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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1-11)

by 【고동엽】 2022. 2. 3.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1-11)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가슴을 활짝 펴시고, 얼굴도 활짝 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얼굴이 구겨진 채 펴지지를 않습니다. 아내는 걱정이 되어서 원인을 곰곰이 분석을 해 보았더니 최근에 남편이 한약 한 첩을 잘못 달여 먹고서 얼굴이 구겨진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한약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기자'입니다. 남편은 구기자를 달여 먹고 그만 얼굴이 '구겨져 버린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구겨진 얼굴을 펴 줄 수 있는 묘약이 무엇인가를 찾다가 '그래 그것이 직효야!' 하며 무릎을 쳤답니다. 여러분!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젊은이들이 잘 먹는 '피자'입니다. 얼굴 구겨진 사람, 피자 한 판이면 확 펴집니다. /믿거나 말거나/ 웃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단한 존재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 ◀제목소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명도 팽개치고,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 고기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심방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을 대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에도 실패했고, 고기 잡는 것도 실패한 제자들에게 지금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으로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을 합하여 총 12번 나타나셨습니다. 사울(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을 빼면 11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지상에 40일 동안 계셨는데,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간헐적으로 보이셨는데 그것도 자신의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1절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 하니라"
그 후가 언제인가? 그 후를 알기 위해서는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전이란 요20장이요, 요20장은 부활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 날 저녁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다락방에 나타나셨으며, 그로부터 여드레 후 다시 다락방으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요20:19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오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들도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서는 자신의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20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들은 더 이상 슬픔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의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슬픔이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 슬픔을 안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시면서 우리의 슬픔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평강을 심어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움을 물리쳐 주신 후, 제자들이 담대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무장시키셨습니다.
22절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담대해졌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시기는 그 후'가 됩니다. 여기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데, 그 호수가 워낙 광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호수란 말 대신 바다라 즐겨 불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숫가에는 로마의 디베랴 황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도시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본문 1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거기에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는가?
2절에 보면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데의 아들들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다른 제자 둘"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와 빌립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때 갈릴리에 있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막16:7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란 삶의 터전이요 생존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로 그 삶의 터전, 생존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보낸 것입니다. 즉 그곳이 복음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사명 따라 복음을 증거했는가? 불행히도 본문 3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왜 그 밤에 고기를 잡지 못했는가? 그는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마4:19).
지금 베드로는 영적인 갈등 속에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두 번이나 만났지만 어떤 확신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 직업 찾아 고기를 잡으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인생에게는 누구나 디베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디베랴는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서성거리는 자들의 삶의 현주소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는 본전 밑진 인생입니다. 3년 전만 해도 여기서 한몫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자신의 어장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물은 다 상했고, 쇠붙이는 녹설었고, 배는 다 날았습니다. 그나마 기술도 이전 같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전에 많이 들었던 음성입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주님이었습니다.
4절 '날이 밝아올 무렵' 실패의 현장으로 우리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눅24;31절 이하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를 못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①눈이 밝아졌습니다. ②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마음에 결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면 사람은 힘 안들이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③행동했습니다.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서 그 밤을 그곳 엠마오에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다시 4절에 실패의 현장으로 부활의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상한 마음에 오시고, 실패한 현장에 오시고,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절망 속에 있는 자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곁에 주님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5절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여기 고기란 물고기를 의미합니다만, 원어의 더 깊은 뜻은 '식탁 위에 올려지는 진미, 즉 진귀한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랍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참뜻을 살리면 주님의 질문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얘들아!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었느냐?' 주석가들의 해석을 빌리면 더 깊은 의미로 `인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생명이요 진리인 나를 너희가 등져서는 아무리 수고해도 결코 귀한 것을 얻을 수 없단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15: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①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고기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일가?
물론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질 때에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산업의 현장에 있는 자들에게 고기는 자본이요, 돈일 것입니다. 정치판에 들어선 자들에게 고기는 곧 표요, 권력일 것입니다. 학문하는 자들에게 고기는 학위요, 지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물과 배에는 한 마리의 고기도 없었습니다.
②그러면 왜 고기를 잡지 못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고기 잡을 자들이 아닙니다. 고기를 잡아서 안될 사람이 고기 잡으려 간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이 일은 청산하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막1: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언약을 불신하고, 사명을 저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이 절대로 고기(축복)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나의 사건은 기억해야 합니다. 요나의 사건은 사명자들에게 좋은 거울입니다(욘1:4).
