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우리 인생들을 오라고 하십니다! (마 11:28-30)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인생을 말하기를 "인생 자체가 고통이다. 많이 먹어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먹지 말아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결혼을 해 봐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결혼을 하지 말아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다. 오래 산 사람보다 짧게 산 사람이 행복하고, 짧게 산 사람보다 낳아서 금방 죽은 사람이 행복하고, 금방 죽은 사람보다는 낳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다" 라고 인생을 말했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무덤이 하나가 있는데, 그 무덤 앞의 비석에는 '최대의 행복 자' 라는 비문이 쓰여 있습니다. 어느 순례자가 그 비문을 보고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최대의 행복 자인가' 궁금하여 파보았더니 빈 무덤이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최대의 행복자라는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사는 존재입니다. 한 마디로 현대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곤하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치원 가방을 든 두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한 아이가 제 친구더러 "아이 피곤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물었습니다. "뭐가 그리 피곤하니?" 그랬더니 "아저씨 유치원 갔다 와서 피아노치러 가고 미술 학원에 가고 주산 학원에 가고 무용학원에 가는데 어떻게 안 피곤해요?"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굉장히 피곤한 인생인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에는 고통과 한숨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고대광실 높고 넓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도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꽃가마 속에서도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또 사글세방에서 가난과 싸우며 사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2층집 창문에서 젊은 여인이 밖을 내려다보며 리어카에 검은 연탄을 싣고 가는 젊은 부부를 보면서 "우리 부부도 저들처럼 건강하고 화목했으면 좋겠다"라고 부러워하고,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배달하던 가난한 젊은 여인은 "나는 언제 저런 집에서 이런 고생 안하고 살 수 있을까?" 하고 부러워합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그 무거운 짐에 대하여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苦海>라고 부릅니다. '어렵고 맵고 힘이 드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 고해는 나에게 주어진 업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고, 이제부터라도 많은 공덕을 쌓아서 다음에 태어나는 세상에서는 좀 평안해 보자는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일에 시달려 안식과 평안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날마다 무거운 짐에 억눌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이 부르시는 초청장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안식을 찾아 헤메입니다. 소위 '스트레스'를 풀어보자, 어디 확끈한 데가 없을까? 그래서 산을 찾기도 하고, 강과 바다를 찾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장을 찾기도 하고, 오락 깨임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찾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약 속에서 안식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술이 우린 인생을 평안하게 해 주지 못하고 마약이 우리를 쉬게 해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쾌락은 있을 수 있으나 깨고 나면 더 허전하고 불안합니다.
참다운 안식은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 첫머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쉴 때만이 참 안식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이 참 안식이 있고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인도의 성자 '썬다싱'의 이야깁니다.
그의 나이 18세대 인생의 번민이 찾아 왔습니다. 그의 마음이 불안하고 초초함이 그를 짓눌렸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진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으며 여러 가지 종교를 섭렵했습니다.
파라문교, 힌두교, 마호메트교, 불교 등, 그러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특히 불교에 심취하여 수도승들의 가르침을 받아보았지만 거기에서 참 안식을 찾지 못하고 더 좌절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찾지 못할 바에는 죽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하고 죽기로 결심하고 철로를 베개하고 누어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종이 쪽지 하나가 바람에 날려 자기 앞에 떨어집니다. 무심코 들여다보니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전도지입니다. 거기에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썬다싱은 두 눈이 확 띄었습니다.
다른 종교는 스스로 선행을 하고 의를 쌓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예수가 누구이기에 내게로 오라고 하는가?
그는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히말리야 산맥을 넘나들며 주님의 복음을 전했고, 주의 사랑을 실천했고, 큰 능력을 얻어 '인도의 사도 바울'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1. 인생은 어떤 존재입니까?
한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입니다. 그런데 "수고"라는 단어는 인간이 처음 죄를 범했을 때 찾아왔습니다.
