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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기 '전과 후' 우리의 실존! (엡 2:1-10)

by 【고동엽】 2022. 2. 3.

예수 믿기 '전과 후' 우리의 실존! (엡 2:1-10)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논할 때 가장 흔히 쓰는 말은 '다 팔자 소관이야!'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 팔자타령을 합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리고 남들의 인생을 부러워하면서 하는 말이 '그 사람 팔자가 늘어졌구먼', 심지어 마당에 낮잠 자는 개를 보고도 하는 말이 '저놈의 개 팔자가 상팔자네'
주역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연, 월, 일, 시를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네 기둥이라 해서 사주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운명은 사주를 따라 타고나는데, 그 타고난 운명이 팔자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팔자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가를 하게 될 때 '팔자 고친다'는 표현을 씁니다. 뜻하지 않게 떼돈을 벌어 잘 살게 되면 '팔자 고쳤다, 팔자 늘어졌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출세하면 '사람 팔자 시간문제다'라는 말도 씁니다. 그래서 소위 용하다는 점쟁이들은 그 사람의 팔자를 정확히 예견하고 그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을 자기가 안내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이런 인생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고, 팔자에 따라 운수가 정해져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섭리 안에 있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5학년 3반 청개구리들'이란 동화로 일거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최승환'이라는 작가가 '예수 믿고 팔자 고친 사람들'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자기와 주위 사람들의 간증을 바탕으로 일곱 사람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남편의 바람기로 고생한 주부가 예수 믿고 바람났던 남편이 돌아온 이야기, 점쟁이로부터 거지 팔자로 판명난 사람이 큰 기업 회장이 된 이야기, 몇 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를 믿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 등 모두가 세상 말로 팔자 고친 이야기들입니다. 전도용으로 권해 볼만한 책입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인생에 복이 찾아와서 세상 말로 팔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예수 믿고 나타난 외형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진짜 예수 믿고 나타난 본질적인 변화는 한 마디로 전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이제 예수 믿고 영적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유의 신학적 표현으로 '그 때에(예수 믿기 전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예수 믿고 난 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사망과 생명, 천국과 지옥, 저주와 축복의 갈림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요, 천국이요, 축복입니다. 반대로 예수 밖은 사망이요, 지옥이요, 형벌의 저주입니다. /믿/
1-3절까지는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리고 4-10절까지는 예수 믿고 우리의 달라진 실존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여러분! 인생의 절대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의 문제요, 영생의 문제입니다. 이 영생의 문제는 어떤 종교에서도 확실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 확실한 해답을 주십니다.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한 절 짧은 말씀에 인생들이 그렇게 고민하던 문제 해결이 다 들어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도 압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모릅니다. 더욱 그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1절에서 왜 인생이 죽었다고 합니까?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인생이 죄를 범하므로 죽게 되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죄로 인한 인생의 사망은 세 가지입니다. 사망은 분리를 말합니다. 생명은 연결된 것을 말합니다.
첫째, 영적인 사망이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분리인 영의 사망입니다. 둘째는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육신의 사망이 있습니다. 셋째는,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천국과 분리되는 영원한 지옥이 있습니다. 인생의 원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하나 따먹은 죄가 이렇게 세상에 죄와 사망을 끌어왔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 하나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 죄악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인생들이 범하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죄악 때문에 인생이 죽고 망합니다. 그런데 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영혼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살아나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2. '그때에'(2-3) '예수 믿기 전에'

 

2-3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때에 영이 죽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세 가지입니다.
①세상 풍속을 좇아 살았습니다. 2절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에 자랑을 좇아 삽니다.
산 물고기는 거친 물결도 차고 나가지만, 죽은 고기는 배를 드러내고 물 위로 떠올라 겉잡을 수 없이 물결에 휩쓸려 하류로 하류로 떠내려갑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물질주의 흐름에 휩쓸립니다. 쾌락주의의 물살에 휩쓸립니다. 이기주의 탁류에 휘말립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 풍속은 만족이 없습니다. 항상 고갈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려고 죄를 짓고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만족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평안이 옵니다. /믿/
②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릅니다. 2절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에 종노릇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두가 죄의 종들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소리하면 성질냅니다.
동해 바다에 가보면 해가 지고 바다가 어둠에 잠기고 나면 오징어잡이 배들이 나타납니다. 한결같이 이 배들에는 수백 개의 전구를 달고 있습니다. 전구들이 일제히 불을 밝히면 그 불을 보고 오징어들이 몰려옵니다. 미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그물을 쳐놓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몰려온 오징어들을 낚아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오징어들이 그 불의 유혹에 이끌려 죽는 줄도 모르고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를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유혹에 끌려 다닙니다. 그러다 죽는 줄도 모르고 따라 다닙니다.
③욕심 따라 죄를 좇아 삽니다. 3절 "우리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하고 싶은 대로 욕망에 따라 살아갑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들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제 멋대로 입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좋은 길을 열어줘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그 영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삽니다. 그래서 세상 풍조에 휩쓸립니다. 사탄의 유혹에 대책 없이 끌려갑니다.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결국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래 우리가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종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3절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3. '이제는'(4-10) '예수 믿고 난 후'입니다.

