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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옷자락을 잡아라! (막 5:25-34)

by 【고동엽】 2022. 2. 5.

예수의 옷자락을 잡아라! (막 5:25-34)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시킨 바사왕 고레스 왕은 인품이 훌륭한 덕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적들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고 유화정책을 펼쳐서 늘 적들을 포용했던 인물이랍니다. 고레스 왕이 한 번은 어떤 이웃나라를 정복했는데, 그 나라의 왕과 왕비와 그들의 자녀들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그들을 심문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들을 죽이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국의 왕을 향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만일 그대를 살려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적국의 왕은 "저를 살려주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또 물기를 "그러면 내가 그대의 자녀들을 다 풀어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적국의 왕은 "그렇게만 해주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마지막으로 "만일 내가 그대의 왕비를 살려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적국의 왕은 급히 말하기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 목숨을 기꺼이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고레스 왕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바치겠다는 적국의 왕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고 신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여봐라! 이 사람들을 다 풀어주어라. 죽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들이다." /할/
그렇게 해서 왕의 일가들이 모두 풀려나게 되었는데 오면서 왕이 왕비에게 "과연 듣던 대로 바사왕 고레스는 훌륭한 덕장임에 틀림이 없소! 그는 분명히 전 세계를 제패할 것입니다. 내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인물도 그렇게 출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그러자 뜻밖에도 왕비는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전연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바치겠다고 하는 한 믿음직한 남자의 얼굴을 황홀하게 쳐다보느라고 그 외에 다른 곳에는 전연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예배드릴 때 우리들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두어야 하고,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려고 높고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낮고 낮은 이곳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어간에 우리 모두 예수의 옷 가에 손을 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소개!▶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치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낫게 하신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치료받은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가셔서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다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황급한 소식이 왔습니다. 그것은 회당 장 야이로의 12살 된 외동딸이 다 죽게 되었다는 급보입니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서 살게 해 달라고 하는 급한 청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죽음 앞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큰 무리들로 인해 에워 쌓인 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또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옷자락만 만져도 낮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12년 동안 고통 받았던 그 혈루 근원이 깨끗이 마르고 치료받았다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묘하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낫게 하신 사건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종 뜻하지 않는 중에 놀라운 발견을 하고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자기의 아버지 나귀새끼를 찾으러 다니다가 뜻밖에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를 만나 "네가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또 '콜롬부스'가 인도를 찾다가 뜻밖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본문의 이 여인도 이런 감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회 당장 야이로의 청을 받아 그 집에 가는 도중에 뜻 밖에 초청을 받지도 않은 이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 뒤에서 그 옷을 만져서 12해나 앓고 있던 혈루증이 낳게 되고 구원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기적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여인을 한 번 깊이 연구해 보고 신앙의 깊은 통로를 찾자!

 

1. 이 여인의 문제가 무엇인가?

 

①12년간 혈루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25).
혈루 증은 어떤 병인가? 구약에서는 유출병이라고 불렀던 이 병은 고통스러운 병일뿐만 아니라 여인들에게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병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도 꺼리는 병입니다. 이 병은 쉽게 말하면 신체 내부에서 어떤 이상 때문에 하혈을 하는 그런 부인병입니다.
레15:15-30절에 보면 혈루 증에 걸린 사람에 대한 규례가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 병은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 있어 일단 이 병에 걸리면 ▶몇 가지 제재가 가해집니다.
⑴부정한 사람이라고 해서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 하나님께 나가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은 저주와 심판과 다를 바가 없는 형벌이었습니다.
⑵그녀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그를 만질 수도 없습니다.
⑶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⑷대부분 가정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남편에게 이혼을 당합니다.
⑸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피를 흘리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문둥병자의 같이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록도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한 병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는 작은 행복조차도 박탈당했습니다.

이 병이 얼마나 불행한 병이며 가혹한 형벌이 있는 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병으로 12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앞 사건의 회당장의 이름은 '야이로'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도 분명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중 속에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만 하는 부정한 존재요, 이름 없는 얼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떳떳하게 나타내고 병을 고쳐달라고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람과의 접촉을 율법이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공개적으로 접촉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일 수 있습니다.

