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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1:1)

by 【고동엽】 2022. 2. 2.

《제1강》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1:1)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칠 무렵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로마에는 한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로마를 그토록 가보기를 원하였던 것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복음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고 싶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특이할만한 사실은 이 편지가 로마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에 대한 능력을 깨우치고 그 능력을 그들과 함께 체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로마서는 16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구원의 도리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위대한 책입니다

'슈페너'라는 성경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에 해당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는 우리의 심령을 윤택하게 해 주는 영의 양식으로 충분한 책입니다. 기독교의 교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구원에 문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로마서는 장수로는 16장, 절수로는 433절로 그리 분량이 많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를 읽고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고, '크롬웰'이 청교도 혁명을 할 수 있었고, '조오지 워싱턴'이 로마서 말씀 위에 미국을 건설 할 수 있었습니다. 장로교의 대부 존 칼빈 역시 로마서가 탄생시킨 인물입니다.
로마서의 전체의 총 주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구약의 합2:4절에 있는데 이 말씀을 해석하기 위하여 쓴 책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 속에 '의인이 되는 길, 곧 어떻게 하면 의인이 되느냐?' 의인이 되는 길을 가장 강조하여 기록한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어떻게 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느냐? 어떻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인정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 바로 로마서의 강조점입니다.
갈라디아서 중심도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즉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입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믿음으로 살다가 딴 길로 가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렇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며 이렇게 하라고 쓴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냐?' 믿음의 문제를 중심으로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장: '의인이 되는 길' 즉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라는 내용입니다. 즉 신앙적인 면입니다.
12-16장은 이제 '생명을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즉 성도가 이 땅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들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즉 신앙 윤리적인 면입니다. 그러므로 앞부분 없이는 뒷부분이 소용없습니다. 1-11장 없이는 12-16장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바로 믿으면 그 속에 생명과 축복이 있고, 잘못 믿으면 저주와 멸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인사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서론이면서 전체의 내용을 간단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1절 한 절 속에서 기록자인 사도 바울의 신앙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다른 하나는 사도입니다.
바울은 서슴지 않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자기는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으며, 무엇을 하다가 갈 사람인지를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야할 사람입니까? 자신의 존재,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바울도 다메석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의 주인은 아직도 나 자신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충격적인 표현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말인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 종이란 헬라어로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은 노예가 없으니 노예가 얼마나 천한 신분인가를 우리는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로마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6천만 이상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노예는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생산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 이런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고 합니다.
"노예하고 당나귀는 똑 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 당시 노예는 세 가지 유형으로 생겨났습니다. ①전쟁에서 포로가 될 때와 ②부채를 갚지 못할 때와 ③나면서부터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다만 주인이 불쌍히 여겨 해방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값을 주고 다시 해방시켜 주는 방법 외에는 노예에서 풀려날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사울'큰 자, 위대한 자'란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새사람이 된 사울은 그의 이름을 바울'작은 자'로 바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무슨 뜻입니까?
①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그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당시 종의 특징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인을 위하여 살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인의 뜻대로 사는 자이며, 자신의 소유권이 없으며 모든 소유는 주인의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이런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6절에서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고, 14:8절에서는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할/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직접 전선을 시찰했는데 농부 한 사람이 밭에서 태연하게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피난을 했는데 그대는 왜 가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농부는 "아니 내 나라, 내 농토에서 일하는데 무엇이 겁이 납니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나폴레옹은 탄식을 하며 "이 사람의 신분을 보장해 주라"고 지시합니다.
그러자 부하 한 사람이 벌겋게 달군 쇠로 그 팔목에 N자를 새겨주었습니다. 농부가 "이것이 무슨 표냐?"고 묻었습니다. 이것은 "네가 나폴레옹 페하의 소속이 되었다는 표식"이라고 하자, 그는 옆에 있는 도끼를 가지고 자신의 손목을 사정없이 내리치면서 큰 소리로 "나는 침략자 나폴레옹의 소속이 아니다. 러시아 황제의 소속이다"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런 소속감이 중요합니다. /믿/ 우리는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는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눅9:23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⑴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나는 주인이 아닙니다. 송두리째 주인의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재산도, 자식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어집니까?/
⑵그 다음 제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야 합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있는 것은 전부 네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입니다. 십자가는 죽임입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가지고 갑니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⑶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한 마디로 주인의식, 생존권, 소유권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것, 주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믿어집니까?/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전6: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롬14:7-8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얼마나 철저한 종의 선서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한 사람도 우리 가운데 들어 있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억지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던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출21:2-6절을 보면 자원하는 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을 주고 종을 사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이 오면 반드시 돌려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법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는 종이 있습니다. 주인이 "내 집에서 이만큼 일했으니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돌아가라"고 풀어주었으나, "주인님이 좋아서 영원히 주인님을 모시고 여기서 살겠습니다. 돌아가 봐야 보금자리도 없습니다" 간청했을 때 그 말이 진정인가를 물어보고 종을 데리고 성문으로 갑니다.
그 당시 성은 재판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서 지방의 대표자들인 장로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주인이 설명을 합니다. "이 종이 연수가 다 되어 돌아가라고 하는데도 가지 않으려고 하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장로들은 은밀히 그 종을 불러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주인의 협박으로 그리하는 건지 물어봅니다. 그러면 종이 자신의 심정을 자유로이 말합니다. "예! 우리 주인이 풀어주셨지만 돌아가 봐야 몸 둘 곳도 없지만 주인을 모시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종을 주인집으로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다 귀를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으면 곧 '구멍 뚫린 종, 자원하는 종'이 됩니다.
억지로 코가 낀 종이 아니라 주인이 너무 좋아서 "당신 뜻대로 살겠습니다" 자원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종이며, 우리도 이런 자원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무슨 뜻입니까?
②예수님만이 최고요 나는 최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믿기 전에는 문벌과 지혜와 명예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주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것이요 자신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빌3:8-9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③주의 사랑에 이끌려 뒤따르면서 섬기는 자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종을 학대하고 구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분이시기에 종을 불쌍히 여겨 돌봐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14절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강하게 사랑으로 이끄신다고 하면서 감격하며 섬겼습니다.