 

3절까지 '전에는' 이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 번역에서 빠진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라는 접두사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여기 '그 큰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요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바로 긍휼입니다.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속에 자비와 인자가 있습니다.
5-6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할/
함께 살리신 것은 우리의 중생을 말하고, 함께 일으킨 것은 우리의 부활, 하늘에 함께 앉히신 것은 우리의 영화를 말합니다.
①'예수 그리스도안에서'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결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결코 우리 노력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공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동안 결코 자기 힘으로 중력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력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죄의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선이 로켓의 힘을 빌리면 지구의 중력장을 벗어나 저 우주로 향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저 보혈의 능력을 힘입으면 죄의 능력을 물리치고, 사탄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7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구원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능력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②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삶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구원받아 다시 영적 생명을 얻게 되는 과정을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함께 살리셨고: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우리의 영이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이 다시 살게 됩니다. 우리의 영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 함께 일으키사: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기도하며 찬송하며 전도하며 봉사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드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로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재림 뒤에 주님과 함께 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심령 속에 하나님을 몰아내고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죄의 노예가 되어 내 욕망대로 내 멋대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죽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교제를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됐고, 이 땅에서도 저 하나니 나라를 맛보며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먼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양을 뜨겁게 부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밖으로 다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복된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주신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1700년대에 죤 뉴톤이란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열 살 때부터 배를 타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일찍 죽어 가남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배를 타는 생활 속에서 배운 것은 주로 거친 말투와 세상의 나쁜 짓들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열 살 때 부터 배를 타기 시작하여 28살 될 때까지 18년간 배를 타게 되었는데 그가 어린 나이에 선장이 되어 노예선을 타게 되었는데 주로 하는 일은 아프리카에 가서 사람들을 잡아다가 미국 대륙에 가서 파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을 학대하고 산채로 고기밥이 되게 하고 인간 말종의 삶을 살던 그가 1748년 3월 1일, 우연히 중세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 받아'란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을 읽던 중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때부터 어둡고 추한 그의 마음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쳤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자 펑펑 울면서 지나온 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놀라워 54세 되던 해인 1779년에는 그 유명한 찬송가 405장을 불렀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4. 8절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①믿음은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②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 주셔서 믿도록 하시는 분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을 때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③믿음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흔히 믿음을 사랑과 비교합니다.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려면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마음은 자신의 인격 전부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전부 그 분에게 드린다는 것입니다.
④믿음은 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롬10:10)"
⑤믿음은 돌아서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술집 주인이 빌리 그래함 목사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술집 간판에 써붙였습니다. '나는 어제 저녁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술집은 문을 닫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⑥믿음은 순종함으로 성장합니다. 성도는 순종을 기뻐해야 합니다.
⑦믿음의 열매는 겸손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제자가 어느 날 꿈속에서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곳에 높은 보좌가 있기에 누구의 자리냐고 물었더니 성 프랜시스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 제자는 슬그머니 질투가 났습니다.
꿈을 깬 후 그는 스승에게 가서 "선생님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성 프랜시스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선생님의 대답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항의했더니 성 프랜시스는 웃으면서 대답하길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만약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이 받았으면 그들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일세"

 

