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3대 사역! (마 4:23-24)
섹스피어의 단편집 '오펠로'의 이야깁니다. 옛날 시리아에 오펄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소원은 자기 나라 왕을 한번 모셔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가장 절대자! 말 한마디면 온 나라가 다 그대로 복종하는 왕을 가까이 모셔보는 것이 그 사람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노력해서 오펠로는 왕의 심복이 될 수 있었답니다. 그는 왕을 가까이 하면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 했습니다. 왕은 이 나라의 신이요 절대자로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던 왕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왕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게 되었답니다. 불안해하고, 긴장하고, 잠을 못 자고, 염려를 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루는 왕을 모시고 길을 가는데 왕이 마귀에게 눌려 헛소리를 해 대는 것입니다. 오펠로는 크게 실망하고 "내가 모시고 있는 왕보다는 사단이 더 강하고 힘이 있구나!" 생각하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서 사단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단에 사로잡혀 악령에 충만한 일만 골라가며 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고, 모든 일이 잘 되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발걸음이 움직여지지 않고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을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순간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사단보다 더 힘 있고 능력 있는 것이 십자가임을 깨닫고, 사단의 길에서 벗어 나와 교회 안에 들어가 주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섹스피어'의 고전 소설의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요,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한 시대에 쓰시려고 기름부음을 받는 임직 예배입니다.
먼저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임직을 받는 여러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미국에 대통령이 집무하고 있는 곳을 백악관이라고 합니다. 저는 백악관을 가보지 못 했습니다 만은, 그 곳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망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답니다.
같다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세계를 움직이는 대통령의 집무실이 어떻게 이렇게 허술할까 하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러나 집이 커서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권력으로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집은 작아도 그 안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세계의 모든 정치와 경제가 거기에서 다 움직이게 됩니다.
오늘 임직을 받는 여러분들이 어떤 외형상으로 보면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오늘도 장엄한 인류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가 임직을 받는 여러분들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권세가지고 세상 어두움의 세계를 물리치고 생명의 빛을 드러내게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역을 통하여 목회자들의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가르치는 사역. 둘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사역. 셋째,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3대 사명을 찾아보게 됩니다.
첫째, 교육(디다케)입니다. 둘째, 전도(케리그마)입니다. 셋째, 병든 세상을 치유하며 섬기는 봉사(디아코니아)입니다.
주님의 이 세 가지 사역을 통해서 오늘 임직을 받는 여러분들의 사역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첫째: 교회는 가르치는 사역, 즉 목사는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을 잘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의 중심은 교육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교육적 사명이 있으며, 성도는 배움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종은 잘 가르쳐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사역을 자세히 보면, 가장 많은 시간과 힘을 쏟은 것은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교육하며 훈련시키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로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향기가 없는 교인들로 인해,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80년 전 영국교회는 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태반이 텅텅 비어있답니다. 왜요? 교회의 교육적인 사명을 감당치 못하고, 성도를 양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일본교회, 인구의 0.6-7%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미미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일본에도 역사적으로 세 번의 놀라운 기독교 부흥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430년 전 카톨릭 초창기의 부흥이 있었고, 두 번째는 130년 전 개신교 선교 시작 때의 대 부흥기가 있었고, 세 번째는 2차 대전 이후 7년 대 부흥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사의 보고는, "일본은 머지않아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곧 선교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망은 크게 어긋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래요? 성도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이 중요한 사역을 위해서 택하신 장소가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회당입니다.
회당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말과 "모인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마을 중심에 회당을 짓고,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고, 자라나는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장소입니다.
그 후로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 뿐이지만 회당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회당을 마을 광장 중심이나 성읍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다 세웠는데 그 방향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오직 제사만을 드리는 집이었다면, 회당은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재판하며, 공부하며 토론하며 회의도 하는 다목적 기능을 가진 신앙과 삶의 중심센터였고, 심지어 나그네를 위한 여관과 같은 역할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회당은 예배의 처소요, 학교요, 문화의 광장이요, 친교의 터전이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성전보다는 회당적인 기능을 더 많이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바로 회당교회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주일에 모여서 예배만 드리고 모든 사역이 끝나는 교회가 아니라, 이 지역 속에서 회당적인 기능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배움이 있는 교회! 누구든지 교회에 와서 영혼의 쉼을 얻으며, 살아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교회!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쉼을 얻고, 꿈을 키우는 교회 공동체!
