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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사 12:1-6)

by 【고동엽】 2022. 2. 5.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사 12:1-6)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 어떤 일에 나의 모든 것을 집중시킨다는 뜻입니다. 바라보는 곳에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집중시킴으로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누구를 바라보고 살기 마련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 어떤 환경을 바라보고, 어떤 조건을 바라보고 삽니다. 어떤 배경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런데 세상의 믿고 바라봤던 믿음의 대상들이 실망을 주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기도 하고 손해를 입히게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주님만 바라봤던 사람들은 다 성공을 했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대하20장을 보면 유다 제5대 왕 여호사밧이 국가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모압, 압몬, 몇 마온 사람들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유대나라를 침략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호사밧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위기를 신앙으로 풀어나갔습니다.
4절에 보면, 온 유다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대하20:12절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14: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할/
여호사밧은 우리의 운명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절망과 죽음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위기를 맞이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위기를 맞아 곤경에 처해도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사밧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를 치러 오는 이 연합군의 큰 무리를 우리가 대작할 능력이 없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아멘!/
▶저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14절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야하시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응답은 15-17절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응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⑴두려워 말라(15). 두려움은 불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환경과 형편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 군대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하나님만을 신뢰했던 다윗에게는 결코 두려움의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인생사에 닥치는 어떤 '큰 무리'가 우리에게 닥친다 할지라도 두려움을 떨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⑵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15).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다윗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고 했습니다. 전쟁도, 구원도, 나라의 흥망성쇠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⑶하나님의 구원을 보라!(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⑷하나님이 함께 하리라!(17).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입니까? 얼마나 큰 하나님의 구원입니까?
이렇게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들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레위 사람들은 심히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18-19절).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저들은 이렇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사밧은 신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지 아니하고 찬양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저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 세워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전쟁도 하지 않고 여호와를 찬송하기만 했는데 적군들은 자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소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찬송이 시작될 때에 이런 귀한 신앙을 보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22절에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온 암몬, 모압,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병을 두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흩으러 트려 서로 불신하게 하시고 결국은 저희끼리 싸움을 벌여 살육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환경이 너무나 어려웠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몰아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향하여 몇 번이나 다짐을 합니다. <낙심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자>
시42: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없어졌습니다. 지난날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울며 부르짖고 눈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부유해 지고 평안해지니 간절함이 사라져갑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못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은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이 큰 환난 중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앉아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자기 영혼을 향해 꾸짖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느냐, 세상을 바라보니 사람을 바라보니 낙망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세상을 바라볼 때, 현실을 바라볼 때, 사람을 바라볼 때 낙망할 수밖에 없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낙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요, 바라지 못할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랐고 사람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을 사는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히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너무 바라보지 마십시오. 나 자신은 약하고 죄가 많고 유혹과 시험에 들기 쉬운 존재입니다. 사람이 강한 것 같고 대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환경 바라보지 마십시오, 환경도 조건도 자주 변합니다. 또 사람들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람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처럼, 다윗처럼, 바울처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제목소개!▶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 당시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을 억압당하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풀려나게 될 때 드리는 감사와 찬양 시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날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어떤 날인가?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잊지 못할 그 날들이 있습니다. 출생한 그 날!, 결혼한 그 날!, 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날!, 성공한 그 날!, 참패했던 그 날!, 그래서 국가적으로도 기념이 될 만한 그 날들은 국경일로 지정하여 그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쁜 날로 기억될 그 날이요, 다른 하나는 슬픈 날로 기억될 그 날입니다.
성경에는 대개 구원받은 날 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그 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날이 그 날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날이 그 날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날이 그 날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그 날(마24:36)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에게 기념될 만한 그 날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예수를 영접 한날이요(요1:12), 예수를 믿은 날이며(요3:16), 죄 사함 받은 날(벧전1:18)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 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셔서 고국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구원받은 감격에 그 날을 기념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그 날은 '여호와의 구원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2절에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라'는 말은 '바라보라, 앙모하라, 기대하라'는 말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리라, 나도 축복의 주인공이 되리라, 내가 기필코 이루리라, 나도 저 사람같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앙모하는 자에게 오늘도 새 힘을 주십니다. 사40:28-31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저는 오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오는 축복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아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1.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갑니다(1)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저는 지금도 TV 드라마의 장희빈 끝 장면을 잊지 못합니다. 왕이 장희빈에게 진노하여 사약을 내리는 장면입니다. 두 손과 두 발을 잡고 입에다 사약을 부어 넣는 장면입니다. 성난 숙종의 어명은 "여봐라! 사발을 더 퍼부어라" 왕의 진노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제는 그 노가 쉬었다"고 했습니다. 언제 하나님의 노가 멈췄습니까? "그 날에"입니다. 어떤 날입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은 그 날입니다. /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그 날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멈췄습니다.
여기 "그 노가 쉬었다"는 말은 속죄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3:10).
▶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허물: 몰라서 범한 죄입니다. 죄 인줄 모르고 했고, 선 인줄 몰라서 행하지 못했다면 이것이 허물입니다.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알고도 약해서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의지가, 결단이 약해서, 힘이 약해서 짓고 범하는 죄입니다.
㉢알고도 고의로 범하는 죄입니다. 계획적으로 저질은 죄는 엄중한 처벌을 받습니다.
▶모든 죄는 네 가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부끄러움을 가져옵니다. 야! 아무개가 그런 짓을 했데. 정말로!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범죄한 것을 남이 알게 될 때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망신살입니다.
㉡고생을 가져옵니다. 마음이 괴롭고, 몸이 괴로운 고생이 옵니다.
㉢죽음이 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마지막에는 지옥 불이 옵니다. 이 무서운 죄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은 그 날에 만 왕의 왕 되신 주님께서 "네 죄를 용서하여 주노라!" 무죄를 선언하여 주셨습니다. /할/

