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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된 인생! (행 9:36-43)

by 【고동엽】 2022. 1. 27.

영광된 인생! (행 9:36-43)


여기 본문을 보면 일생을 소리 없이 아주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내실있게 살아간 한 여인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여인이 살아간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형편없이 헝클어진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베드로가 룻다라고 하는 곳에 전도를 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순회 전도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한때 순회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김익두, 길선주, 이성봉 같은 부흥사들은 그때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여기 베드로도 지금 순회 전도 차 룻다라고 하는 곳에 가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서 약 18㎞ 정도 떨어진 욥바라고 하는 곳에서 몇 사람이 다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사람이 죽었으니 빨리 가서 살려 달락 그럽니다. 그 죽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라고 했습니다. 유대명으로는 "다비다"였고, 헬라 이름으로는 "도르가"라는여인입니다. 지금 다비다가 죽었으니 빨리 가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일행을 따라서 급히 욥바로 갔습니다. 가 보았더니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정돈해서 다락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여러 명의 과부들이 모여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고 앉아 있었습니다.
나라마다 보면 이 장례법이 각각 다릅니다. 아랍 국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모래 사막에다 장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죽은 사람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얼굴에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혀서 입관을 하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상반신을 내놓고 장례를 치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무지 막지하게 21마디를 묶어서 입관을 한 다음 3일 수에 가서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전통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하루를 넘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을 때 곧바로 매워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법에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덤을 스치거나 시체를 보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정돈해서 다락방에 놓고 울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다비다를 사랑했다는 이야기고,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그보다도 사람들의 이 같은 행동에는 거기에 하나의 열망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멀리 있던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와서 그 죽은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가서 그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그 아이가 살아납니다.
또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침상에 눕혀 놓고 간절히 기도해서 또 살려 냅니다. 역사를 보면 이렇게 죽었던 사람을 다락방에서 살려냈던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비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때의 그 사례들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은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씻어서 다락방에 갖다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룻다에서 순회 전도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모셔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와서 보니까 여러 명의 과부들이 모여서 울고 있습니다. 이 과부들은 평소 다비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비다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습니다. 얼마나 정겨운 광경입니까?

여러분, 사람이 죽었을 때 이렇게 울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적으로 살아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려 준다는 것은 그만큼 그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울긴 우는데 모두 자신의 신세가 불쌍해서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초상집에 가시거든 우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다들 "원통하다 내 신세야" 그러고 웁니다. 모두 자기 신세가 한스러워서 웁니다. 그렇게 해서 흘리는 눈물은 값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비다의 죽음을 놓고 동네의 과부들이 다 모여서 울고 있는 것은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이 과부들의 눈물은 그런 눈물과는 질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눈물입니다. 모두 애석해 하고 슬퍼하는 진정한 눈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죽어 있는 다비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이 말은 아람어로 "다비다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가서 아이에게 말씀하시기를 "달리다굼" 하십니다. 그 말은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노니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다비다굼"합니다. 그 말은 "주님이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니 너는 일어나라" 그런 뜻입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다비다가 일어나 앉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비다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애석해 하고 슬퍼했는데 그 다비다가 결국 살아난 것입니다.
그때 그곳에 모여 있던 과부들이 열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때 그 광경을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폐일언하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죽었을 때 그렇게 애석해 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비다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디사 그를 소생시킬 수 있을까" 해서 급히 달려가서 베드로에게 다비다를 살려 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흐믓한 광경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의 맛입니다. 이것이 이웃이고 우정이고 사랑입니다. 사람이 이 정도로 인생을 살았다고 하면 그 인생의 이력이 얼마나 화려했는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인생은 성공한 삶입니다. 사람은 죽어 보아야 그 인생이 성공한 인생인지 실패한 인생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사람들이 와서 별 아첨의 소리를 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은 죽은 날에 가 보아야 평가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평가는 죽은 후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전에 권좌에 앉아서 부귀 영화 공명을 다 누리고 아첨의 소리를 다 들었지만, 죽은 후에 세인들로부터 무서운 지탄을 받고 악평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전의 삶의 모습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권세자가 생전에 받는 칭송들은 진실이 가려진 가면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생전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불화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키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가면 사람들이 별로 애석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만큼의 시간을 살다가 가는데 그 시간 동안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고 가기 위해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수 맺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거나 불화를 안겨 주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탐욕으로 그 인생을 욕되게 해서도 안 됩니다. 모두 실패한 인생입니다.
여기 이 다비다라는 여인은 성경에 가족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그도 역시 화려했던 여인은 못 되었을 것입니다. 유독 본문에서 과부들이 모여서 울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그 여인도 역시 과부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과부는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의 대표들이었고 가난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공스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예수의 "여제자"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이 "도르가"입니다. 그 뜻은 "눈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이름 값을 하고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광스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래서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베푸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의 집에 도착을 해 보니까 여러 명의 과부들이 울면서 보여 주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39절을 보면 "(행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은 다비다가 가난한 과부들의 옷을 손수 바느질해서 만들어 입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들이 지금 죽은 도르가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되도록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멋있고 인간다울 때가 언제나 하면 바로 이때입니다. 사람은 나눔의 생활을 할 때 삶이 가장 맛이 있습니다. 그때는 주는 이에게도 받는 이에게도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삶의 값이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베푸는 삶이 없으면 자신이 어려운 일에 처해있을 때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겹게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만 풍요하고 만족하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함께 풍족하고 함께 만족해야 그것이 진정한 만족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먼저 찾아가 주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어려울 때가 되면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이고 우정이고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람 사는 것 대단한 것 아닙니다. "인생이 뭐냐?"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몰라도 좋습니다. 좀 가진 것 있으면 나누며 살고, 없으면 신세도 지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었다고 해서 대단할 것도 없고, 좀 신세를 졌다고 해서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있으면 나누는 것이고, 없으면 신세지고 자는 것이지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문제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눌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기 다비다라는 여인은 5천억이니 하는 그런 돈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도 모르고 세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죽은 후 그의 죽음을 정말로 안타까워하면서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들 때문에 다비다라는 여인은 결국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광된 인생입니까?
여러분, 사람은 소시민으로 알차게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치게 허황되고 권위적이고 황당하게 살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고, 실망을 안겨 주게 됩니다. 조용하게 그리고 삶을 진지하게 꾸려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런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셋째는 좋은 이웃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읏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한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은 이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좋은 이웃을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또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리고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도 복입니다.
여기 다비다라는 여인은 세상을 참 초라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 하면 속옷과 겉옷 몇 벌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유산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이웃들에게 아주 진실한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그뿐 아니고 다비다라는 여인은 죽었어도 그곳에 제 2의 다비다가 있었고 제 3의 다비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비다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베들로를 불러들여 다비다를 살려 내라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이웃들입니까? 그것은 죽은 다비다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니까 모든 이웃들이 다 좋은 이웃들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도 감동하십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왜 살려 주셨는가 하면 하나님도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 아닙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어떻게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복잡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싸우면서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힘들게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불화를 일으키며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할 수 있으면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삶의 내용이고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통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오늘과 같이 모두 허황되고 분수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이 여인의 조용하면서도 내용 있는 삶의 모습은 신선감을 줍니다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이 여인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고,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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