타락의 문화 속에서 생명의 문화를 꽃피우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면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는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런 일들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로 가르치는 교육이 있어야 하고, 이 교육을 목회자들이 잘 해야 합니다.
■오늘 임직을 받는 여러분! 잘 가르치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보다 몇 배 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준비하는 종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잘 가르치다 보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눅5: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이제 성도님들에게도 부탁을 드립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에 잘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말씀은 잘 듣는 것이 복이고, 읽는 것이 복이고, 실천하는 것이 복입니다.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런데 말씀을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백부장 고넬료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행10:33절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신전의식이 귀합니다.
두 번째: 교회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곳입니다. 목사는 복음을 잘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두 번째 사역의 초점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캐루소"라고 하는데 근원적인 뜻은 "선포하다" "외치다"의 뜻이고 "설교하다"의 뜻도 됩니다.
"예수를 믿으라" "회개하라" "변화를 받으라"고 전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 일에 최우선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사실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열심을 내시고 계십니다.
사9:7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고, 또 사37:32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요4장에 보면 예수님은 한 여인을 전도하시기 위해 유대인들이 그렇게 멸시하는 이방 땅 사마리아에 가셔서 우물가에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4:35절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앉아서 추수 때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조급하고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불타 있었습니다.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때는 이미 되었다고 하십니다. 아니 때가 지금 이미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주님의 최고의 관심은 전도입니다. 전도는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지상명령입니다.
■딤후2:1-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하여 전도자의 3가지 모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군인은 충성이 가장 큰 조건이 됩니다. 로마 병정들은 군에 들어가면서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합니다. 군인으로서의 최고의 미덕은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종이나 성도의 최고의 미덕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군병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훈련, 전도의 훈련, 봉사의 훈련 등, 군인이 되는 것은 훈련에서 훈련으로 되어집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고 하시며 연습을 강조했습니다.
"훈련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 전쟁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는 해병대 훈련소의 말이 지금도 저는 잊지 않고 기억됩니다.
충성하고 열심히 훈련받는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경주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선수는 법을 따라 경기해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렸다 해도 법대로 뛰지 않았으면 상을 받지 못합니다. 어느 경기나 룰, 규칙이 중요합니다. 선수는 그 경기의 법칙을 정확하게 숙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종들은 바른 복음, 순 복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합니다.
법대로 경기한다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경쟁하는 일에 전적으로 애 쓴다'는 뜻입니다.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출전한 일에 생명을 걸고 애쓰는 것을 법대로 경기한다는 말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함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③그리스도의 농부로 살라는 것입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열매를 거둘 때입니다. 추수의 기쁨을 누리는 농부는 수고가 따른 농부입니다. 그런데 농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씨를 뿌릴 때 뿌려야 하고 거름을 주어야 할 때 거름을 주어야 하고 거둘 때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수고도 헛수고가 됩니다. 때를 잘 포착하고 기회를 선용하는 농부는 풍성한 열매를 거둡니다.
목회는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과 같습니다. 거둘 때 거둘 수 있는 영혼의 추수꾼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신유의 역사는 기도하는 자에게 옵니다.
명성훈 목사님은 그의 글에서 깨어져가고 있는 가정을 풍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싸우는 마치 콩가루 같은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주먹다짐이 오가고 고함과 욕설이 오다가 분을 참지 못한 부인이 방안에 불을 질렀습니다.
부모의 격렬한 싸움에 열 받은 아들이 20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아들이 떨어지는 모습에 절망한 어머니도 뒤 따라 베란다에서 몸을 날렸습니다. 소화기로 불을 끄던 아버지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뒤따라 뛰어내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뛰어 내린 곳이 20층 아파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 사람이 20층 아파트에서 떨어졌는데도 죽지 않고 다 살아 있었답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제비족이었고, 어머니는 날라리 부인이었고, 아들은 비행소년이었답니다.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가정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들을 교회가 치유해야 합니다. 제비족 아버지도, 날라리 부인 어머니도, 비행 소년 그 아들도 교회가 치유시켜야 합니다.
