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자! (시 23:1-6)
시편 23편은 참 정다운 시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바로 이 시편 23편이라고 말합니다. 전체 150편의 시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시라고 해서 이 시를 시편의 백미(白眉)라고들 부릅니다. 이 시는 통상 다윗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틴은 옛부터 양을 치는 목축지로 적당한 곳이기 때문에 많은 양들을 사육했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에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어느 목자가 양을 치다가 한 마리의 양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99마리의 성한 양들을 놓아 두고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려고 온 광야를 헤매다가 탈진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아마 그런 전설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그런 황량한 광야에 살면서 순간마다 부드럽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고 느끼고 만나는 양상은 시대나 환경이나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만약 흉악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분명 두렵고 떨릴 만큼 무섭게 막대기를 들고 계신 하나님으로 만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 중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뜨다듬으며 다가오시고 고치시며 치료하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가난한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하나님은 인정이 넘치고 정답고 인심 좋은 하나님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풍성하게 복을 주시고 인정을 베푸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형편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어느 흑인의 고백처럼 백인의 교회에 갔다가 무시를 당하고 문전박대를 받고 낙심해서 엎드려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때 이 흑인이 만난 하나님은 Black Deity, 즉 "얼굴이 깡마른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흑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얼굴이 희고 몸집이 크고 기름진 얼굴을 한 그런 하나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시인은 그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생을 치는 목자로 본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양치기를 했습니다. 양 한 마리의 귀중성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맹수들로부터 양을 보호하였고 도적떼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인은 자신이 키우던 양떼와 지금 백성을 치리하는 자신의 입장을 같은 처지에서 생각하고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이에 나타나서는 하나님을 마치 목자와 같은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치리하는 다윗은 시골 출신이고 양을 치던 목자였다는 점이 두고 두고 이 같은 깊은 詩性과 감성을 유지하게 하였습니다. 이 경험은 알고 보면 상당한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오늘날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한복판에서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들은 이 같은 감정을 알고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전혀 그런 감정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네 고향이 어디냐?" "예, 낳기는 병원에서 낳고요, 자라기는 종로에서 자랐어요."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이 목자의 생활을 알고 느끼고 그 감정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이 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 하나님은 얼굴이 깡마른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막대기를 들고 서 있는 그런 무서운 하나님도 아니고, 먹을 것을 한 보따리 들고 찾아오시는 그런 하나님도 아닙니다. 이 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다음의 몇 가지로 표현되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첫 번째는 인생을 기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기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아름답게 살도록 기르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기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건강하고 건전하고 힘잇고 싱싱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보면 여전히 가난하고 헐벗고 초라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하게 살고 빈곤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만 삭막하고 유독 몹쓸 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가꾸고 물주고 심으면 다 기름질 수 있는 그런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돌이 많은 땅인데 그들의 땅은 오히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넓은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게을러서 그 땅을 관리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프리카만 빈곤하게 살고 있습니까? 풍요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도 지금 호구지책을 못해서 굶고 있는 빈곤층이 3천 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전체 인구의 14%나 됩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인생들로 하여금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시인이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유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한눈을 팔면 쉽게 유혹에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사상가들을 보내시고 성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둔해서 자꾸만 그 길을 외면하고 이탈해서 때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도 양은 아주 우둔한 동물입니다. 양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양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게 말할 때 양순이지 이 말은 우둔하다는 말이고 미련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은 위험이 닥쳐와도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누가 와서 끌어가도 그냥 끄는 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과 똑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과자 사 준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좇아갑니다. 양순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아무나 따라가지 못하도록 훈련하고 길들여서 내 양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양은 대부분 자기 목자의 말 이외에는 따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
그런데 거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알고 잘 따라가다가도 그 양이 일단 병이 들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아무나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위험을 당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지한 양의 말로입니다.
중동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세 사람의 목동들이 양떼를 거느리고 시냇가에서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물을 다 먹인 후에 한 목동이 큰 소리로 "멘아 멘아" 하고 부르니까 그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는 모두 따라가더랍니다. 또 조금 있다가 두 번째 목동이 "멘아 멘아" 하니까 그의 양들이 또 따라가더랍니다. 자기의 양떼를 셀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의 양들만 따라갑니다. 여기서 "멘아 멘아"라는 말은 아랍말로 "나를 따라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도 신기해서 이 구경꾼이 나머지 한 사람에게 나도 좀 불러 보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옷을 빌려 입고 지팡이를 들고 양들을 향해서 "멘아 멘아" 하고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한 마리의 양도 들은 척을 하지 않더랍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목동에세 물었습니다. "당신의 양들은 언제나 타인을 따라가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이 목동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왠걸료, 더러 따라가는 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병들었을 때입니다.
여러분, 사람도 건강하고 바르게 살 때는 바른 신앙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때는 순종도 잘하고 생각도 건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단 신앙에 병이 들게 되면 이정표를 바로 보지 않습니다. 보아도 분간을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탈하려고 합니다.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후회하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손 들고 옵니다." 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목동이 생활을 해보았습니다. 양을 치다가 맹수들이 와서 양을 물어가면 물매를 들고 쫓아가서 맹수들을 물리쳤고 쫓아가서 붙잡고 함게 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양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지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을 마치 그렇게 자기를 지켜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양순하던 양도 어떤 때는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양순하던 양도 매를 자초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손에 들린 막대기는 어떤 때는 길을 인도하는 도구가 되지만 또 어떤 때는 양을 때리는 채찍이 되기도 합니다. 목자는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양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지팡이를 매로 사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누이신다"는 말의 원문을 보면 라바츠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강제로 눕힌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목자는 때로 양을 인도하되 강제로 눕혀 놓아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는 말은 "그가 나를 강제로 누이시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강요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한 목동이 양우리에 가서 다리가 부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양에게 먹을 것을 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양이 어쩌다가 그렇게 상했느냐고 물었더니 목동이 대답하기를 일부러 양의 다리를 꺾어 놓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이 목동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이 놈이 하도 고집이 세서 제멋대로 뛰쳐 나가니 그러다가는 위험을 당할 것이 분명해서 꼼짝 못하도록 다리를 꺾어 버렸습니다. 며칠 동안 먹이를 주고 다독거리면 그 다음부터는 길들여져서 말을 잘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매라는 것을 맞아 본 경험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필요하시다면 매를 드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채찍을 들기도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면 꼼짝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뜨려 놓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안방에 강제로 눕혀 놓기도 하시고 병원에 눕혀 놓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그를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렇게 매를 맞고서도 깨닫지를 못하는 우매함과 무지함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무지하면 누구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더 좋은 길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도와주려고 해도 자신이 거부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시인이 노래한 그 넓은 광야에서 부드럽게 나타나셔서 만나 주시고 인도하시고 기르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하나님을 인생의 선하신 목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고백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축복의 나라가 될 것입니까? 왜 그리 한숨이 많고 고뇌가 많고 탄식이 많습니까? 그것은 선하신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과 멀어져서 그렇습니다. 이 인생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승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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