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롬 1:16-17)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사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천국 같다온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합니다. 목사님께 인사 겸 와서 천당 같다 온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님이 “장로님, 정말로 천당이 있습디까?”라고 했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함흥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어느 서양 선교사가 산골을 지나다가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이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때 이 선교사가 호랑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마지막 기도를 할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그렇게 호랑이에게 부탁을 하고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 선교사가 한참 동안 기도하는데도 이 호랑이가 덤벼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살며시 눈을 떠보니까 호랑이도 그 옆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예수 믿냐?” 그랬더니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기도했냐?” 그러자 호랑이가 대답하기를 “지금 식사기도 했다”고 하더랍니다. 웃자고 해본 이야깁니다. ◀제목소개!▶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낼 그 당시에 세상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지금 로마에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그 당시 로마인들이 이 편지를 받아서 읽었다면 참 가소롭기 짝이 없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이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칼과 창과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했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이 복음을 가지고 로마를 사랑으로 지배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본문 16절“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을 더 줄이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서에는 복음이란 말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늘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능력’이란 말과 ‘복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복음이란 말은 참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1. 복음이란 무엇인가(16절)?
복음이란 말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로, ‘기쁜 소식 또는 좋은 소식,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이라 해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인간의 근본 문제가 왔습니다.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왔고, 수고의 고통과 인간이 설키고 얽힌 문제들이 그때부터 들어 왔습니다. 소속부터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품에서 마귀의 품으로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복음(예수)은 모든 것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힘’을 나타내는 ‘두나미스’라는 말로 영어로는 ‘다이너마이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이너마이트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터지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나타냅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내용은 어쩌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저 팔레스틴 촌사람들이 헛소리를 하고 있구나. 배웠다고 하는 바울이 왜 이런 헛소리를 하지”하고 무시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여 온 지구촌을 덮고 있습니다. /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을 무엇으로 받는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말씀에서 옵니다. 그래서 성경 66권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것이 신앙의 삼박자입니다.
구원에 확신을 주시는 말씀 몇 개만 찾아봅시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행16:31“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요1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교회 안에 종교다원주의가 들어와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무식이 충만한 소리를 합니다. 다른 종교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른 종교도 인정해 주십시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종교에는 생명이 없고 구원이 없습니다.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습니다. /믿/
▶요일 5:11-12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 이 말씀에서 구원에 확신을 붙잡아야 합니다.
2.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17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이 누구인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의인으로 부르셨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입혔고,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여호와의 은혜를 입은 자요, 의롭다함을 받아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의 대우를 받는 은혜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규정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말씀에 인용을 했습니다.
①주님이 우리를 향하신 깊은 관심이 무엇인가?
믿음입니다.‘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에 제자들에게 책망과 탄식의 말씀을 하신 것은‘믿음이 적은 자들아’이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보고‘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두려워하느냐, 염려하느냐?’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함양미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이 인정하기에 미달되는 믿음, 예수님이 쓰시기에 미달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문제는 결국 믿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인간관계 문제, 직업문제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이 문제의 궁극적인 해답은 믿음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4복음서에 보면 ‘믿으라’는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믿으라는 말씀을 강조할 때 두 가지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두려워 말고’믿으라고 했고, 두 번째는‘의심하지 말고’믿으라고 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두려워하면 의심에 이릅니다. 의심에 이르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장애물은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풍랑이 몰아치는 갈릴리바다에서 제자들이 두려워 떨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 주님은“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느냐?”두려움과 의심 속에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어라’는 말은‘의심과 두려움을 버리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약1:6-8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잠16: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시55: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맡기라는 말씀을 시편 기자가 수없이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믿으라는 말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믿으라'는 말의 가장 실제적인 표현은 바로 맡기는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모든 것이 맡겨집니다. 히브리어에 '맡긴다'는 말은 '내어 던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말과 표현이 반대개념입니다. 우리는 맡긴다는 것을 던져버리는 것이 아닌 소중히 보관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내가 무엇을 맡긴다면 반드시 찾으러 온다는 개념으로 맡깁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적 뜻은 정반대입니다. 다시는 미련을 두지 않고 내어 던져 버리듯이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까? 맡길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석가도 마호메트도 공자도 김일성도 다 이루고 간 사람이 아닙니다. 다 이룬 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때 그 분이 이루어 주십니다.
