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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두란노 서원 사역 행19:8~10

by 【고동엽】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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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외국인이 한국 목회자에게 질문했답니다.

“왜 바울이 하필 ‘폭군의 서원’에서 강론했는가요?”

 

두란노 서원은, 영어로 school of Tyrannus인데,

영어나 라틴어 권에서 티란누스는 '폭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국 목회자는, 예전에 한 번도 공부해보지 못했던 내용인지라, 버벅거리며 얼버무렸다고 합니다.

 

‘두란노’는 헬라 사람의 이름인데, 헬라어로 ‘티란노스’

그 의미는 ‘sovereign, 다스림’을 뜻합니다.

 

그런데 라틴어-영어로 넘어오면서, 그 단어의 의미는

부정적인 ‘폭군, 폭압 tyrant, tyranny’의 의미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당시, 실제로 그가 '폭군'이었던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의 이름이 그렇게 거창했다는 거죠.

부모는, 자기 자녀가 장군이나, 세도가가 되기 원하는 소원이 있어서, 이름을 거창하게 짓잖아요.

 

어떤 참고도서에 의하면, 두란노는 철학자이거나, 사상가로 추정합니다. 자기 집에 '서원 school'이 있었으니까요.

또한 당시 '티란노스'라는 의미는, '다스림, 주권 sovereign'을 뜻하였지요.

그러므로 '두란노'를 부정적 의미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원'에 대해서는, 아래 내용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3차전도여행을 시작해서 에베소를 다시 찾은 바울은,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3달 동안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또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다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회당에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3달 내내,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복음에 순종하기는커녕, 공개적으로 복음을 비방하면서,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바울을 배척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행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결국 바울은, 복음의 훼방꾼들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본문에 언급한 제자들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2차전도여행을 매듭짓고,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던 바울이, 잠시 기항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그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바울이 에베소에 체류하게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

그리고 3차전도여행을 시작해서 에베소를 다시 찾은 바울을 통해,

새롭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에베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일컫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방금 확인한 것처럼,

에베소에는 이미 주님을 영접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힘을 합쳐서,

회당에서 자신을 배척하는 복음의 훼방꾼들과 맞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훼방꾼들을 떠나,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우리 말 ‘따로 세우다’로 번역된 ‘아포리조’는 경계선을 그어, 구별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영접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분명하게 선을 그어,

복음을 배척하는 복음의 훼방꾼들과 자신들을 구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뒤섞여 살아서는, 거룩한 영적 힘을 누릴 수도, 발휘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두란노 서원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이미 복음을 영접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새롭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날마다 강론했습니다.

 

:9b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은 무려 2년동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서원’은 헬라어 ‘스콜레’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 school이 파생되기는 했지만,

본래는 토론이나 논쟁도 벌어지고, 강연도 이루어지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여가를 즐기기도 하는 다목적의 공간이었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시대에는 이런 스콜레가 흔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울이 2년 동안이나 날마다 예배와 말씀공부의 목적으로,

동일한 스콜레를 계속해서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두란노 서원은,

에베소에 살고 있던 티란노스라는 사람의 스콜레를 일컫습니다.

 

베자 사본에 의하면, 오전에는 주인인 티란노스가 자신의 스콜레를 사용했기 때문에,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티란노스가 사용하지 않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의 스콜레를 매일 이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무더운 에베소에서, 그 시간은, 사람들이 일을 멈추고,

점심식사를 한 뒤에, 시에스타 즉 낮잠을 즐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정 장소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낮음을 자는 시간 동안에,

바로 그 시간에 비어있는 티란노스의 스콜레에서,

날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육체는,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혹한의 북극에 사는 사람의 생체 리듬과

혹서의 남방에 사는 사람이 생체 리듬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무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것은,

그래야 정상적인 생체 리듬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도 그곳의 무더운 기후 속에서

정상적인 생체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낮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육체를 위해 낮잠을 자기보다는, 날마다

그 시간에 비어 있는, 티란노스의 스콜레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복음의 훼방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듯 자신들을 구별하여, 따로 세운 그들이야말로,

세상 밖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확립한,

진정한 교회요, 참된 영적 공동체였습니다.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을 회당에서 배척한 복음의 훼방꾼들 덕분에, 결과적으로 역설적이게도

복음은 에베소를 근거지로 해서, 에베소를 넘어,

오늘날 터키의 서부 지역인, 아시아 전 지역에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로 혹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회당에서 배척한 복음의 훼방꾼들,

그리고 인종을 불문하고 아시아 전 지역에서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 사이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하게 따로 세운

바울과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상과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따로 세우는 교회를 이루고 있었기에,

주님께서 그들을 통로로 삼아, 당신의 복음이 에베소를 넘어,

아시아 전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구별하여 따로 세웠다고 해서,

그들이 에베소를 떠나 심산계곡, 외딴 수도원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에베소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는 시간에,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공부하던 티란노스의 스콜레 역시

에베소 도시 안에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4대 도시인 에베소,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버티고 있던 당시의 에베소는,

대표적인 우상의 도시요, 맘모니즘의 도시요,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타락의 도시 한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과 자신들을 주님 앞에 분명하게 구별하여 따로 세움으로써,

도리어 세상 사람들을 살려내는, 진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따로 세워 구별한다는 것은, 공간이나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심령의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타락한 에베소의 한 가운데에서도,

세상 사람들의 타락한 사고와 삶의 방식으로부터, 자신들의 심령을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심령을 밝혀주는, 진리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써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그 편지 가운데 ‘사랑장’으로 불리는 고전13장은, 그 편지의 압권입니다.

 

고전13장:1~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봅니다.

 

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바울은, 북소리보다 더 큰 영적 울림의 이 편지를,

세상에서 격리된, 외딴 장소에서 쓰지 않았습니다.

 

타락의 도시 에베소의 한 가운데서, 세상 한 복판에서,

바울은 이 편지(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바울 역시, 자신을 세상과 구별하여,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과 진정한 교회를 이룸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심령을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따로 세운,

구별된 영적 공동체로 일굼으로써, 주님께 진 사랑의 빚을,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갚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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