③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얘들아' 이것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이미 성인이 된 제자들을 부르는데 사용되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본문 이외에 이 단어가 성인에게 호격으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 역시 이제껏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릴리 바다에서만은 제자들을 딱한 번 `어린아이들아!'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허망한 바다를 향해 헛수고만을, 그것도 밤을 새워 가며 열심히 헛수고하는 제자들이 주님 눈에는 어린아이, 즉 철없는 아이로 보신 것입니다.
지금도 공허한 마음으로 실패의 그물을 헛되이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그들(우리)을 향하여 주님께서 오늘 아침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철부지들아! 너희 손에 무슨 귀한 것이 있느냐?'
여러분! 그들은 주님 앞에서 3년 동안 철저하게 신앙의 훈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주님은 세계선교의 비죤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을 떠나 세상 옛 생활로 돌아가 지식을 살리고, 경험을 살려 고기를 잡아보았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눅5장에 보면 베드로는 오늘과 똑같은 실패의 밤을 맞이한 때가 있었습니다.

●쿠바의 바닷가에 늙은 어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갔으나 어이 된 영문인지 한 마리의 고기도 건져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열흘, 스무날이 너머 무려 83일이나 지났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었습니다. 마침내 84일째가 되는 날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되는 거대한 청새치(marlin)를 만나 사흘 밤낮에 걸친 사투 끝에 간신히 포획하기에 이릅니다. 그 정도의 크기라면 지난 석달 동안 공친 것을 벌충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늙은 어부는 황홀한 만족감으로 집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늙은 어부는 뜻하지 아니한 상어 떼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 떼와 사투를 벌리지만, 그러나 해안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이라곤 앙상한 뼈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결국 늙은 어부는 쓰레기 조각을 위해 무려 90여일이나 허비했던 것입니다. 1953년 소설 부문 플리쳐상 수상작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하십시다. "없습니다. 주님! 우리 손안에 정작 귀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재물입니까? 권력입니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변하고 없어지고 무너지는 것들입니다. 진정 귀한 것은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것인데 그것이 영원한 생명인줄 믿습니다.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떠나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없나이다' 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의 음성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는 성공으로 인도하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절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①이 말씀은 당신의 삶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진 자들이 왼쪽에만 던졌겠는가? 오른쪽 왼쪽 동서남북 다 던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전의 경험과 기술을 총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오른편에 의미는 단순한 방향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41:10절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과 같이 이제부터는 인간의 이성적인 지각이나 판단에 사로잡혀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의 장 중에 붙들려 의롭게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른편은 하나님의 품안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 속에, 보호 속에, 은혜 안에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 바도 별 볼일 없을 것이다. 그러지 말고 나의 품으로 믿음 안으로, 은혜 안으로 다시 들어 오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인간의 방법으로 하지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편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우편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오른편의 능력으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도 이 말씀을 붙잡은 사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원망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실패는 성공으로 바꿔지는 역사가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합력하여 잘 된다더니 안 되는가? 왜 하나님이 안 해 주실까? 예수님을 믿으면 잘된다더니 뭐가 잘돼?'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 두 가지의 영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아무나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중심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가 아무리 큰 부자라고 해도 그 부모의 관계가 불편하고 나약한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약한 믿음, 빈곤한 믿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하고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오늘 예배 중에 불같은 믿음을 붙잡고 일어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선'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선을 육체적인 편안함을 생각합니다. 성공과 동일시합니다. 많은 이익과 동일시합니다. 쾌락을 선으로도 생각하고, 주머니의 돈을 선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선을 생각할 때 가장 크게 보는 것은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잠8:17-8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은 진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일차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달려가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16: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 다음 성경에서의 선은 '하나님이 보시고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이 선입니다. /믿/
▶다시 본문 속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②주님은 고기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지난밤까지 그곳에 고기가 없었으나 지금 그물을 내려 보라 내가 그곳에 고기를 불러모으리라는 것입니다.
바다와 고기를 창조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고기를 모으고, 흩어지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삶의 그물 속에 고기를 몰아 넣을 분도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할/
건강의 그물, 재물의 그물, 행복의 그물, 형통의 그물도 주님이 모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그 복이 임하게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③이 말씀은 '역사는 순종할 때에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말씀은 순종할 때 고기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앞길에 칠흑같이 어두운 먹구름이 가로놓여 있어도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가면 주님이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7-8절에 보면 그래도 베드로가 수석제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본문에 주시라는 외침이 요한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바다 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다'는 구절을 원문은, '베드로는 자기 자신 을 바다 속으로 던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초라도 더 빨리 주님에게 다다르고자 하는 베드로의 급한 심정을 잘 묘사한 표현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그 급한 와중에도 벗어 두었던 겉옷을 걸쳐 입을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9절에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실물 신앙 교육을 시키십니다.