②이 여인은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좋다는 약, 용하다는 의사, 다 먹어보고 만나봤습니다. 그러니까 12년 동안 혈루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녀는 양의, 한의, 민간의약 할 것 없이 모든 의원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26절에 "많은 의원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들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습니다. 아프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말에 '무병이 장사'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 아픈 것이 상팔자입니다. 아프면 별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 고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고생을 많이 하게 되고, 어려움도 많이 당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12년 동안 좋다는 약과 좋다는 병원을 다 찾아다니며 치료했지만 재산만 날렸을 뿐 병은 오히려 깊어만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와 과학의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병과 의학은 공존하고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과 의학은 함께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하고 있는 의학도 고도로 발달하고 있는 질병을 뒤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본문의 주인공 혈루증 여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12년 동안의 투병도 그 병은 고치지 못하고 의학이나 재산도 그 여인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전능 자가 아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또 과학이나 의학은 인간의 학문에 불과할 뿐 전능적 기술이 아닙니다. 인간은 제한적 존재이며, 한계 내의 존재이며, 유한한 존재입니다.
③이 여인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여자입니다. 한마디로 절망뿐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낫겠지 하는 기대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는 신념도 무너졌습니다. 유명한 병원, 유능한 의사면 고칠 수 있다는 소망도 헛것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지칠 대로 지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다. 이 절대 절명의 여인에게 절대 소망의 소식이 왔습니다. 27절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누구의 소문이요? 예수님의 소문! 그렇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유대인 청년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에 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막1:21-28), ▶문둥병자를 고치시고(막1:40-45), ▶중풍병자를 고치시고(막2:1-12),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막3:1-6),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막 4:35-41)이라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절대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서는 아니 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 소문이 복음이요, 기쁜 생명의 소식입니다. /할/ 그런데 소문은 좋은 소문이 있는가 하면 나쁜 소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소문만 듣고 좋은 소문을 내는데, 어떤 사람은 나쁜 소문만 듣고 나쁜 소문만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소문만 듣고 긍정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성경에 예수의 소문 듣고 기적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막7:25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막10:46절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청했더니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소문 듣고 예수만 제대로 만나면 치료받고 해결 받습니다.

④이 여인은 문제 때문에 예수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불행이 없었더라면 예수 앞에게 나오지 않을 여인이고, 예수님께 관심도 두지 않을 여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안고 불행을 안고 살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실패도 은혜요 질병도 은혜요 죽음도 은혜입니다. 블행 때문에 예수를 만나게 되었기에 불행은 다행으로 바뀌게 됩니다. 모든 문제는 주안에서 행복의 열쇠입니다. 문제 속에 답이 있습니다. 문제 속에 행복의 씨가 있습니다. 문제 속에 생명의 씨가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상처투성이의 인간들입니다. 고통 속에 살던 사람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고통은, 문제는 주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믿/

 

2.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을 자세히 보아야합니다.

 

먼저 믿음은 들어야 생깁니다. /아멘!/ 우리는 여기서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만일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12년 동안 앓던 혈루증으로 피를 다 쏟고 쓰러졌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장 절망적이고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4단계의 믿음의 순서를 볼 수 있습니다.

①믿음은 들음에서 생깁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구원 소식, 복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문둥이도, 귀머거리도, 장님도 다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이런 좋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은 퍼트리는 사람이 있어야 퍼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문을 퍼트려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좋은 소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소문을 나쁘게 들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바리세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잘못된 소문을 듣고 이단시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분도 좋은 소문이 나기도 하지만 나쁜 면으로 소문이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좋은 분을 통하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서 이야기를 듣고 이 여인은 수지가 맞은 것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같이 시험에 들었을 텐데 신앙이 좋은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 든 사람, 은혜가 떨어진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시험에 들고, 은혜가 떨어지고, 믿음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믿음이 쏟고 은혜가 넘칩니다. 한마디로 수지맞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께로 나가면 틀림없이 고침을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께로 나간 것입니다. /할/ 우리도 좋은 소식만 전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 노회에 참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이 계시는데 바로 남을 비판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노회장이 어떻고, 서기가 어떻고, 어떤 목사는 어떻고, 그런데 자신의 행동은 별로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뭐 저런 목사가 있어?" 비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부족한 존재로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해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성도가 되시고, 절대로 남을 욕하지 말고 비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은 좋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바로 구원의 소문입니다. 그 당시 절대 절명의 병, 혈루 병도 치료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절망의 병을 치료해주십니다. /아멘!/
▶이 여인은 생명의 소식, 소망의 소식, 구원의 소식을 듣고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신앙의 첫 단계는 잘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⑴잘 들어야 지혜가 생깁니다. 잠23:19절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⑵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잠1:23절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⑶듣고 악한 길에서 떠나라! 렘26:3절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⑷들어야 찔림이 옵니다. 행2:3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⑸듣고 행하라! 빌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⑹잘 들어야 복을 받습니다.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할/

