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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1~7
부제 :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
3차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자신이 약속했던 대로
다시 찾은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성령님이 계심을 알지도 못하고
단지 요한의 세례만 알뿐인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베풀면서 바울이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조금 전까지 알지도 못했던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친히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구원을 입기 위해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인 적도 없었지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는 은혜가
주님의 영을 통해 그들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본문 행19:6 ‘바울이 그들(에베소 교인)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성령님께서 임하심과 동시에
그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미 숙고해 보았듯이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최초로 주어졌던 방언의 본질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신비스러운 천상의 말이 아니라
평소에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던 사람들 간의 소통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신비한 천상의 말을 뜻하는 방언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언 역시 사람과 주님간의 영적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소통’이라는 방언의 본질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 성경이 의미하는 예언은
점쟁이처럼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과거를 해석하며
현재를 분별하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자신과 타인의 삶을 말씀 위에 곧추 세워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안수와 동시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제자들의 수는 모두 12사람쯤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을 때에
12사람쯤 되는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방언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예언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들이 모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증거가
방언이나 예언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을 안겨 줍니다
성령님 안에서는
방언과 예언이 따로 놀지 않고
언제나 한데 어우러진다는 깨달음입니다
▲방언은 (지난 시간에) 대화가 통하지 않던 사람간의 ‘소통’이라고 했습니다
소통의 전제는 공감입니다
공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들간에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어떤 사안이나 주제에 대하여
서로 공감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소통력은 곧 공감력입니다
공감력과 소통의 범위는 정비례합니다
공감력이 크면 소통의 범위도 자연히 확대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세상과 시대를 해석하는 예언의 수반 없이
공감력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의 소통력과 공감력은 야합과 구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악을 행하는 사람의 처지도 공감하고
그들과도 소통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악과 불의, 그 자체와 야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방언(소통)에 예언(공감)이 수반되지 않으면
우리의 소통력과 공감력은
지켜야 할 기준과 원칙을 상실한 채
세상과의 야합을 정당화하는 자기변명이나
자기 면죄부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경적 의미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과거를 해석하며
현재를 분별하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자신과 타인의 삶을 말씀 위에 곧추 세워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언의 의미는
선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와 세상을 바로 세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예언자 에스겔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겔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자기 죄에 빠져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예언을 맡긴 예언자들을
이 땅에 계속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에스겔서 33:13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는 다른 절대적인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너는 죽으리라’고 예언하셨다면
그 악인에게 살 길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
악인이 아무리 발악해도 그 악인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은
도리어 그 반대였습니다
겔33:14 ‘14.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5.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16.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고 예언하셨다면
그것은 악인을 죽이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악인으로 하여금 돌이켜
정의와 공의 위에 바로 서게 하심으로
당신의 말씀으로 그를 살려주시기 위함임을
하나님께서 친히 밝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역할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선지자들,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미래를 알아맞히는 신통력을 과시하거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와 세상과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예언의 소명을 다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과 살리려는 사람은
목소리와 억양, 표정과 눈빛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은 감화력입니다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감화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공감력을 배제한 예언만 있다면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의 예언은, 그 내용이 아무리 옳은 소리라 할지라도
감화력은커녕 도리어 자기 안에 갇힌 독선이 말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보다 율법을 내세웠으면서도
감화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독선자로 전락했던 것은
그들이 인간에 대한 공감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화력과 공감력을 지니지 못한 그들은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율법을 독점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이
따로 놀지 않고 한데 어우러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감화력이 수반되지 않는
방언의 공감력은
야합과 구별될 수 없고
방언의 공감력을 결여한
예언의 감화력은
독선으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쪽이든 한 쪽으로 치우치면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행19장의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12명쯤 되는 그들 (에베소 성도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예언과 방언을 동시에 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이
한데 어우러져야
사람을 살리는 주님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원본 동영상의 16:35~
▲2천년 전 성령강림과 함께 주님의 제자들이
방언을 하던 현장에는
히브리파 유대인 뿐만 아니라
마침 오순절을 맞이해서 온 지중해 세계로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라파 유대인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최소한 16지역에서
예루살렘을 찾은 헬라파 유대인들은
제각각 다른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방언을 할 때
희한하게도 헬라파 유대인들은
제자들(히브리파 유대인)의 방언을
각각 자신이 사용하는 모국어로 알아들었습니다
제자들은 학교 문턱도 넘어서 본 적이 없는
무식한 갈릴리 출신들이었습니다
전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한 말이었는데도
그곳에 모여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은
각각 자신들의 모국어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의 강림과 동시에
히브리파 유대인인 제자들과
헬라파 유대인(16개국)들 사이에
소통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국내파요, 히브리파 유대인었던 제자들에게
그동안 그들이 경원시 (멀리) 해왔던
해외파인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공감력이 생겼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님의 임재속에서 얻은 것이
공감력뿐만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오순절에 처음으로 방언한 시각은
아침 9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을 가리켜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술취한 것이 아니요
자신들의 방언이 성령님께서 임하신 결과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강림을 예고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그 예수님은
현재의 그리스도이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주님이심을 설파하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돌이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행2:41에 의하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을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숫자가
무려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베드로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감화력이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성령님 안에서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공감력이
세상과의 야합으로 전락하거나
그의 감화력이 독선의 우물에 갇히지 않고
그는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사람을 살리는
사도의 삶으로 일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임하신 성령님께서
사람을 살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출처 원본 동영상의 29:49~
▲우리의 공감력이 세속적 야합과 지금 구별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스스로 감화력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실은 자기 독선일뿐이라면
그래서 (성령 받고) 우리가 날마다 옳은 소리를 하면서도
이 시대와 세상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사익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력과 감화력은 사익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작동합니다
만약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사익을 좇았다면
세상을 살리는 사도행전의 공감력과 감화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영원히 책임져 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사익을 좇아온
우리의 어리석음을 회개하십시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주님의 약속처럼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시어
지금 우리 안에 임해계시는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좇아 살아가십시다
성령님 안에서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으로
우리 사회의 공의와 정의를 확립해 가십시다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이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며
우리를 살리고 이 시대를 살리며
다가올 미래를 살릴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을 지닐 때
우리는 우리의 이웃인 중국과 일본을
평화의 사슬로 한데 엮는 평화의 사도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죄인이 자기 죄에 빠져 죽기를 원하시지 않고
돌이켜 반드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그 뜻을 받들어 죄인과 소통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의 삶에 공감하시면서도
단 한 번도 세상의 불의와 야합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값을 직접 치르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심으로
우리 모두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감화시켜 주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으로 이미 우리 안에 임해 계시고
우리로 하여금 벌써부터 당신 자신인 말씀 안에 거하게
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 모두
주님의 공감력과 감화력으로
우리 사회의 공의와 정의를 구현하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을 등지고 사익을 좇느라
야합을 공감력으로 위장하거나
독선을 감화력으로 곡해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 안에서 방언의 공감력과
예언의 감화력으로
이 시대와 다가오는 미래를 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게 해 주시고
동북아와 세계평화를 경작하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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