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봇시대를 접고, 에벤에셀로 가는 길! (삼상 7:5-14)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때로는 이가봇 시대가 있었고, 때로는 에벤에셀 시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가봇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 이러한 뜻입니다. 삼상4:21절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 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해 버린 사건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입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손에 붙인바 되어서 고통의 멍에를 메어야만 되었고, 그들 사이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에벤에셀 시대는 다릅니다. 에벤에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도우셨다!"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시대, 그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고,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승리가 있었고,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드시고 지켜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가운데는 축복이 임하고 평강이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가봇에 처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에벤에셀에 처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스스로 살펴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가봇시대에 있으면 큰일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에벤에셀이 되어야 합니다. 삼상4-7장까지 보면 엘리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변환기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이가봇 시대가 가고, 에벤에셀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이가봇의 원인을 알아보고, 또 에벤에셀의 비결을 배워서 우리 모두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때는 엘리가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엘리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제사장의 업무를 맡겼습니다. 엘리는 몸도 늙었지만 마음이 더 늙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지 아니하니까 한나가 성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그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를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이 엘리는 기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이 맑지 아니하니까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희귀했습니다. 그곳에 제단은 있었지만 기도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 제단은 불꺼진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시대에 이가봇 시대가 도래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대단히 불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할 때 중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음란한 짓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블레셋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맞아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나버렸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은 싸움에서 패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싸움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마저도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이 엘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때 엘리의 나이가 98세였는데, 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종말입니까?
그때 엘리의 큰 며누리, 그러니까 비느하스의 부인이 임신 중이었는데, 갑자기 여러 가지 비극적인 소식이 한꺼번에 전해오자 충격을 받고 갑작스럽게 해산의 고통이 느껴 죽어가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는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가봇 시대, 곧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사회를 떠나버릴 때 거기에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만 있었습니다. 불행과 비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가봇 시대를 마감하시고, 에벤에셀 시대를 새롭게 여시기 위해서 신실한 종 한 사람을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입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이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렇게 해서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경건 생활에 힘썼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지만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오셔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나면서 하나님은 사무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무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엘리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제일 먼저 전국적으로 회개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즉 미스바 성회를 열었습니다.
성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그들이 한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모든 이방신들을 다 제하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온전히 섬기게 했습니다. 이것이 아가봇을 청산하고 에벤에셀로 가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와 한나의 자녀교육을 비교해 보고 느끼고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가봇'이냐 '에벤에셀'이냐는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있기 때문입니다.
①엘리는 자식들의 죄에 무관심했고, 한나는 자식을 거룩하게 키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으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사를 짓밟고 신성을 모독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드리러 오면 세살 갈고리로 솥에서 찔러내어 구워 먹고, 삶아 먹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불경죄입니다.
삼상2:17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고 했고, 22절에 보면 소위 제사장들이란 사람들이 회막문에서, 즉 거룩한 성전 안에서 수종을 드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무관심했습니다.
23-24절에서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하는 정도로만 이야기했지,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치거나 심하게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삼상3:13절에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는 말이 히브리어에는 "그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들이 저주받을 짓을 했는데도 눈살도 찌푸리지 않았다면, 갈 때까지 간 증거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는 뜻은 거룩하게 구별해 키웠다는 뜻입니다.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수종을 들며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결국 제사장 엘리에게는 계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어린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국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나갔다가 법궤도 빼앗기고 자기들도 전사해서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사무엘은 큰 회개의 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잘못을 바로잡고 죄를 지으면 징벌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잠13:24절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29: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②엘리는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존중히 여겼고, 한나는 하나님을 더 존중했습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함을 짓밟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삼상2:30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요, 그 자식을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삼상2:29절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분노에 가득 찬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전혀 그와 반대입니다. 한나는 기도 응답으로 받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젖떨어지자마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전에서 자라며 수종을 드는 일을 했습니다. 웬만하면 "서원은 그렇게 했지만 몇 년만 더 데리고 있겠습니다." 했을 터인데 한나는 젖떨어지자마자 냉정하게 떼어 성전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고 나라도 구원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백 세나 돼서 받은 아들을 너무 귀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만 차지해야 될 마음의 지성소에 아들이 차지한 것을 보시고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돌려주실 뿐 아니라 엄청나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10:37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 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신앙을 무의미하게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며 자녀들의 육신과 영혼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③엘리는 기도하지 않았고, 한나는 간절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12-13절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한나는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간절히 깊이 있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엘리가 "술 취한 사람"인 줄 알았겠습니까?
삼상1:15절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합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삼상1:16절에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한나는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한 사람이며 억울하고 분한 것을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물 쏟듯이 쏟아 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는 것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엘리가 한나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는지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할 때에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나는 참 믿음의 기도를 드린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종 엘리의 축원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고 한 말씀을 보면 "주의 종의 기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막11:24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 엘리는 기도했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눈이 어둡고 영의 귀가 어두워서, 간절히 기도하고 오래 기도한 한나를 술 취한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엘리의 자식들은 타락하고 방탕하다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법궤도 다 빼앗기고 나라를 망쳤지만 기도의 사람,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영적으로 큰 회개운동, 기도운동, 부흥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한마디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이기봇' 시대를 만들고, '에벤에셀'시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본문은 신앙교육을 잘 받았던 사무엘이 '이가봇' 시대를 마감하고 '에벤에셀'로 가는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비결을 본문에서 찾아봅시다.