②이 여인은 들은 믿음에서 예수께로 나아오는 믿음으로 발전했습니다.
27절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누구 뒤에서입니까? 예수님의 뒤에서입니다. 한마디로 이 여인은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 앞에 나오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여인은 무리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 가까이 가려고 다가갔습니다. 무리 속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갔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비켜 주세요. 길 좀 내주세요. 나 좀 가게" 하면서 다가갑니다. 여인의 대단한 결심이요,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 앞은 어디입니까? 바로 이 자리 교회인줄 믿습니다. 이 전은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믿/ 이 자리에 우리 주님이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주님을 만나려고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힘들수록, 아플수록, 어려울수록, 냄새나고 더러울수록, 주변 사람들이 만류할수록 오히려 더 주님 곁에 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비참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예수님을 가깝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곁에 다가갔습니다. 정면으로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 뒤로 갔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으로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 곁에 가까이 오겠다고 하는, 주님 곁에 다가서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 앞에 가지 않고 뒤로 갔다는 것은 그 여인의 겸손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부정한 여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겸손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를 알고, 자신의 부정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 여인은 겸손의 덕을 가진 자입니다. 마치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개라도 되겠다고 자신을 낮추던 가나안 여인과도 같습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미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과 덕스러움이 돋보일 때, 아름다움은 더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벧전5:5절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잠22: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골3: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하십니다.

③이 여인은 결단하는 신앙, 행하는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27절 "그의 옷에 손을 대니" 그냥 한번 예수님이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 어떤 천으로 만든 옷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 그냥 만져 본 것이 아닙니다.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 손만 대도 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병든 사람이다. 냄새나는 사람이라 예수 앞에 있을 수는 없지만 예수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내 몸이 깨끗해 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려한 옷 붙들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있는 옷을 붙들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은 권력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옷은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자색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을 붙들기만 하면 거기엔 충만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옷을 믿음으로 붙들기만 하면 구원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치료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붙들면 하늘 문이 열려지는 놀라운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손을 대니'라고 했고, 영어 성경(NIV)에는 'touched'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합토'라는 단어를 씁니다. '합토'라는 말은 '그냥 손을 대었다'라는 뜻이 아니고, '어떤 생각이 있어서, 의식이 있어서, 목적하는 것이 있어서 잡았다'는 뜻입니다.
지나치는 사람이 남의 옷에 슬쩍 스치는 그런 반응이 아닙니다. 그냥 한번 지나가는 손짓으로 만져본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내가 이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런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여인은 소경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면서 소리 지를 용기도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 가서 매달리며 애걸하고 예수님께 날 고쳐달라고 졸라댈 수 있는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자락에 믿음을 가지고 손을 대었습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그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손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여기 '대니'는 '당기다'는 뜻으로 원어에는 '불을 당기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대해 불타있었고, 설레 임에 불타 있었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여러분 주의 뜻대로 살기를 결단합시다. 시인은 "여호와를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 주시느니라" /할/

⑴어떻게 보면 이 여인의 신앙은 단순한 신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에돔 땅을 향해 행진하던 중, 길로 인해 고생하게 될 때, 그들을 인도해 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물게 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위하여 신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놋 뱀을 장대 위에 메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장대 끝의 놋 뱀을 쳐다보면 낫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누가 보았는가? 단순한 사람들이 쳐다봤습니다. 그래서 치료받았습니다.
그러나 좀 배웠다고 우쭐대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방귀를 뀌며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모세를 따랐던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은 너무 단순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들은 이론이 있어야지 믿기만 하면 영생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고 따집니다. 또 도덕적으로 선을 행해야지 믿기만 해서 뭐가 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신앙은 따지고 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믿기 만하면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단순합니까? 그래서 성경은 "어린아이와 같이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한다"고 마18: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⑵이 여인은 단순한 신앙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도 있었습니다.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 여인이 주님의 옷에 손을 덴 이유는 한마디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을 것이라는 신앙은 절대 신앙입니다. 마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신앙도 절대 신앙이었습니다. 자신의 하인이 중풍 병으로 드러눕자 예수님께 청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흔케히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자 "주님이 내 집에 오시는 것을 저는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다만 말씀만 하셔도 제 하인이 낫게 될 줄 믿습니다."
▶절대 신앙은 절대 결과를 따릅니다. 적극적인 신앙이 적극적인 응답을 받습니다. 확실한 신앙이 확실한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럭저럭 만으로 축복도 그럭저럭 옵니다. 또 들락날락 기도하면 응답도 들락날락 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자기가 들은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 여인은 그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진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뛰어들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지금 군중 속에 있는 여인이 아니라 사실상 예수님의 능력 속으로 뛰어 들어간 여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의 손이라도 잡아야 하고, 누구의 옷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사랑의 손을 잡고, 출세를 위하여 권력의 손을 잡고, 우리의 생활을 위하여 기업가의 손을 잡기도 합니다.
또 사랑하는 친구의 손을 잡는 우정의 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손을 잡아서 잘되면 좋지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불행하게 되고, 잘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잘못되고, 영광을 위하여 잡았지만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도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모세의 손보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던 고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은 모두 땅속에 삼키 움을 당했고,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 가운데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10명의 정탐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양에서 죽었습니다.
손을 잘 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혈루증의 여인은 손을 잘 잡아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할/

