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마 21:1-11)
예수님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 동안 고난을 받으십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입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제목소개!▶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중심인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서울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출세하시려고 올라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죽으려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깊은 영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①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러 올라가셨습니다.
마20:18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말입니다.
②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관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이 즉위할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어느 누구도 잔치를 베풀거나 대관식을 열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가지시기로 결정하고 나귀를 타고 올라 가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오래 전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슥9:9절 "시온의 딸들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예수님은 이 예언대로 왕으로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진정한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초라하게 입성하고 계십니다.
■삼하에 보면 다윗이 처음 왕이 된 곳은 헤브론입니다. 이곳에서 유다 지파를 7년 6개월 다스렸습니다. 그가 통일 왕국의 왕이 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시온 산성 즉 예루살렘 성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 성에서 33년 간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도를 세운 후 하나님께서 이 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왕들이 이 예루살렘에서 통치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통치하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왭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즉 하나님을 상징하는 성물입니다.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옴으로써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법궤가 예루살렘에 오게 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참된 신정정치가 실현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가 들어오는 날 다윗이 그렇게도 기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통치자들이 많았습니다. 분봉왕도 있었고, 로마 총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뜻만이 난무하고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진정한 통치자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내 인생에 왕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리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가정에 왕으로 오셔서 가장이 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왕으로 오셔서 교회다운 교회로 이끌고 싶어하십니다. 우리 나라에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겸손히 그분을 맞아야 합니다. 그분을 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2절에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끌고 오너라"
예수님은 그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나귀는 너무 초라한 동물입니다. 외모도 보잘 것 없고 인물도 그렇게 못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입성하는 예루살렘 길에 이런 나귀를 타고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영적인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참된 왕의 모습이 이 어린 나귀 속에 담겨 있습니다.
①나귀는 누구도 이끌 수 있고, 누구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조그만 어린이들도, 노인들도, 여자들도 모두 끌고 다닐 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은 왕이신데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왕이십니다.
죄인이든, 병든 자이든, 버림받은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어린아이까지라도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할/이것이 축복입니다.
②나귀는 짐을 잘 집니다. 무거운 짐을 싣고 끌고 가는 인내가 한이 없는 짐승이 나귀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끌고 가십니다. 저의 짐을, 여러분의 짐을, 우리 죄악의 짐을, 무거운 걱정 근심의 짐을 홀로 지시고 대신하여 끌어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하여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③나귀는 순종을 잘하는 동물입니다. 주인에게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내어놓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참으로 나귀와 같은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④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막'과 '눅'보면 마태복음에 없는 사실이 하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나귀는 한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순수하고 순결한 새끼 나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심기 위해 오셨습니다.
⑤나귀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힘이 있지만 언제나 약한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라도 사랑하고, 누구라도 이해하며, 누구라도 용서하시는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못나도, 조금만 못 배워도, 조금만 가난한 사람을 만나도 얼마나 있는 척하고 군림하며 남을 힘들고 피곤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다섯 손가락이 모여 각자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먼저 엄지손가락이 뽐내며 말하기를 "나는 엄지야, 최고를 가리키잖아" 그러자 둘째도 지지 않고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집을 수 없어, 또 무엇을 가리킬 때 내가 없어봐" 그러자 이번엔 가운데 손가락이 끼어 듭니다. "나는 가장 키가 크단다" 그렇다고 약지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죽기 싫은 약지가 "사랑하는 사람이 반지를 어디에 끼워주는지 아니? 바로 내 손가락이야. 그러니 나는 가장 사랑 받는 손가락이라고"했습니다. 그런데 새끼손가락만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던 새끼손가락 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야 너희들 내가 없으면 병신들이야."
이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믿음 좋다고 하지만 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올려놓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왕의 왕이신데도 불구하고 겸손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1천년 전에 영국에 카뉴트(King Canute, 1016-1035)라는 한 괴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하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번은 이 왕이 신하들에게 '왕좌를 해변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놓인 왕좌에 앉아 수평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밀물이 밀려오는 파도를 향하여 "파도여, 멈추어라"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여러 번 명령했지만 물결은 사정없이 밀려들었고 왕이 앉은자리의 절반까지 물이 차 오르더니 급기야 왕은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 모두 똑똑히 보았느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찮은 것이다. 우주를 다스리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리고서는 이날 이후 왕은 왕관을 벗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상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왕이요 신앙이 좋은 왕입니다.
오늘 인류의 왕이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백 마리의 군마의 행렬이 아니라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스스로 낮아지셨던 주님이십니다.