창3:16-17절에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은 "네가 이제부터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아담에게도 "이제부터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고는 단순한 노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입니다. 여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는 말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두 개념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말입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고생할 것이 없는 데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고생은 모두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무거운 짐'은 어쩔 수 없이 지고 나가는 짐을 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피하거나 모면할 길이 없어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고통입니다. 원하지는 않지만 부득이 끌려가면서 억지로 당하는 그런 고통을 말합니다. 이런 짐이 '무거운 짐'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4중고를 말합니다. ▶사는 것이 고생이고 ▶늙는 것도 고생이고 ▶병든 것도 고생이고 ▶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네 가지의 인생의 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짐: 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하고, ▶정신적인 짐: 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그리고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 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이고, ▶종교적인 짐: 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의 철학적 명제 중에 한계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 고통, 병, 우연한 염려, 투쟁과 전쟁,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현이나 철학자들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는 밝히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인생의 짐을 해결해 주신다고 오라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주님만이 해결자요, 치료잡니다.
2. 인생들의 짐이 무엇인가?
①뭐니 뭐니 해도 죄의 짐이 무겁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공자(孔子)를 찾아갔답니다.
공자는 [획죄어천이면 무소도야라(獲罪御天 無所陶冶)] 즉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면 사함 받을 길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석가모니에게 갔더니 '전생에 죄를 지었으면 이생에서 그 죄의 업보를 받을 것이고 이생에서 죄를 지었으면 내생에 그 업보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난행고행(難行苦行)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사1:18절 "오라 우리가 서로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살인강도도, 세리장 삭개오도, 창녀와 같은 막달라 마리아나 간음하다가 끌려온 여자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요일1: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 어떤 죄도 용서하십니다.
②질병의 짐도 무겁습니다.
인간이 치료할 수 있는 병도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병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많이 행하신 일이 병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사53:4-5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에서 예수 이름으로 모든 병을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병뿐 아니라 정신적 염려, 불안, 초조, 고독, 절망의 짐을 해결해 주십니다.
요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빌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③생활고(生活苦)의 짐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굶어죽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6:31-33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후8: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신8: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믿으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하나님을 잘 믿으면 재물의 복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언약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겸손한자에게 재물을 약속하십니다.
잠8:21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잠22: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그런데 재물도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상하시게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6: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④죽음의 공포, 무서운 짐입니다.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인간이 불안해하는 것은 죽음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요11:25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소망이 있기 까닭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초연하여 두려움이 없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전15: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죽음을 호령했습니다.
3. 주님의 초청은 위대한 초청입니다.
세상은 모두 가라고만 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온통 가라는 말뿐입니다. 몸담고 있던 일터에서도 가라고 하고, 그렇게 절친하게 지나던 친구도 우리를 가라고 합니다.
이용할 가치가 없으면 세상은 우리를 모두 가라고 합니다. 젊음도 우리를 붙들지 않고 가라고 합니다. 벌써 우리는 2003년 5월의 마지막 주간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오라'고 하십니다. ①마음이 괴로운 분도, ②고독한 분도, ③사업에 실패한 분도, ④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도, ⑤친구에게 배신당한 분도, ⑥병중에 소생할 가망이 없는 분도, ⑦죄인도, ⑧살인자도, ⑨강도도, ⑩자식들에게 배척을 받은 늙은이들도, ⑪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한 어린이들도 ⑫패륜아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초대를 받습니다.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울부짖으며 아지랑이 아롱대는 봄 동산의 초대는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합니다. 시원한 바람! 그칠 줄 모르는 바다! 녹음방초 우거진 낭만이 깃던 여름 산과 강과 바다는 젊은이들에게 낭만을 줍니다.
가을은 어떻습니까? 단풍이 붉게 물들고, 황금물결 치는 오곡백화의 초대!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눈 덮인 겨울 설경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습니까? 이와 같은 초대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자연의 초대입니다.
이와는 달리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초대도 있습니다. 생일초대, 약혼식, 결혼식, 개업초대, 회갑초대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들의 초대는 극히 제한된 초대요,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초대는 차별이 없고, 상하가 없고, 구별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실패자도 성공자도, 남녀노유 빈부귀천 막론하고 그 누구도 제한하지 않는 초청입니다.
■성경에는 오라는 말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400여번 있고 구약성경에는 200여번 나옵니다.