5.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징기스칸 이야기입니다. 징기스칸이 황제가 되기까지는 숫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황제가 될 것을 믿고 생명을 걸고 충성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은 황제가 되자 생사고락을 같이 한 이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내 사람이다. 너희들에게 이제부터 6가지 특권을 부여한다"
㉠너희들은 언제든지 누구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 올 수 있다. ㉡너희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먼저 고를 수가 있다. ㉢너희들은 앞으로 세금이 면제된다. ㉣너희들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어도 9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 ㉤너희들은 이 나라안에서는 가지고 싶은 땅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너희들에게 약속한 위에 5가지 권리는 앞으로 너희 후손 4대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이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릅니다.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너 하나님이 데려갈 사람아!'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너 하나님이 보호할 사람아!' 징기스칸이 자기를 따르든 자를 끝까지 책임져 주었습니다. 깡패 세계에서는 한 명이 감옥에 들어가면 다른 깡패들이 그 가족을 책임지고 먹여 살립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이 왜 책임지지 않겠습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너 가장 귀중한 사람아!' 시16: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줄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사49:5절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우리는 예수 때문에 운명이 바꿔졌습니다.
요5:24절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적어도 내 인생에 있어서 천지개벽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가 뭡니까? 정치문제, 경제문제, 도덕문제, 환경, 실업자문제, 물론 이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만 정말 문제는 철학자의 말처럼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삶의 문제요 죽음의 문제입니다.
▶'영생을 얻었고' 이것이 해답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의 집에서 생명의 집으로 이사했다는 말씀입니다.

 

6. 이제 우리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3:12-14).

 

한 잡지사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위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답했답니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사람도 많았답니다.
우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까?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①푯대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빌3: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는 말은, 하나는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이 골인 지점을 향해서 전력질주 할 때 쓰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며 사냥할 때 쓰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달리기 선수가 골인 점을 향해서 한 눈 팔지 않고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목표를 정해 놓고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목적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뿐이 아닙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가 바울처럼 목적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던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고기 잡으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인생의 목표랄 것이 따로 없는 '그럭저럭'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됐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전력 질주하게 됩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인생의 꿈을 다 접고 나이 80에 평범하게 양을 치며 살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만난 뒤에 변했습니다. 내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고 그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난 뒤에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렇게 바꿔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푯대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주안에서 인생의 푯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 만난 뒤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변화입니다.
왜 푯대를 향해야 됩니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상이 무엇입니까?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여기에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면류관을 바라보고 바울은 빌3:12절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은 바울의 사명입니다. 원래 바울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던 사람입니다. 야심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일찍이 고향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했습니다. 유대교에 철저히 헌신해서 당시 신흥종교로 골치 아픈 존재였던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최고의 랍비가 돼서 한 시대를 풍미할 야심 찬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온전히 그분께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를 붙잡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이제 그 이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은 그동안 자기가 꿈꾸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오물처럼 버리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주시는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얻어진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세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 잡힌바 된 그것에서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세워야 합니다.

▶요사이 주목받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흐름 가운데 하나가 '웰빙'(well-being)입니다. 말 그대로 '웰' 즉 '건강한, 만족한, 행복한'이고, '빙'은 '삶'을 살자는 문화적 흐름입니다. 이런 흐름에 편승한 사람들을 웰빙족이라 부른 답니다.
이 웰빙족들은 그야말로 건강한 삶을 추구합니다. 육체적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적 사회적 건강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를 추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유기농 야채와 곡식으로 만들어진 신선한 건강식을 먹습니다. 문화행사를 즐기고 레포츠나 자기만의 여행을 즐깁니다. 시간 나는 대로 건강한 삶을 이루기 위해 자신에 대한 최선의 봉사를 합니다.
이 웰빙족들도 뚜렷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건강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목표가 자신에게 사로잡힌 것이라는 점입니다. 혹평을 해 보자면 나만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를 잘 세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가족들에게 사로잡힌 목표여서도 안 됩니다. 또한 민족주의적으로 자기 사회나 국가에 사로잡혀서도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주님께 사로잡힌 것이어야 합니다.
미국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인생'이란 책에서 그가 제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의 목적은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⑴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⑵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⑶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⑷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⑸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다. 그러기에 푯대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②바울은 '부르심에 상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가는 그 길'을 13절에서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첫째,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선교여행 3차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쯤이면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바울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고 스스로를 채근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땅 끝까지 가지 못했고, 아직도 주변에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고, 아직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제 와서 쉬라 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은퇴를 정하고 자기 스스로 다 이루었다고 물러서면 안 됩니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칫 과거의 업적이 자기의 자랑이 되어 자기 발목을 잡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하면 됐다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앞의 것을 향해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달음질 경주에서 주로 쓰이는 말로 육상선수가 결승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100미터 경기를 보면 선수들은 마지막 순간에 남보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한눈 팔 여유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본다든지 옆을 본다든지 관중석을 본다든지 할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결승점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승점에 가까올 수록 더욱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오직 푯대를 바라보고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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