 

2.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1).

 

"또 나를 안위하시매" '안위'는 '안심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위기와 괴로움이 지난 후의 평온하고 안심이 되는 상태, 한마디로 안위라는 말은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문제없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 문제없다고 자신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문제를 안고 사는 인생입니다. 문제없는 곳은 딱 한군데 있습니다. 무덤입니다. 죽기 전에는 우리 모두 문제 속에 삽니다. 건강문제, 경제문제, 자식문제, 가정문제. 세상은 원수마귀가 들썩일 때마다 질병이 있고, 실패가 있고, 배신이 있고, 한숨이 있습니다. 우리는 삼성재벌의 막내딸이 미국에서 목매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부유한 자가 스스로 목매 죽다니 왠 일입니까? 그도 문제 속에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대통령의 아들로 한 몸에 부러움을 샀던 박지만씨도 상습 마약 복용자로 수갑을 찼던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신차리고 결혼해서 아들도 낳고 살지만, 그가 검사에게 고백하기를 "세상에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그랬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염려, 근심, 걱정, 우수사레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분의 조건에서 안위함을 받습니다. 즉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복음 송 가사도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부모에게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아니면 친한 친구에게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위로를 주었다던 그 남편이 어느 날 배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헌신해 주었던 자식이 나 몰라라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위로자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우리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그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십니다.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십니다.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십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자에게 온통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고백합니다. 간단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고백이 하나님을 흥분시킵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 이상 기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가 예배 행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교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⑴모든 예배시간에 힘써 참석하십시다. 대예배는 물론 오후 찬양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 새벽예배, 구역예배까지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⑵이왕 예배에 참석하실 때 시간을 철저히 엄수하기 바랍니다.
▶신앙이 좋은 아버지가 외국에 출장을 가면서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다음 주일은 제발 늦지 말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라"고 당부, 또 당부를 했습니다. 주일이 지난 월요일 아침 아들에게 국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교회에 나갔었니?" "네!" "대표기도는 어느 분이 하시더냐?" "조금 늦게 가서 모르겠는데요?" "설교는 누가 하시더냐?" "목사님이 하시던데요" "축도는 누가 하시더냐?" "조금 미리 나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설교는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깜박 조느라고 잘 못 들었는데요" 여러분! 이 아들 제대로 예배를 드린 자 입니까? 예배는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기차는 정시에 떠납니다. 비행기도 시간이 지나면 탈수가 없습니다. 헌데 예배는 늦어도 된다는 생각이라면 그 신앙이 언제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큰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고민하다가 예배가 시작할 때마다 게시판에 <오늘도 늦으셨습니다>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게시판을 보니 <늦더라도 와 준걸 고맙게 생각하시오>라고 써 있더랍니다.
시간은 약속입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또 봅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3. 구원의 축복입니다(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끝에도 "나의 구원이심이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의 구원'이라는 1인칭 표현입니다.
2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1인칭이 강조됩니다. "나의 구원,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등 1인칭으로 신앙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천 번을 물어도 만 번을 물어도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나의 힘, 나의 노래"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내 남편이라고 하지 우리 남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아내라고 하지 우리 아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남편이라고 하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1:1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할/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한때 이스라엘은 애굽을 구원자로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앗수르가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자 재빨리 태도를 바꿔 앗수르를 구원자로 생각한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에게 선지자들은 외치기를 "그들이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애굽으로 가지 말라.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구원자를 누구로 믿느냐에 따라 신앙의 형식과 삶이 달라집니다. 