●3절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여러분! 주께서 보잘 것 없는 나귀새끼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며 겸손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말을 잘 못한다고 사양한 모세를 굳이 들어 쓰셨고, 이새의 아들 중에 인물 잘난 큰아들 엘리압을 쓰지 아니하시고 8번째 말째인 다윗을 들어 쓰시면서 사무엘에게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을 주님은 들어 쓰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나오셨습니까? 주님이 은혜로 세우시면 한 세대 크게 들어 쓰실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가난한 사람이 나오셨습니까? 천국이 당신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인생을 비관하는 분이 있습니까? 성령의 불만 밭기만 하면 세상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능하다고 자책하지 마시고 가진 것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인생살이에 조금 뒤졌다고 열등의식이나 실패의식을 가지지 마시고 예루살렘의 나귀새끼처럼 당신의 등위에 예수님을 태우시고 호산나를 외치며 앞을 향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등에 세상의 것들인 근심이나 걱정, 가난이나 질병, 실패나 좌절을 싣고 고통을 당하며 나가지 말고 예수님을 태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태우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가난 질병이 자취를 감춥니다. 이유는 그분은 기쁨이요 화평이기 때문이고 부요와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시는 신령한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을 들어 쓰기를 원하십니다. 입을 들어 쓰시고자 하는 자는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 왕이 될 것이고, 손을 들어 쓰기를 원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충성자가 될 것이고, 내게 주신 물질을 들어 쓰기를 원하는 자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훌륭한 자도 들어 쓰시지만 보잘 것 없는 나귀새끼도 들어 쓰십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 헌신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헌신을 보면서 우리도 주님을 위한 바른 헌신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1. 나귀를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을에 내려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왜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의아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만으로 그냥 풀어 줄 것인가.
그런데 제자들이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나귀 주인은 아무 소리 않고 풀어 주었습니다. 2절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얽매어 있습니다. 가정에 얽매어 있고, 직장에, 사업에 얽매어 있고, 환경에 얽매어 있습니다. 쓰임 받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합니다. 죄의 끈을 풀고, 세상의 끈을 풀고, 이기주의의 끈을, 구습의 끈을, 고집의 끈을 풀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의 끈에 꼭 꼭 묶여서는 주님께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은 안 끊깁니다. 무엇으로 끊어야 합니까? 성령의 검으로 말씀의 검으로 끊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①이름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 사복음서에서 다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도 말했고, 마가도 말했고, 누가, 요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명의 충성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그만 일을 하고서도 이름을 나타내려고 안간힘을 다 쏟습니다. 그래서 조금 선심을 쓰고서도 과대 선전하고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서도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삭막하고 메마른 것 같아 보이지만 오늘날도 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숨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큰일을 했으면서도 나타내지 않고 남을 돕는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그래도 이 정도라도 지탱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봉사라고 하는 것은 공개가 되면 그 향기가 반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내지 않을 뿐이지 묻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얼핏보면 엉망진창인 것 같고,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고, 사기와 속임과 부정과 거짓이 난무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좀더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여 다 보면 이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충성자, 여기 나귀 임자가 바로 이름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②빛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쨌거나 영광스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는 이름과 명예와 빛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경력입니까?
천국의 새 예루살렘성의 기초석에는 이 12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까? 예수를 위해서 순교만 해도 영광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는 장로만 되어도 영광인데, 예수님의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영광입니다.
12사도 중에 바돌로매, 시몬, 다대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한 사람들입니까? 이름뿐인 제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천국의 예루살렘성 기초석에 기록되어 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기 이 나귀 주인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시골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올림픽을 상기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금메달을 따면 신문에 얼굴이 나오고, TV에 비쳐지고, 박수와 환호와 찬사가 쏟아지고, 금으로 만들어진 메달이 주어지고, 상금이 수여되며, 하루아침에 영웅이 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혼자서 금메달을 땄습니까? 그 사람이 금메달을 따기까지 그 뒤에서는 빛도 없이 충성스럽게 함께 훈련하면서 함께 땀을 흘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얼굴도, 상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이 숨어서 큰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숨어 있는 사회,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이 같은 나라가 부강한 나라입니다. 빛 없는 충성자, 여기 이 나귀 주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③보상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 농촌 마을에서 소 한 마리는 큰 재산입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은 소를 기르느라고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키운 소 한 마리를 선뜻 내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귀 주인도 분명히 나귀 한 마리가 큰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 나귀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그저 만족스럽게 바침으로써 기뻐했을 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정성껏 기른 나귀를 주께서 요긴하게 쓰신다니 그것으로 보람과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보람이고 뜻이고 기쁨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이 같은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같은 이가 그렇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무덤을 돌을 깍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부자인데 얼마나 좋은 자리에, 얼마나 좋게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 무덤을 주님께 바쳐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예비해 놓았던 것을 바침으로써 기뻐했고 만족했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자신이 대신 졌습니다. 사람들이 욕하고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또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도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철저하게 희생당한 사람입니다.