②눅8:42-52절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를 한번 조명해 봅시다!
그는 참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12살 된 외동딸을 두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갔는데 두 가지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딸의 이 중한 병은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께서는 내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께로 가야만 해결된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두 번째는 그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하면 대단히 큰 사건입니다.
그 당시 주님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 정도로 대단히 천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죄인의 친구로 멸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 결코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가 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는 이것은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볼 때는 대단히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회당장은 율법의 선생님입니다. 율법의 지도자입니다. 유대주의의 지도자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지도자에 속하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사렛 목수의 아들 앞에, 죄인의 친구라고 비웃음을 받는 그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주님은 야이로의 그 진심을 받아들이고 그의 집으로 가 주시기로 허락을 했던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온 그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하고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이 시간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예배당에 나온 이것으로 예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배에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이 자리에 오셔야 됩니다. 믿고 기도해야합니다. 믿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나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답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 가야 문제의 답이 있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와야 예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그 순간에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위기가 없을 때 믿음이 아니라 위기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이로는 자기에게 부딪힌 그 현실 앞에, 그러니까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그 현실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야이로야, 네가 지금 힘드냐? 괴로우냐? 참지 못하겠느냐? 이해가 안 되느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고집스럽습니다. 미련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할/
약2:1절 “네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받은 믿음을 우리가 키워야 됩니다. 그래서 약2:5절에 가서는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려고 내가 너를 택했다”고 하십니다.
슬로보니게 여인을 향하여 주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불쌍한 슬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이 부요했습니다. “주여 우리 집에 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주님은 이 백부장을 보고 “이스라엘 아무에게도 이 만한 믿음을 내가 만나보지 못하였도다”고 그를 칭찬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부요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부요한 사람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 믿음이 네게 옮아옵니다. 믿음이 부요한 사람과 가까이 하십시오. 믿음이 부요한 사람과 함께 일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답니다. 믿음에 부요한 자로 주 앞에 살아야 됩니다. 믿음에 부요한 자로 일해야 됩니다. 믿음이 메말라 가지고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믿음에 부요한 우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네가 오늘은 어떤 믿음으로 나아왔느냐? 네가 어떤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느냐?’우리 모두 큰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③믿음으로 산다는 이 원리는 지금도 살아있는 불변의 원리입니다. /할/
▶믿음으로 산다는 이 말 앞에는 불신앙을 이긴다는 원칙이 들어 있습니다. 불신앙을 이겨야 믿음으로 살아집니다. 이 불신앙에 막혀 버리면 믿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 불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불신앙과 영적 전투를 하는 삶입니다. 이 불신앙과 부딪혀서 싸워 이겨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전투적인 용어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려면 영적 무장이 있어야 합니다. 엡6:13-17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믿음으로 산다는 여기에 가장 도전하는 세력은 사탄의 세력입니다.
이 사탄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불신앙의 길로 가도록 충동합니다. 사탄은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가는 자들을 정확하게 구분합니다. 이 말을 역설적으로 말하면 마귀도 믿음으로 사는 성도를 좋아합니다. 불신앙으로 사는 성도는 마귀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 이미 자기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마귀의 시기 대상이 됩니다. 어떻게 하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것이 세 가지입니다.
⑴우리 자신입니다. 불신앙은 내 자신 안에 있습니다.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의 제1영역은 내 자신, 내 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함양미달인 자들입니다.
⑵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믿음으로 살도록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일들은 모두가 사탄의 충동 하에 있습니다.