①역사적 상황
엘리 때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사무엘의 때에 돌아왔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사무엘은 그 백성들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영적 각성과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미스바의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정보를 접한 블레셋 사람들이 군사를 모으고 이스라엘을 치려고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철병기로 무장한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인 것은 전쟁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회를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다 그들은 금식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말발굽소리를 듣게 되자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을 위해서 쉬지 말고 부르짖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양을 취해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큰 우뢰가 블레셋 사람들의 진 사이에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뇌성벽력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뒤를 추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이스라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승전(勝戰)의 기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계속하여 승리를 주시므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치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사무엘 시대에 계속적인 에벤에셀의 축복이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실 때는 큰 승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에벤에셀의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②에벤에셀의 축복은 먼저 우상을 청산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3)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하나님은 우상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제2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출20:3-6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더 깊은 우상의 개념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애착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을 버리라고 합니다. 본문 3절에서도 우상을 버릴 때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길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돈보다, 자식보다, 명예보다, 직위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③그들이 모이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5-6).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 명에 따라서 그들이 모였습니다. 6절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그들이 모여 무엇을 했습니까? 금식하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절에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를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사사 시대 전체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물을 부었다는 의미는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로써, 물을 부음과 같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는다는 의미입니다. 물 쏟듯이 그들의 죄악을 마음에서부터 토하고 다 쏟은 물처럼 남김없이 철저하게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물을 붓고 금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
회개운동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는 과정입니다. 깨끗한 그릇에 음식을 담듯, 하나님도 깨끗한 심령 위에 복을 주십니다. /믿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미스바에 다 모였습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인 것이 자신의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미스바에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모여야 에벤에셀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일 때에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숯불이라 할지라도 따로따로 떼어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불길이 금방 사그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함께 모아놓을 때는 힘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신앙의 부흥운동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일 때 일어났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큰 권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모이기에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세상일이 바쁜지 요즈음의 성도들은 모이기에 힘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님, 죄송합니다. 요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럽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쁘셔도 눈과 코는 뜨고 살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눈과 코를 뜨지 못합니다. 산 사람은 눈과 코를 뜨고 사는 잡니다. 정말 세상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 하나님이 "이가봇!" 해 버리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원토록 눈과 코를 감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주를 위해서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엘리 시대에는 모임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가봇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때는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에벤에셀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또 어떤 여자 집사님은 일주일 내내 스케줄이 꽉 있어서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월요일은 달월(月)자이기 때문에, 초생달처럼 몸매를 날씬하게 가꾸기 위해서 테니스를 치는 날로 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화요일은 불화(火)자이니까, 요리 강습하는 날로, 수요일은 물수(水)자이니까 수영하는 날로, 목요일은 나무목(木)자이니까, 꽃꽂이하는 날로 정했답니다. 금요일은 쇠금(金)자이니까, 돈 쓰는 날로 쇼핑에 바쁩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흙토(土)자이니까 주말 농장에 가서 하루를 투자하는 날로 정했답니다.
스케줄이 꽉 찼습니다. 그저 주일날 하루 남았는데 그 날은 밀린 집안 일도 해야되고 친구들도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가봇!"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장납니다.
④뜨거운 기도운동이 있었습니다.
5절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8-9절에 보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원한 호흡입니다. 기도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능력이고, 기도는 응답입니다. 기도는 나와 우리 가정과 이웃과 국가를 살리는 위대한 힘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미스바로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철병기로 무장한 군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싸우기 위해서 미스바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성회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무기다운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의 기도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은 부르짖는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때로는 묵상으로 말없이 기도할 수도 있고,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듯이 사근사근하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급할 때는 사무엘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통합니다. 예수님도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피땀 흘리시면서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우리도 부르짖을 때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본문에 사무엘의 부르짓는 기도는 응답 받는 기도였습니다.
10절 "그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여러분! 우뢰를 발하여 불레셋을 진멸하신 것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⑤바른 예배운동이 에벤에셀로 가는 비결입니다.
3절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고 하십니다. 9-10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스라엘은 예배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예배를 회복하는 운동이 미스바의 부흥운동입니다. 바른 예배는 '젖 먹는 어린 양'으로 드리는 제사, 제물 있는 예배, 곧 피의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공로에 의한 예배만 참된 예배입니다. '온전한 번제'의 예배, 완전 희생의 예배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이가봇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에벤에셀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무엇을 보시든지 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를 보시면서도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저 하찮은 새도 다 먹여 주시는구나!"
예수님은 들에 있는 들풀을 보시면서도 그냥 무심히 보시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지어질 저 들풀도 내 아버지께서 잊지 않고 저렇게 입히시는구나!"
예수님은 아름다운 꽃을 보시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저렇게 아름답게 입히셨구나!"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시62:5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우리는 아침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저녁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형통할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곤고할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쁠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슬플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도와주십니다.
⑥에벤에셀은 어떤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①영원한 승리입니다. 13절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②잃었던 땅을 회복했습니다. 14절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③평안이 임합니다. 14절 끝 부분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2003년 5월 18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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