이 모두 다 보상 없는 충성자들입니다. 이것이 참 헌신이고 충성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보십시오. 오늘은 철저하게 보상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약간이라도 손해가 올 것 같으면 데모부터 합니다. 길거리에 눕습니다. 길을 가로막고 시위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불편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남의 손해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기의 이익에만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 경제야 망하거나 말거나 호화스러운 외제 물건을 들여와 사고 팔고 합니다. 나만 돈을 벌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시대에 보상을 바라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스러운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말 한 마디에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상 없는 충성자입니다.
④이 사람은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주께서 쓰시겠다"하니 아무 말 없이 나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이유가 많습니까? 바쁘고, 시간이 없고, 형편이 안 되고, 사람이 마음에 안 들고, 적성에 맞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용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주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무조건의 충성,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의 요구라면 조건과 핑계가 없는 무조건의 충성, 이것이 신앙인의 인생관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맡아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귀 주인은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⑤이 사람은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 기쁨과 보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 받을 때입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곳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헌신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질 때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귀의 주인은 자신이 귀하게 기른 나귀 한 마리를 주께 드림으로써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마침내 슥8장에서, 사62장의 그 예언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2. 겉옷을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만들어 예수님이 편히 앉으실 수 있도록 한 사람도 있고 겉옷을 길에 편 사람도 있습니다.
①겉옷을 길에 편 것은 존경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외국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우리 나라에 올 때에는 공항에 붉은 카핏을 깔아서 영접을 합니다. 바로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자가 말 타고 올 때에 허리 굽혀서 절하는 것은 진정한 존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겉옷을 펴는 것은 진정한 존경입니다. 억지로 동원된 무리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 권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겉옷을 벗어서 주님을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②겉옷을 길에 편 것은 정중한 예의를 표한 것입니다.
만 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이와 같은 예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께 온갖 예의를 다하여야 합니다.
겉옷은 계급장과 같습니다. 자신의 체면의 옷입니다. 나의 옛 사람의 옷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사장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 전무노릇 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못 태웁니다. 교회에 와서는 다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정중한 예의를 갖춰 주님을 태우려면 계급장을 떼야합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옛날 이승만 대통령은 정동 감리교회에 나왔을 때 목사님이 "이 앞에 와서 앉으시지요"라고 했을 때, 거절하면서 "저는 여기 대통령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왔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 없이는 안됩니다.
③겉옷을 길에 편 것은 최상의 것을 드리는 표현도 됩니다.
우리 주님께는 항상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도 최상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한 예의로서 최상의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라고 하면 20세기의 양심이요,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슈바이처는 독일과 불란서 국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 때는 독일 국민이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불란서 국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이미 파이프 오르간에 대해서는 당대에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나중에 의학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왜 그 분이 의사가 되려고 했느냐 하면 아프리카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불쌍한 원주민들을 돌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그 당시 어느 분야에서도 뛰어났기 때문에 얼마든지 행복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밀림을 찾아가서 조용한 강가에 병원을 짓고 죽을 때까지 그들을 돌보며 살았던 성자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신당동에 가면 신일교회가 있는데 오래 전에 이 교회에 '이일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 역시 목사이면서 의사였는데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받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 교회에 사표를 내고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서 1년 동안 열심히 보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울릉도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울릉도에 교회하나 제대로 변변한 곳이 없었고 병원도 쓸만한 것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에다가 병원을 세우고 또 교회를 세우고 슈바이처 박사처럼 죽을 때까지 울릉도의 주민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일선 목사님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을 받아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이런 헌신의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도 태양은 밝게 떠오르는 줄 믿습니다.
3.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를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종려나무는 잘 시들거나 마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왕이 행차를 할 때에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시92:12절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늘 푸른 믿음, 살아있는 믿음, 능력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118:25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형통케 하옵소서" 라는 뜻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쳐야 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 환란에서, 이 고통에서, 이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예수를 향하여 무리들은 예수를 '구원의 주'라고 찬송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만 왕의 왕으로 지금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우리 모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입술에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3년 4월 13일 고난주간 대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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