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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된 인생! (수 7:1)

by 【고동엽】 2022. 1. 26.

욕된 인생! (수 7:1)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은 대략 70년에서 80년간입니다. 개중에는 좀 일찍 죽는 사람도 있고 조금 오래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도 살다가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우리의 인생의 시간도 대략 70년에서 80년간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사람들이 살아간 모습으로 성공했다 실패했다고 단정지어서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객관적으로 평가를 할 때 "저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았구나"하고 말할 수 있고 또 "저 사람은 아주 욕된 인생을 살았구나"하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주일에 걸쳐서 "욕된 인생"이라는 제목과 "영광된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나누어 설교하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간이라는 사람은 누가 봐도 아주 욕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은 결국 수치스럽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하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두 요새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리고성이고 또 하나는 아이성입니다. 여리고성은 구약성경에서만 65번씩이나 언급할 정도로 아주 견고하게 지어진 금성 철벽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여리고성을 아주 쉽게 점령을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아주 고무된 마음으로 다시 행진해서 두 번째 요새인 아이성을 치게 됩니다.
이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라는 말이 "小山"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인구 12.000명 정도인 작은 성으로서 점령하기에 그렇게 부담되지 않는 성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성에 진격해 들어갑니다.
그런데 쉽게 점령하리라고 믿었던 이 아이성에서 그만 여호수아 군대는 36명의 전사자를 내고 참전했던 3천 명의 군대는 모두 혼비 백산해서 도망해야 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아주 어이 없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실망한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탄식을 합니다. 황당해 했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밝혀 보니까 여리고성을 점령하면서 얻은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는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만 그 물건에 손을 댄 것입니다. 아간이 바쳐진 제물 중에서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한덩이를 훔쳤다가 그것을 자기 집에 숨겨 놓았습니다.

이 시날산 외투는 바벨론산 외투를 말하는데 당시는 이 바벨론산 외투를 최고로 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왕족들이나 방백들이 주로 입는 외투였습니다. 아간이 그것을 훔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온 백성에게 임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일에 분노한 백성드이 아간과 그의 가족들을 끌너내서 훔친 외투와 금덩어리를 가지고 함께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던지고 불사르고 돌을 던져서 돌무더기를 쌓아 놓습니다.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가리켜서 "아골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슬픔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아골 골짜기"하면 먼저 아간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간의 인생을 가리켜서 "욕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보면 이렇게 인생을 욕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욕되게 살아간 사람들을 보면 그의 삶의 모습에서 몇 가지 공통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과한 욕심을 말합니다. 사람이 욕심 없이 살 수는 없지만 과하면 욕이 됩니다. 그래서 재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은 실수하기 쉽습니다. 여기 아간이라는 사람은 결국 이 탐욕 때문에 망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슨 물건인데 그것에 손을 댑니까?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에 손을 댔다면 그것은 탐욕에 눈에 먼 사람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물랐겠습니까?
6:18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전리품에 손을 대면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린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물건을 탐해서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의 인생이 그렇게 욕된 모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자기 자신뿐만 아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한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까?
오늘도 보면 이 탐욕 때문에 그 인생이 그만 욕되게 끝나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세에 탐욕을 부리다가 그 인생을 욕되게 끝나 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재물에 탐욕을 부리다가 그만 욕을 당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탐욕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쁨 것이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지막을 욕되게 만들고 추하게 만듭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 인생을 그렇게 욕되게 만든 것도 이 탐욕 때문입니다. 그 물건이 무슨 물건인데 거기에 손을 댑니까? 사람이 얼마나 탐욕스러우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에까지 손을 댈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인생이 그렇게 수치스럽게 끝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본위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얼룩지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거기에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인생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특히 이 시대는 자기 본위 생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그 인생을 형편없이 얼룩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속에는 사람을 속여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자기 본위의 본성" 때문입니다. 아만 배부르면 그만입니다. 나만 이익을 보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속임이 나오게 되고, 변칙이 나오게 되고, 편법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신다(잠 11:1)"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저울을 속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자기 본위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익을 많이 남겼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누군가가 그만큼 손해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 큰 횡재를 했다는 말은 누군가가 큰 손해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저울을 속여서 이익을 많이 남겼다는 말은 누군가가 속임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불성실한 자기 본위 인생입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도 알고 보면 이 같은 자기 본위의 태도들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자기 본위의 태도들입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입니다. 나만 이익을 많이 남기면 그만입니다. 나만 손해 안 보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자기 본위의 생각들입니까? 그러기에 이 시대가 이렇게 삭막한 것입니다.
아간이 그래서 물건을 훔쳤습니다. 나만 수지 맞으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야 어찌 되든지, 이 일로 인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상관없습니다. 나만 이익이 되면 그만입니다. 이런 인생관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어수선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상실입니다.

