세계에서 이 같은 사례는 비일 비재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에 아들을 낳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의학적으로 생각하면 이것도 0.1%의 가능성도 없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또 기도해서 병을 고쳤다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약 한 봉지면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개입하시지도 않습니다.
보면 대부분 0.1%의 가능성만 있을 때, 아니면 전혀 가능성이라고는 전무할 때, 그때 하나님은 그 0.1%와 전무 상태를 재료로 해서 역사하여 기적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탄원하고 간구하는 것 아닙니까?
사사기 4장을 보면 그런 사례들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라 지도자는 여자인 "드보라"입니다. 그런데 드보라의 부관은 용사 "바락"이라는 남자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장부 드보라는 용사인 바락에게 말하기를 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용사 바락이 말하기를 "당신이 같이 가면 나도 가서 싸우고 당신이 가지 않는다면 나도 가지 않겠다"고 그럽니다. 장군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드보라가 "나도 갈테니 가서 싸우라"그럽니다. 그래서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무사 중 무사입니다. 많은 병사를 이끌고 와서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스라를 누가 죽입니까? 상상도 못할 여인이 그를 죽입니다.
시스라가 도망하여 여인의 장막에 숨어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여인이 이불을 덮어 줍니다. 그리고 시스라가 깊이 잠들었을 때 방망이와 말뚝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의 몸에 박아서 죽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이 여기서 아주 싱겁게 끝나 버립니다.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래도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가나안 왕 하면 무서워 떠는데 나는 그들을 무찌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시골의 연약하고 무지한 여인을 통해서도 간단하게 해치울 수가 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군사 적전 이론으로 보면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경우도 보면 0.1%의 가능성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움직이시고, 어떻게 역사하시고, 어떻게 섭리하시는가를 보고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께 나의 미래를 맡기고, 나의 운명을 맡기고, 나의 영혼을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0.1%의 확률을 가지고 얼마든지 100%의 가능성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신앙의 감격과 감동스러운 삶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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