과학도 물질도 권력도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죄에서, 사망에서, 질병에서, 실패에서, 악의 손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믿/ 행4:12절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욥5:19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4.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2).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같이 무섭고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행여나 적탄에 맞아 죽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자는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행7장은 스데반의 순교의 장입니다. 예수님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은 거짓증인을 세우고 억울한 판결을 내려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들고, 치려고 할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을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죽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스데반이 눈을 들어 부활하신 주님께서 면류관을 손에 들고 하나님 우편에서 자신을 기다리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아멘!/
▶78세의 노 권사님이 음력 정원에 세상을 떠나시는데 이른 새벽에 큰며느리를 부릅니다. "빨리 물을 데워서 내 몸을 씻어라!" 앓아 누운 분이 몸을 씻으랍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물을 데웠습니다. 몸을 닦아 드렸더니 "너희는 여기 둘러앉아서 찬송을 불러라" 노 권사님은 자손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다윗은 시3: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할/ 이 신앙이 정말 귀합니다. 주님은 요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하셨고, 다윗은 시23: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의 처지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고 있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수1:9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사43:1-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할/
성림의 성도 여러분! 두려움은 불 신앙입니다. 강함으로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으로 이기느냐는 것입니다. 돈으로, 권력으로, 지식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약합니다. 우리의 무기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요일5:4-5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주님은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고, 바울은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엉청난 사람들입니다.

 

5.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2).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시18:1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사야도 다윗도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힘으로 삼고 삽니까?
㉠건강: 맞습니다. 몸이 건강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3일전부터 장염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정말 건강이 힘입니다.
㉡지식: 알아야 면장 질을 합니다.
㉢기술: 지식도 좋지만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한사람이 한 가지씩(1인1기)의 기술을 의무로 배우게 한답니다. 기술로 밥 벌어먹으면 그 기술은 대단히 큰 힘이 됩니다.
㉣돈: 돈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돈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내가 재물 얻을 권능을 너희에게 주리니"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합니다.
세상일은 돈이 있어야 자선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모든 일에 힘이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다스려야 합니다.
㉤권력 권세: 권력 권세의 힘은 무섭습니다. 권세를 잡으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립니다.
건강, 지식, 기술, 돈, 권세 사람들은 이런 것을 힘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변하고 무너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힘을 주시는 자는 세상도 이기고, 죄악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누구도 무엇도 겨룰 수 없고, 맞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어떤 자에게 나타납니까?
사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런 자입니다. 참 힘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앙망하라! 사모하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았더니 원수 마귀를 다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2대 성왕이 되어 통일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가져야 할 몇 가지 힘이 있습니다.
㉠영력: 막3:15절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라"
㉡지력: 호4: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실 것이요"
㉢체력: 잠4:22절 "그것은(지혜와 지식) 얻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라"
㉣재력: 전5:19절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잠11:16절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지도력: 단12:3절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런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고, 나는 그 힘을 의지하고 일하는 일꾼이며, 또 그 힘을 의지해서 싸우는 군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원수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힘 앞에는 오금도 못 피고, 한길로 왔으나 일곱 길로 혼비백산해서 물러갑니다. /믿/
우리 모두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의지하십시다. 하나님의 힘은 자신의 힘을 믿는 자에게는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을 믿고 의지하면 강한 힘이 되어주십니다. /할/