⑶본문을 봅시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뒤에서 손을 덴 것을 아시고 그 여인의 마음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시험해 보려고 30절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제자들이 "사람이 많아서 밀치느라고 손이 닿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군중 속에 있는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 속으로 뛰어 들어간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할/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되심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나와 예수님을 찾고 붙드는 손길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지금 예수님이 찾는 사람은 둘러싸서 미는 사람들 가운데 어쩌다가 손이 닿은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날 넘치는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을 만진 사람이, 주님과 몸을 부딪친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주님에게 손을 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신앙의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전능자의 능력을 바라고 나에게 손을 내민 믿음의 사람이 누구냐고 찾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임의 눈으로 바라보고 손으로 만진 자가 누구냐고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렇게 믿음의 손을 그에게 대는 것입니다.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서로 부대끼다가 가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신앙의 눈으로 주님을 앙모하고, 신앙의 손을 그분의 옷자락에 대는 것이 예배요, 그런 사건이 예배 시간에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예배 시간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손을 댄 자에게 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이제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다고 하면 더 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혼자서 잔뜩 자기 고민의 보따리를 이고 절망과 고독과 상심의 세월을 살아 갈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신 그분이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길을 아시는 하나님, 여러분을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나와서 지금 예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과 함께 걷고 계시는 그분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시는 그분을 앙모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믿음의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시간에 주님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④즉시 고침 받고 체험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리라" 자신의 병이 낫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눅8장에서도 본문이 소개됩니다. 눅8:44절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참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손을 댄 순간 12년이나 계속되던 피가 즉시 그쳤고, 본인이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곧 완전치료를 의미하는 것이며, 또 근본적인 치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
여러분!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의 능력의 무한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예수님의 옷가지에 손을 댑시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이 여인 같은 믿음으로 손을 대면 오늘도 역사는 일어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옷 가에 손을 댑시다. 어떤 문제일지라도 주님께 갖고 나와 손을 내밀어 그 옷자락을 만지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나라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군대 18만 5천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셔서 18만5천의 적들을 초토화시켰습니다. /할/ ▶주님을 붙잡으세요.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세요. 지금도 주님은 역사를 이루십니다. /아멘!/

 

3. 이 여인이 받은 축복을 보겠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사람이 많아서 밀치느라고 손이 닿은 것입니다." "아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제가 손을 대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33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 여인이 왜 떨었는가?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떨었고, 전지전능하심에 떨었고, 신적 통찰력 때문에 떨었고, 감사와 감격 때문에 떨었습니다.
떨면서 엎드려있는 여인에게 주님이 음성이 들려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할/ 여기 '평안히 가라'는 말은 '평안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네가 지금까지는 평안 밖에서 맴돌았고, 남의 평안을 보기만 했고, 네게는 평안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할 때 우리는 그저 예수 믿는다 하지만, 반드시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밖에서 방황하지 말고 예수를 안으로 믿어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뜻도 평안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평안 밖에서 맴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육신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생활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그렇다고 마음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예수 만나기 전에 심령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평안이 예비된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할/
▶이 여인은 두 가지 구원을 얻었습니다.
①육신이 건강해졌습니다. 12년 맺힌 한을 풀고 그 육체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②영혼의 구원: 심령의 평안과 영혼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 평안이 축복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유세비우스'는 이 여인은 고향에 내려가서 병 고침 받은 사실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워놓고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내 병 고쳐주었다고 간증하다가 죽었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처럼 절박하지 않습니까?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며 절망하고 좌절했던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 말씀하시던 살아 계신 나의 주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초청하고 계십니다.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들에 대한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 지쳤습니다. 삶의 현실에 지쳤습니다. 인간의 도움에도 지쳤습니다. 믿었던 친구, 믿었던 직장, 믿었던 사람, 그런 것에 실망했고 지쳤습니다.
이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해결의 방법입니다. 순간순간 삶의 현장에서 주님 곁에, 주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삶이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선언해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우리의 질병뿐 아니라 우리의 어떤 문제라도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옷자락에 매달립시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개인도 나라도, 단체도 복을 주십니다. 대한민국이 복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축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이 저렇게 복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축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옷 가에 손을 댑시다. /할/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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