23절에 보면 예수님은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 육의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①예수님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과 함께 수많은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말씀이 증거되는 곳마다 치료의 능력이 나타나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와 고침 받았으며, 군대귀신이 들려 공동묘지 사이에서 사악하고 무서운 성품으로 변해 버린 자를 고쳐주셨으며(마8:28),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주셨으며(마9:20-22), 앞 못 보는 소경을 고쳐주셨으며(마9:27)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뱅이를 고쳐 주셨습니다(요5:1-9).
②예수님은 정신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십니다.
현대인들은 산업사회에 살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때도 많고 사고를 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갑니다.
상습적인 마약 중독자가 늘어가고, 술집과 나이트클럽 등 향락산업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현대인들이 정신적인 질병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증거입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질병에서 치료받으려면 만병의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여기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③예수님은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육체가 병들어 있는 것도 비참한 일이나 정신적인 질병은 더 불쌍하며 더욱 비참하고 무서운 질병은 영혼의 질병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질병은 때로는 현대의학으로 치료받을 수 있으나 영혼의 질병은 세상에서 치료받을 수 없고 결국은 멸망당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영혼 치료는 예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영혼은 죄로 인해 병들었기 때문에 그 죄의 문제는 주의 보혈로만이 치료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치는 그 사역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오늘 임직을 받는 여러분들이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를 통하여 옵니다.
깨어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가르치고, 전파하며, 고치는 사역을 잘 감당했던 사람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전4: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행20:17-21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섬기면서 목회한 목회철학이 나옵니다. 알아보고 은혜를 받으십시다!
행20:19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겸손에 목회, ■눈물의 목회, ■인내의 목회, ■섬김의 목회가 바로 바울 사도의 목회 철학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겸손' 이것은 영적 생활의 본질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우쭐대거나 사람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자신을 기꺼이 낮추었습니다.
우리에게 겸손함이 없으면 주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겸손함이 없으면 성도를 섬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눈물의 삶을 살았습니다.
힘들어서, 어려워서, 괴로워서, 울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흘린 눈물은 힘들어서 우는 눈물이 아니고 영혼을 사랑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임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저 분이 저래서는 안 되는데, 다 보이는데 왜 저러고 있을까? 왜 저렇게 방황할까? 왜 저렇게 완악 할까? 저렇게 휘청거릴까? 이것이 안타까워서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영혼을 사랑하는 눈물입니다. 자기의 죄를 바라보고 울었고, 부족함 때문에 울었고, 타락한 영혼, 병들어 가는 영혼, 죽어 가는 영혼들 때문에 흘린 눈물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보다 좋은 강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의 목회는 가히 물의목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126:6절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바울은 '시험을 참고' 인내의 목회를 했습니다.
바울이 당하고 있는 시험은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려는 간계입니다. 사람들의 모함을 듣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기도 응답도 인내입니다. 천국도 인내로 가는 곳입니다. 목회는 두 말할 것 없이 인내입니다. 참고, 참고, 참고, 참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의 목회는 섬김의 목회입니다.
신앙생활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목회도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목회입니다.
결론입니다.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거시고, 기도해서 능력 받아 세상도 치유하고, 병든 자도 치료하는 능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군사로, 경주자로, 농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겸손의 목회, 눈물의 목회. 인내의 목회, 섬김의 목회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3년 4월14일 수도노회 목사 임직예배 설교)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 7:7-11) (0) | 2022.02.03 |
---|---|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마 21:1-11) (0) | 2022.02.03 |
가상칠언(架上七言)의 진리! (눅 23:33-43) (0) | 2022.02.03 |
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 (사 53:1-9) (0) | 2022.02.03 |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사 53:1-7/요 3:14-15) (0) | 2022.0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