그들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고, 그들의 실패를 추적해서 다시는 그런 실패를 범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십니다.
①숯불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왜 숯불을 등장시켰는가? 이 숯불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얽힌 추억이 초점입니다. '삼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불가에서 주님을 부인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숯불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추적합니다.
요18:18을 보면 그곳은 가야바의 법정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드디어 이 제사장 앞에 끌려와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 어떤 병정하나를 만납니다. 그 장면 속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합니다. 숯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피워 놓으신 이 숯불을 보통 숯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실패할 때의 장면들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되돌아 봐야 그 문제를 뛰어 넘는 삶의 도약이 있습니다.
예) 운전으로 생활하는 운전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냅니다. 사고가 나면 그 다음 어떻게 됩니까? 운전대를 잡고 싶지도 않고 특히 사고 현장 근처에는 지나가고 싶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운전대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직업인으로써 완전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전을 하셔야 합니다. 한번 운전에 실패했어도 다시 해야 합니다. 운전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만이 해결의 방법은 아닙니다. 떨려도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 그 지긋지긋한 현장에도 다시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숯불을 다시 등장시킨 이유가 뭡니까? 숯불 가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합니다, 배신합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그 숯불 가에서 베드로는 다시 서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붙들어주리라. 다시는 넘어지지 말라'는 사랑의 표현으로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을 굽고 떡을 구워 먹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숯불과 떡과 생선은 또 다른 영적인 의미가 부여됩니다.
숯불을 피워 놓은 또 다른 의미는 곧 성령의 불을 의미하며 다시금 베드로에게 성령의 충만한 자가되어 다시는 실패하지 말라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믿음은 능력입니다. 능력 받지 못하면 또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생선: 불 위에 올려져 있는 생선은 자기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또 자기가 생선처럼 죽어야 합니다. "베드로야 너 이제 그 엉뚱한 혈기 좀 부리지 말고, 이 생선처럼 온전히 자아를 죽여버려라! 그래야 내가 너를 마음대로 쓸 것 같다"는 무언의 의미입니다.
③떡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떡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귀합니다. 이 말씀은 영혼의 떡입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믿음의 실패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할/

10절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
고기를 잡은 제자들은 고기에 감격해서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①지금 잡은 생선을 주님께 가져갑시다. 기독교는 지금 이 시간의 종교입니다. 지나간 어제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다가올 미래만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오늘 현재 지금 내게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조금 전에 일어난 과거의 잘못도 묻지를 않습니다. 요8: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지나간 과거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앞만 보고 달려간 것입니다(빌3:7-14).
②잡은 고기에 눈이 어두워지지 말고, 고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을 주시면 받은 복에 눈이 가리워져서 복을 주신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물에 가득찬 고기를 세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 날 고기를 잡은 숫자가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53마리를 세느라고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잡은 생선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이 생선(축복)을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③우리도 지금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사명자는 바로 지금 사명의 현장에서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마25:16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을 남기고"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고 사명을 깨닫았으면 바로 가야 합니다. 서성거리면서 세월을 허송하지 맙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것이면 족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의 물멧돌이나 바울의 붓이면 족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바로 지금 영원히 남을 복음장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왜 주님이 제자들의 실패의 현장에 오셨습니까? 그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거듭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 사랑의 결과는 '배신자에 대한 용서'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그 용서의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세 번씩이나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용서요, 참된 용서란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속에는, ▶내가 과거에 배신한 죄를 용서해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우리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믿는 모양은 갖추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들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직분을 맡았어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영광스런 직분인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직분을 맡았어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우리도 자기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가!"하고 말입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았어도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요한과 야고보과 함께 중요한 곳에 동행했던 수제자입니다. 변화산과 겟세마네 동산에 세제자만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특권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칭찬을 받아도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열심과 특심으로 앞장을 서도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일을 하든 앞장섰습니다. 교회에 귀한 일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교회가 든든합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도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맡은 임무에 충성해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확인하고 베드로에게 목양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2004년 4월 18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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