▶어느 대기업의 임원되시는 장로님은 장관과 술자리 하면서 폭탄주를 거절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다고 합니다. 모두 분위기가 고조되는데 사업상 장관을 모시고 대접하는데 장관이 이 장로에게 폭탄주를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장관님, 저는 크리스챤입니다. 술을 못합니다’장관은 정색을 합니다. 얼굴색이 변합니다. 그렇게 모두 웃고 떠들던 술좌석이 조용해졌습니다. 무슨 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그래요, 크리스챤은 술을 먹지 않습니까?’‘예, 저는 먹지 않습니다’ ‘다들 잘 먹던데?’‘예, 그러나 저는 먹지 않습니다’그때 술잔을 내려놓고 장관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진짜 예수꾼을 만났구만’그때부터 폭탄주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하면 잠시 후에는 우리를 알아주는데 타협을 하면 잠시 후에 ‘네가 무슨 장로라고, 네가 무슨 크리스챤이라고’ 속으로 비웃습니다. 사탄은 그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⑶사탄은 교회를 공격합니다. 마귀는 내 자신 안에서 나를 공격합니다. 그러다가 안 되면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나를 넘어지게 합니다. 그러다가 안 되면 교회 안에서 나를 넘어지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상처받는 것은 교회 와서 위로를 받는데 교회에서 상처받는 것은 위로 받을 곳이 없습니다.
④‘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붙들고 ‘루터’는 종교를 개혁했습니다.
●루터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법관이 되기 위해서 '에루프르트' 대학에 들어가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같이 있다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옳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 많은 고행을 했습니다. 심한 노동 명상 금식, 기도 그러나 그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죄는 분명히 더 적게 짖는데 마음의 가책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그리이스 성경책을 발견하고 보던 중 롬1:17절 말씀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성구를 읽는 순간 그의 영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가 수도하던 그 수도가 허무한 것이고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 말씀을 붙잡고 수도원을 뛰쳐나왔습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지금부터 오백년 전에 수도사가 수도원의 규칙을 위반하고 무단 이탈하는 것은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잡히면 죽는 일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수도원을 나오게 됩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모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와 동조해서 여러 수도사가 함께 나왔고, 수녀들도 9명이나 함께 나왔습니다. 수도사와 수녀들은 그저 수도원에서 수도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밖으로 나오니 직업이 없습니다. 생계가 막연합니다. 그 때 기도하던 중 마틴 루터에게 이런 지혜가 생겨났습니다. 그 수녀들을 보고 결혼을 권유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허용하는 것이고, 결혼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 수녀들을 전부 결혼시켰습니다. 그래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수녀 중에 '카타리나'라는 한 수녀가 있었는데 혼담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의 반응이 없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카타리나는 얼굴이 매우 길었답니다. 긴 얼굴에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오고, 코도 균형이 잡히지 않고 길게 늘어져 있고, 이마가 불쑥 나온 그런 용모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런 용모를 갖춘 카타리나는 혼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애쓰는 중에 루터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저 여자와 결혼을 해야겠구나!' 그래서 카타리나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를 뒤흔든 놀라운 스캔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교회와 사회는 일제히 루터의 결혼을 공격했습니다.
'타락한 성직자의 표본이다, 알고 보니 루터는 수도원에서부터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수도원 밖에서 결혼하고 말았다' 그 당시 지성의 대표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은 코메디로 막을 내렸다'고 혹평을 했습니다.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만큼 스캔들이 컸던 결혼은 역사 속에서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터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 앞에 정당하다', '우리의 결혼은 믿음으로 이룬 금혼을 강요하고, 수도사와 수녀들에게 결혼을 금한 악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승리하는 것이다' 이 신념으로 결혼을 붙잡고 공격을 이겨내면서 승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얼굴이 못난 이 카타리나에게 두 가지 은사를 주셨습니다. 카타리나는 그 당대의 지성이 뛰어난 수녀였다고 합니다. 원전을 해독하고 이해하는데 탁월했으며, 그는 타고난 천사와 같은 성품을 가졌다고 합니다. 루터를 개혁자로 성공시킨 배후에는 카타리나의 공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일화 중에 한번은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돌아와서 놀라 물었습니다. "여보, 왜 상복을 입었소?' "하나님 아버지가 죽었소" "하나님이 죽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루터가 깨닫고 용기를 얻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루터는 세 가지 명제를 걸고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오직 믿음(Sola Fidei)-믿음+행함(천주교)
구원의 근거가 자신의 공덕이나 선행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을 이룸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오직 성서(Sola Scriptura)-성서+전통+교황의 말(천주교)
신앙생활의 유일무이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말씀 위에 전통을 첨가했고, 나아가 교황의 말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두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Sola Glatia)-은혜+공로(천주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입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함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⑤‘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6: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런데 호세아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외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호세아는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인들, 여호와를 섬기다가 배반하여 세상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여호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는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외친 것입니다. 저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날마다 정한 시간에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고, 정해진 제사를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여호와를 멀리 너무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비록 저들이 몸은 성전에 와 있으나 그 마음은 너무도 멀리 가 있습니다. 비록 저들이 율법을 암송하고 입술로는 아멘하고 있지만 그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간곡하게 외친 것입니다.