①죄의 문제를 다루시기 위해 오라고 하십니다.
사1:18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②목마른 자들도 오라고 하십니다. 계22:17절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사55:1-3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③회복을 주시려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원래 상태를 주시려고 초청하십니다.
호6: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④쉼을 주시려고 오라고 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어린 아들을 향해 어서 오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버지의 품, 그곳엔 안정이 있고 보호가 있고 사랑이 있고 숨결이 있습니다. 그 품속엔 돈도 있고 기쁨도 있고 장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과 쉼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내게로 오라'입니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막9:23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면 아멘! /할렐루야!/
■주님의 초청은 약속 있는 초청입니다. 참된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 필요한 것은 쉬는 것입니다. "쉰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다시 살려 준다"는 뜻입니다.
오랜 여행 에 지쳐 있는 사람은 쉼이 필요합니다. 노동에 지친 사람은 쉼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안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평화를 주십니다.
①현실적인 평안입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②종말론적인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평안, 천국의 평안입니다.
여러분!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잠깐 맛을 좀 봅시다.
계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계22:1-5절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4. 위대한 초청에 교환조건이 있습니다.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를 초청하신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편안하고 온유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독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마5: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임이요" 모세는 "그 온유함이 이 땅의 모든 자보다 뛰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온유란 말은 ①환자의 열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환자가 열이 나서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환자에게 해열제를 써서 정상 체온을 유지하게 할 때가 온유한 상태입니다. 마치 세속의 감정으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자가 말씀으로 세속적인 열기가 잡혀졌을 때 온유한 사람입니다.
②이마에 흐르는 땀이 식혀 졌을 때입니다. 농부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흐르는 땀이 식고 바람으로 열기가 잡혀졌을 때가 온유한 상태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 아래서 안식을 찾음과 같습니다.
③교육과 훈련으로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조련사에 의해 야생 짐승이 훈련을 받아 길이 들어져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 기르는 가축은 주인의 뜻을 잘 아나 야생 짐승이 주인의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서 야수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이 잘 드려져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온유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①주님의 탄생을 봅시다. 하늘보좌에서 가장 작은 나라 유대에, 가장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가장 추한 마구간에 오셨던 것입니다(마2:1, 눅2:7).
②주님은 선생된 그가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기는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천하가 다 주님의 것이나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 없이 일하셨던 것입니다(눅9:58).
③주님의 죽음을 봅시다. 최후에 죽으실 때는 좌 우편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자신이 누울 굴(무덤)도 없어서 남의 무덤에 누우셨던 것입니다(마27:38, 막15:46).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하나로 묶은 단어가 순종입니다.
바울은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 합니다. 빌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나 말 목에 메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소 두 마리를 나란히 놓고 멍에를 메웁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옥토는 별로 없고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그래서 소 두 마리가 밭을 갑니다. 소 두 마리가 멍에를 멜 때 한 마리가 힘이 세 면 다는 한 마리는 그냥 따라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예수님께서 힘이 좋으시니까 그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벼운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본인 성경 주석가인 흑기는 "그리스도와 같이 메는 멍에이기 때문에" 그것은 쉽고 가볍다고 했습니다. 주석가 '메이어'는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쉽고 가볍다고 했습니다.
■배우라는 말은 내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스승과 학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도(弟子道)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마음을 열고 따르며,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제자도 입니다.
그리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행하는 일을 보고, 그리고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까지도 보고 듣고 배웁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우라"는 말만 들어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냥 배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더 스트레스를 밭습니다.
여러분!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아닙니다. 메고 배울 때 우리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소 두 마리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갈 때 첫째, 멍에가 편안해야 합니다. 딱 맞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두 마리 소가 보조가 잘 맞아야 합니다. 주님 주신 멍에가 쉽다는 것은 주님과 같이 멍에를 메게 되었고, 한 짝이 되었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같이 멍에를 메니까 쉬운 겁니다. 짐이 가볍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메지 말아야 할 멍에도 있습니다. 갈5: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목적은 "우리 마음이 쉼(안식)을 얻고,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부르십니다. 오늘 이 자리가 주님 초청에 응답 받는 자리가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3년 5월 25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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