 

이를테면 본분의 망각입니다. 분수의 망각입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은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당시 유다 지파 하면 최고의 명문 지파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자 지파였습니다. 결국 그 지파에서 다윗이 태어났고 예수가 탄생했습니다. 그 지파의 자손이 아간입니다.
아간의 증조부는 세라입니다. 세라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 세라가 후에 예수님의 선조가 됩니다. 그리고 아간의 조부는 삽디입니다. 삽디는 나중에 유다 자손 세라 종족의 족장이 됩니다. 그 피를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또 아간의 아버지는 갈미입니다. 갈미도 후에 종족의 족장이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아간의 가문은 명문가입니다. 그 혈통에서 아간이 태어납니다. 얼마나 영광된 자손입니까?
그런데 그 후손인 아간이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컬어 본분의 망각이라고 하고, 신분의 망각이라 하고, 자기 상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가문, 족보, 후손 대대로 욕된 모습을 안겨주지 않습니까? 여기 1절을 보면 거기에 아간의 족보가 다 나와서 그 조상들의 이름을 명예스럽지 못하게 들먹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욕된 인생입니까?
전설에 의하면 그날 아간의 행위가 밝혀지던 날 유다 지파의 용사들이 지파의 명예를 치욕스럽게 만들었다고 흥분해서 아간을 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그를 용사의 칼날로 죽이고 불태워서 돌무더기를 쌓아 놓았다고 합니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은 결국 이렇게 그 인생이 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모두 자기의 본분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기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며 허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 한 사람은 나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 한사람이 실패하면 모든 가족들이 함께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슬플 때는 내 식구들도 모두가 슬퍼지고, 내가 욕되면 온 가족이 함께 욕되고, 어떤 경우에는 나 한 사람의 실패로 모든 국민 전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 한 사람은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전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잃고 산다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아간이라는 한 사람 때문에 지금 가나안을 향해서 일사 불란하게 나아가던 행진이 갑자기 멈추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이성에서 그만 대패하고 나서 모든 백성들이 얼마나 비탄해 했고, 눈물을 흘렸고, 얼마나 뼈져린 고난을 겪었습니까? 우리들이 세상에서 본분을 잃고 살면 이렇게 됩니다.

 

네 번째는 종말 의식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에게는 "종말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 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하거나 자기 본분을 망각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정신입니다.
사람이 방종하다가도 이 종말 의식을 생각하게 되면 그 방종에서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 의식을 가지고 살면 세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어도 자신을 지키고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사람은 유년 시절에는 장난감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10대가 되면 대부분 이성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30대가 되면 사업을 위해서 온 정열을 쏟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명예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명예를 위해서 온 힘과 열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5, 60대가 되면 모두 철인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이 나이가 되면 모두 종교적인 사람이 되고 철학자들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비로소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종말을 생각하게 되고, 생의 깊은 의미를 깨우쳐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모두 철인이 괴게 만드셨고, 종교성을 가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부리던 탐욕도 조절하게 되고, 탈선하던 생활에서도 돌아오게 되고, 인생을 깊이 생각하게도 되고, 죽음을 생각하게도 되고, 비로소 종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는 말은 종말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종말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버릴 것이 무엇이며, 취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분별력 즉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종말 의식이고 역사 의식입니다. "나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선다." 이 종말 의식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방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는 역사의 심판을 받고 평가를 받는다"하는 이 역사 의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강한 권력을 잡았다 해도 퇴임 후 심판받는 것이 두려워서 권력을 남용하지 않게 되고, 허탄한 짓을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잠시 후에 심판이 있는데 함부로 남용하고 부정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시작도 좋아야 하지만 끝이 더 좋아야 합니다. 결과가 좋아야 하고, 끝맺음도 좋아야 하고, 노년의 삶이 더욱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노년기에 이르게 되면 원숙한 생각과 신중한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다 살고 나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서서 심판과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이 같은 심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오늘같이 유혹이 많고 세속적인 세상을 실수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흑인 지도자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죽기 얼마 전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기를 내가 죽은 다음에 장례식장에서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을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호사유피 인사유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과 명예를 남긴다는 말입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은 아주 좋은 형통과 가문과 조상을 가졌으면서도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못해서 그만 씻을 수 없는 대역죄를 짓고 그 인생을 욕되게 끝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를 살면서 뭔가 느낌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장차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평가를 받아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을 정숙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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