④나는 예수께만 복종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종의 특징은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온갖 것을 다 갖추었어도 복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주인이 말하는데 이말, 저 말 대꾸하면 호도 구니(볼기)만 맞습니다.
바울이 종이라고 한 것은 예수께서 만약 죽으라고 하신다면 죽기까지 복종하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로 말미암아 자신이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큰 자)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후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내 이름이 너무 교만하여 안 되겠다.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큰 자란 말인가?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나는 작은 사람이다" 깨닫고 이름을 작은 자란 의미의 바울로 바꾸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여러분! 은혜는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고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깨달았으면 바로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을 바로 알게 되어 "나는 내 것이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사울에서 바울로, 큰 자에서 작은 자로 낮아집니다. '작은 자' 내 것이 아님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부드러운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서 자신이 최고라도 자부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습니다.

⑤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으니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의 작사자인 '벤야민 슈몰크' 목사 부부는 심방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두 아들이 불에 타죽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혈압으로 넘어져 중풍이 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는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은 가사를 썼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온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는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망한 자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으며, 몸도 장차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아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이 찬송 시는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성도들이 부르면서 어려운 중에 위로와 용기와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종은 신구약 성경에 영광스러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출33:11절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가리켜 수종자"라고 했고, 민12:8절 "여호와께서 모세를 가리켜 종"이라고 하셨고, 삼상3:9절에서 사무엘이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또 시인은 시116:16절에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고난과 사망에서 건지신 주를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이사야, 다니엘, 다윗은 모두 왕, 제사장, 선지자였으나 다같이 '주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종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⑴종은 자신의 소유가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육신, 건강, 재산, 명예, 지위, 자녀 등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다 주의 것입니다.
⑵종은 자유와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범사를 주인의 뜻에 따라서 행하는 자입니다. 마8:9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⑶종은 충성하다 죽는 것입니다.
고전4:2절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내가 무슨 직책을 받았느냐? 내가 할 일을 얼마나 받았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받은 것으로 얼마나 충성하느냐가 문제입니다.
④종의 모든 생활은 주인이 책임져 주십니다.
예전 양반 집 머슴들에게 주인은 때마다 더운밥을 꼭 해 먹이고, 명절 땐 새 옷 사 입히고, 또 쇠경(년봉)을 줍니다. 주인은 종이 행한 대로 진실하게 보상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25:14-30절은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충성했더니 남긴 대로 자신들이 도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잔치에 참여 받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른 종은 한 달란트 마저 빼앗기고, 밖으로 쫓겨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갈1: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종,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종, 우리 모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오래 전 사건입니다. 서울 동대문구 출신의 김기섭씨는 산 사람으로 세계의 지붕이라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200m 남겨두고 눈사태를 만나 냉동 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생전에 고백을 들어보면 "산이 좋아, 산에서 살다가 산에서 죽으리라"고 외쳤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바꾸어 "예수님이 좋아, 예수님을 위하여 살다가 예수 위해 죽으리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믿으십니까?/
▶한국 초대 교회사를 보면, 전북 남원에 어느 교인은 한 집안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조상들의 무덤을 지키며 제사하는 산지기 일을 하면서, 논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어 신앙이 좋아지자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부가 의논을 하고 문중의 어른을 찾아가 "예수님을 믿고 보니 제사행위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논과 집을 내어놓겠습니다" 어른은 노발대발,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길로 산에 올라가 움막을 치고 살아가면서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을 하면서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5년 후 집과 논 8마지기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보라! 사람의 종이 되었을 때는 자유도 없고 재물도 없었지만, 주님의 종이 되니 자유도 얻고 재물도 얻었다"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초대교회 신앙인의 모습을 교회사에 소개했습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는 파견된 사람이나 보내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한 나라를 대표해서 다른 나라에 보내진 대표자요, 대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사도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보낸 자에게 소속되어있습니다. ▶그는 위임받고 보내집니다. ▶그는 자신을 파견한 자의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했습니다.