호세아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알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동사로 ‘보아서 확인하여 안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의 아내를 압니다’라고 말하면 뺨을 맞는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를 안다고 하면 오래 관계를 맺어서 서로 깊은 정이 든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당신 아내를 안다고 하면 서로 정을 통한 관계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뺨을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히브리어로 누구를 안다고 하면 직접 그 사람을 만나보고 사귀어 보고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 여호와를 직접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호와와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에 관해서 직접 만나고 사귀어 본 체험을 토대로 무엇인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호와를 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한 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체험적으로 관계적으로 주님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시23편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자기가 여호와를 만났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지내보니까 그분은 마치 목자와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합니다. ‘힘써’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끝까지 추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냥을 해 본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사냥감을 추적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맹수의 제왕이라는 사자도 사냥감을 추적할 때 25% 밖에 성공하지 못한답니다. 사냥감에게 쉽게 들키거나 사냥감을 잡기도 전에 사냥감이 도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성품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집중력입니다. 사냥감을 포착했으면 한 눈을 팔면 안됩니다. 끝까지 그 사냥감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내력입니다. 사냥감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려면 이런 성품이 필요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⑴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만납니다. ⑵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레마’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⑶ 말씀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그대로 삶 속에서 순종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그 때 그 말씀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창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기사가 나옵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 말씀이 실제로 역사하여 구체적인 열매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암5:4절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리고 6절에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길은 딱 한 가지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밟다, 자주 가다,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몸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예배 현장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중심이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기도라는 형식이 됐든, 예배라는 형식이 됐든, 찬양이라는 형식이 됐든 상관없이 내 마음이, 내 심령이 여호와를 만나기 위해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갈고 닦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땀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땀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⑥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습니다(막16:17-18).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행16:18절 "바울이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약4: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새 방언을 말하며; 천국 방언, 하늘나라의 언어를 말합니다.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여기서 ‘뱀’은 독사를 말합니다. 이 독사는 사탄, 원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눅10:19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행19:11-12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약5:15-16절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인가 가진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지고 소유한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지탱시켜줍니다. 살아야 할 이유도 거기서 나오고 살아갈 힘도 거기서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돈으로 삽니다. 손에 돈 좀 가지게 되면 세상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가진 돈을 잃어버리면 세상 끝난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눅12장을 보면 소유의 허상을 깨닫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는 부자가 나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눅12:20절을 보면 주님께서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그렇습니다. 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권력으로 삽니다. 그 잘난 권력 잡아보려고 별 짓을 다합니다. 그러다 권력을 잡으면 의시대고 권력 휘두르는 재미에 정신이 없습니다. 또 그러다 권력을 잃어버리면 끈 떨어진 연처럼 맥없이 주저앉습니다.
어떤 분은 지식으로 삽니다. 남보다 많이 알고 그 아는 지식 자랑하는 맛으로 삽니다. 남들 무시하고 깔보고, 그러다 자기 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자존심을 다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잡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할/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할/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고후13: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2004년 5월 2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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