 

6.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2).

 

"나의 노래시며" 여기 노래는 찬송을 뜻합니다.
▶누가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몸에 병이 들면 신음소기라 나오기 쉬어도 노래 소리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면 한숨이 나오긴 쉬어도 찬송이 나오기는 힘이 듭니다.
노래가 나온다는 것은 영혼이 강건하다는 뜻이고,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승리자가 노래를 부릅니다.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개선가를 부릅니다.
▶찬송은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동반됩니다.
행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증거 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풍속을 전하였다고 그들을 붙잡아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많이 쳤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갇힌 감옥은 문이 열릴 때를 제외하고는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어두운 땅굴이었습니다. 그들의 발에는 착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 착고는 로마에서 사용되는 나무 고문기구로써 목과 양 손발을 집어넣는 전신용과 두 발만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발목용의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바울 일행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양발에만 착고가 채워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런 깊은 곳에 내던져지면서 발에 착고까지 채워졌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더군다나 심한 매를 맞았으니 심신의 고통으로 끙끙 앓아 누웠어야 할텐데, 그렇지만 그들은 그곳에서도 기도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
그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한밤의 찬미는 옥터를 흔들리게 했습니다. 그것은 역경중의 찬송입니다. 믿음의 찬송입니다. ▶한밤의 찬미는 철통같이 닫혀진 옥문이 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죄수를 지키던 간수 장이 오히려 자기를 살려 달라고 죄수 앞에 무릎 끊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들이 구원받는 축복이 임했으며, 빌립보 교회가 부흥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변화가 있습니다. 찬양은 능력을 동반합니다. 찬양은 곡조있는 기도입니다.

 

7. 마지막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만국에 선포하라'(4)

 

"그 날에 이름을...만국 중에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나오는 그 이름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은 예수를 만민에게 전파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요4장에는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퍼 마시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땅에서 나오는 우물물을 오랫동안 마셨지만, 항상 목마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영원한 말씀의 샘물을 마시고 너무 기뻤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사마리아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많은 동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전도가 뭡니까? 내가 받은 위로와 평안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맛본 구원의 생수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영혼 구원을 서둘러야 합니까?
⑴주의 재림이 가까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는 영혼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구원의 문이 다 닫힙니다. 전도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날이 갈수록 대형 지진이 많아지고 수 천, 수 만년 얼어붙었던 얼음산이 기후의 변화로 쾅쾅 녹아 내립니다. 이러다간 섬나라들이 물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인구의 팽창이나 과학의 발달이나 지하자원의 고갈 등이 종말이 가까웠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지나기 전에 추수해야 합니다.
⑵개인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건강해서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지만, 언제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불러 가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항상 믿음의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하고 전도의 대상자가 죽기 전에 서둘러 전도해야 합니다.
⑶기회를 놓치면 영영 구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기회가 있습니다. 전도의 기회도 다 때가 있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놓치면 그 영혼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시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으로 온전케 인도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걸을 때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풍랑을 바라보았더니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여호사밧처럼, 오직 주만 바라보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①진노를 거두어 가십니다. ②하나님의 위로를 누리게 됩니다. ③구원의 축복을 받습니다. ④두려움을 막아주십니다. ⑤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⑥생활 속에 항상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⑦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제 결심만 남았습니다.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사람을 바라볼 것입니까? 환경을 바라볼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실 것인가?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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