사도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파견을 받은 전권대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 당시 12제자를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바울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결단이요, 자신의 헌신이요,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부르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적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르심, 소명이라는 것은 신앙생활에 능력을 부어주며, 생기에 넘치고,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할 때 바로 그것은 능력입니다.
여기 사도란 '부르심을 받은 자'란 뜻으로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소명'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 소명의식, 즉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1:1절에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된 것도 아니며, 사람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받아' 여기서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없었음을 전재로 한 말입니다. 자신이 사도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자신이 목사가 되고 싶어서 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직업순위 상위로 랭크되어 있습니다. 직업으로 택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려고 체포 하로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사도직에 대하여 임종만 목사님은 다섯 가지의 자격을 강조했습니다.
①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자(눅6:13/갈1:1).
②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의 목격자여야 한다(행1:1-3/고전9:1).
③말로나 글로써 가르치는 일에 성령의 감동을 친히 받아야 하고(행15:28/고전2:13),
④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고후12:12),
⑤하는 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어야 한다(갈2:8)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은 마18:18절에서 사도들에게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나는 종이다', 동시에 '나는 사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부르심의 역사요, 선택의 역사요,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주도적인 역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씀과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씀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를 불러 주셨고, 택정해 주셨는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하나님의 복음이란 하나님에게서 온 복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머리로 만든 철학적인 설화도 아니고, 실험을 거듭해서 만들어낸 과학적인 발명품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써 온 복음이란 말입니다. /믿/
▶복음이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란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식은 오늘은 기쁘다가 내일은 슬픔과 탄식으로 바뀌는 소식을 종종 듣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는 하나님의 진노나 형벌을 세상에 전하러 온 자가 아니요, 기쁜 소식, 즉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에서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은혜와 평안을 수북히 담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란 뜻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지는 절대 소망이어야 합니다. 교육적으로 때리고 훈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게 했다가는 싸매 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저는 꼭 그런 설교자가 되겠습니다.

▶중국 고사에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서 야생마를 잡아 왔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횡재했다고 했으나, 그 사람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 때문에 그 집이 망했다고 합니다. 그 아들 다리는 치료했으나 절었습니다.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들은 다리 때문에 군대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말 때문에 아들이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군대 잡혀간 그 동네 아들들은 모두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판단은 상황 속에서, 환경 속에서 그때마다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기쁜 소식이고,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에게도 기쁜 소식이요, 쫄 닥 망한 사람에게도 복된 소식입니다. /믿어집니까?/
"하나님 안에서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할/
바울은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택정함을 입었다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택정'이란 말은 '갈라놓다,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갈1:15절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세상 사람들과 천국 인으로 갈라놓고,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죄인 속에서 의인으로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영벌 받아야 할 자리에서 영생을 얻은 자로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으로 구별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선 대통령이 자신을 부르기만 해도 영광이라고 난리 법석을 떠는데, 하물며 창조주 되시며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권사로, 집사로, 성도로 택해 주셨습니다. /할/ 얼마나 감사합니까? 소명감에 불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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